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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문자 표기 논쟁은 언어학의 문자론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문자론이라는 것은 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세계의 다양한 문자 및 언어 안에서 그 문자의 활용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19세기에는 문자론을 연구하는 학자가 많았지만, 20세기 중반부터 조금씩 퇴조해 지금은 연구자가 적은 게 현실이다.
문자론 관점에서 보면 한국어엔 흥미 있는 측면이 있다. 첫째, 한국어는 찾기 어려운 자기 언어를 위해 개발한 문자를 보유하고 있다. 많은 언어는 다른 거대 문명에서 문자를 빌려오거나 빌려온 문자를 파생적으로 발달시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영어의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에서 파생한 로마제국의 언어인 라틴어의 문자이며, 그 알파벳은 유럽의 많은 언어에서 활용됐다. 또 일본어의 가나 문자는 중국의 문자인 한자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다른 언어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문자이며 한국어의 발음을 잘 반영해 한국인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준다.
둘째로 흥미 있는 것은 한국에서 한글과 한자 두 문자를 모두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세 가지 문자인 히라가나·가타카나·한자를 인정한다. 두 문자 이상을 인정하며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다른 언어들은 모두 다 한 가지 문자만 사용한다. 물론 오늘날 한국은 사실상 한글 전용이지만 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며 사회에서도 한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은 강력한 한글 전용 정책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학교에서 교양으로 한자를 가르치지만 사회에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면 한국어 문자 표기를 둘러싼 논쟁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인다. 한글은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이지만 한국 문화에 영향을 많이 미친 중국 문명과 19세기 이전의 역사와는 단절돼 있다. 반면 한자는 중국 문명과 역사를 존중하는 상징이지만 한국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한국어 문자에서 한자의 존재를 빼낼 이유가 없다. 한자는 한국 문화에 영향을 많이 미친 중국 문명과의 가교로써 깊은 교양을 담은 문자다. 동시에 경제적, 인적 교류가 많은 일본과도 가교가 될 수 있다. 한글을 우선하면서 한자의 가치를 인정하고 어문정책에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첫걸음은 초등학교부터 국어 시간에 한자 교육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사실 건국 이후 1970년대 초까지 국어 시간에 한자를 가르친 선례가 있어서 무리한 제안은 아니다. 한자가 배우기 어려운 문자인 만큼 일찍 시작할수록 학습 효과가 높아진다. 또 21세기가 요구하는 열린 태도를 양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 2013.02.24
로버트 파우저 미국 미시간대에서 동양어문학 학사, 언어학 석사를, 아일랜드 트리니티대에서 언어학 박사를 했다. 일본 교토대·가고시마대를 거쳐 서울대로 부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