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안도 다다오도 반한 '여걸'… "손때 묻은 옛물건이 날 절망에서 구원"

해암도 2025. 2. 3. 08:39

 옥관문화훈장 이행자 본태박물관장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자리한 본태박물관에서 만난 이행자 고문. 거침없는 여장부인 그는 옛가구와 규방용품이 가득한 제1전시관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이 고문 뒤로 보이는 작품은 이스라엘 작가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유포리아'. /신현종 기자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이행자는 오랜 친구 사이다. 제주 서귀포에 본태박물관을 세울 때 건축주와 설계자로 만난 두 사람은 ‘일 중독’인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고 의기투합했다. 안도는 불도저처럼 일을 밀어붙이는 이행자를 보고 ”이렇게 센 여인은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암 투병 중인 안도의 신작도 올 하반기 본태박물관 부지에 들어선다. 노출 콘크리트가 아니라 스테인리스 건축이어서 화제다.

 

서귀포에서 만난 이행자 본태박물관 고문은 “여걸은 무슨. 내가 목소리만 크지 허당이에요” 하며 웃었다. 세간에는 ‘정주영 넷째 며느리’ ‘노현정 시어머니’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한국의 ‘본모습[本態]’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40년 넘게 옛 물건을 수집해온 베테랑 수집가다. 1000여 점에 달하는 골동품과 상여, 추사 현판과 백남준, 구사마 야요이가 어우러진 예술의 보고(寶庫)를 일군 공로로 지난해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재벌가 며느리? 일선 엄마!

-이문열 김정옥 강인숙 선생 등과 함께 훈장을 받으셨다.

“상이 뭐 중요한가. 40년 넘게 한 분야를 파고들면서 고생했다고 준 것 같은데, 나는 그저 우리 박물관에 청소년들이 많이 와서 선조들 손때 묻은 옛 물건을 많이 보고 갔으면 좋겠다.”

-수훈식 연설은 고사했던데.

“내가 친구들 사이에선 ‘대장’인데, 공식 석상에 서면 ‘안녕하세요’ 소리도 잘 못 하는 사람이다(웃음).”

-값나가는 현대 미술품이 아니라 옛 물건에 천착한 이유가 있을까.

“그림 잘 그리는 천재들이야 앞으로도 계속 나오겠지만, 옛 물건들은 지금 모아 놓지 않으면 버려지고 사라지니까. 애초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수집한 것도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모았다고 들었다.

“시부모님 밑에서 남편 병구완하고 애 셋 키우며 살았어야 해서 짬 날 때 인사동 한번, 장안평 한번 나들이 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소반이며 문갑, 반닫이, 조각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라. 용돈 생길 때마다 하나둘 사 모으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장안평 상인들은 나를 ‘일선(큰아들) 엄마’라고 불렀다(웃음).”

-박물관까지 지을 생각은 어떻게 하셨나?

“개수가 늘다 보니 어디 둘 데가 마땅치 않고 누굴 주려 해도 구닥다리라며 싫어할 테니 조촐하게라도 한 공간에 모아 놓고 싶었다. 정몽구 회장님, 정몽준 의원님 등 형제 분들이 도와주셔서 일을 벌일 수 있었다.”

-서울이 아니고 왜 제주인가?

“남들은 나를 ‘재벌가 며느리’라고 하는데, 나는 시집와 평생 일만 하고 살았다. 거울 한번 들여다볼 틈도 없이 바빠서 ‘병원에 딱 이틀만 입원해봤으면 좋겠다’ 했을 정도인데 그때는 아프지도 않더라(웃음). 할 일이 많으니 걸음도 빨라서 ‘축지법 쓰느냐’는 말도 들었다. 동갑내기 남편이 40대에 먼저 떠나 외롭고 고달픈데, 어느날 제주에 와보니 숨이 쉬어지더라. 살 것 같더라.”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본태박물관 전경. 한국의 전통 담벼락과 안도의 노출 콘크리트 기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본태박물관 제공

◇ 안도 다다오와의 인연

-안도 다다오에게 직접 설계를 부탁한 건가.

“1995년인가, 일본 나오시마 섬에 간 적이 있다. 쓰레기 섬이었다가 예술의 성지로 변신한 곳인데, 거기 들어선 미술관 건축에 매료됐다. 그걸 안도 다다오라는 사람이 설계했다고 해서, 언젠가 박물관을 짓게 되면 꼭 그에게 맡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안도의 첫인상은 어땠나?

“그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커피 마시며 노닥거리는 걸 질색한다. 그게 나와 잘 맞았다. 안도에게 나는 늘 바쁘고 화가 나 있는 여자였을 것이다(웃음).”

-안도는 현재 암 투병 중인데.

“우리 박물관을 지어주기로 약속한 직후 암 진단을 받았다. 나는 기절할 것 같은데, 안도는 ‘치료하면 되지’ 하더라. 천성이 아이 같아서, 신발이 한 짝 뒤집어진 모습을 보고도 배꼽 잡는 사람이다. 내가 골동품 자를 선물했더니 아이디어가 안 나올 때마다 자로 자기 머리를 때리겠다고 하더라(웃음).”

-안도의 신작이 올 연말 본태박물관에 들어선다고 들었다.

“추사 김정희 현판만 따로 모아 200평 규모의 전시관을 만들려고 한다. 안도의 상징은 노출 콘크리트인데, 이곳이 습지대라 시간이 흐르면 건물색이 변한다고 걱정했더니 스테인리스로 해보겠다고 하더라.”

본태박물관 제1전시실에는 각종 소반의 쌓아올린 '소반 타워'와 조각보 등 규방용품이 전시돼 있다. RM이 소반타워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서 더 유명하다. /본태박물관 제공
 

◇ RM도 반한 ‘소반타워’

-구사마 야요이의 ‘거울의 방’은 줄 서서 관람해야 할 만큼 본태박물관 명소가 됐다.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박물관 짓고 3년쯤 지났을 때 세계순회전을 돌던 구사마 야요이 전시가 대만에서 펑크가 났다. 작품이 붕 뜨게 됐다는데, 겁도 없이 그 전시를 내가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전시한 작품 중 ‘노란 호박’과 ‘거울의 방’을 소장하게 됐고, 그걸 보러 비행기 타고 오는 분들이 많다. ‘거울의 방’ 바닥이 물이라 가끔 빠지는 분도 있다(웃음).”

-구사마 야요이는 괴짜라던데.

“안도처럼 주체할 수 없는 열정과 에너지로 똘똘 뭉친 여자다.”

-백남준, 로버트 인디애나 등 현대 걸작도 많지만 꼭두와 상여가 전시된 공간이 압도적이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이 와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들에겐 없고 우리에게만 있는 거니까. 불교미술관까지 다섯 개 테마의 전시관을 제대로 둘러 보려면 며칠이 걸릴 것이다.”

-경대, 사방탁자부터 주칠함, 반짇고리까지 조선시대 생활 유품을 모아 놓은 1전시관을 가장 자랑스러워한다고 들었다.

 

“BTS의 RM이 인증샷 찍고 갔다는 ‘소반 타워’가 관람객에겐 제일 인기라는데, 내겐 물건 하나하나가 다 사연이 있고 소중하다. 중년 여성들은 ‘나 시집올 때 우리 집에 있던 것’이라며 반가워하고, 층층이 쌓아올린 목베개가 그 자체로 현대미술이라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단체 관람 온 10대 아이들이 가장 대견해서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하나씩 꼭 쥐여서 돌려보낸다(웃음).”

본태박물관에 전시된 구사마 야요이의 '거울의 방'. 바닥이 물로 채워져 있다. /본태박물관 제공
 

◇ 현대家 며느리들의 ‘군기반장’

-정주영 회장, 변중석 여사 모시고 15년을 살았다고 들었다.

“시부모님이 아픈 아들과 손주 셋을 가까이에 두고 싶어 하셨다. 아버님이 새벽 4시면 일어나 식사를 하셨기 때문에 그 생활이 지금도 몸에 배어 꼭두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웃음).”

-서산에 간척지 개척할 때 부부가 내려가 농사도 지었다던데.

“몸뻬에 머리 질끈 묶고 산 시절이다(웃음). 아버님은 자손들을 강하게 키우려고 하셨다. 나약한 꼴을 못 보셨다. 손자들에게도 가난한 애들과 친구 하라 하셨고, 자동차로 학교에 데려다줬다가는 불벼락이 떨어졌다.”

-변중석 여사를 도와 현대가 제사를 진두지휘했다더라.

“며느리 중 내가 나이가 많고 직설적이라 일종의 ‘군기 반장’ 노릇을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문 앞에 딱 앉아서 양손으로 전을 부치고 있으면 늦게 온 며느리들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들어왔다(웃음).”

-시집살이는 안 하셨나?

“어머님은 아버님을 평생 ‘회장님’이라 부르며 순종하셨다. 자식과 며느리에게도 싫은 소리 한번 안 하셨다. 집안 행사 때 종로에서 한복 한벌 해 입는 게 유일한 사치였는데, 나는 아버님이 어머님의 그 인품과 덕성으로 성공하신 거라 생각한다. 시집살이? 워낙 제사가 많다 보니 두세 번 치러보면 누가 잔소리 안 해도 저절로 터득하는 게 현대가 살림살이다(웃음).”

-변 여사가 넷째 며느리를 엄청 의지하셨다던데.

“모든 며느리를 다 예뻐하셨다. 나는 한집에 살면서 아버님께도 할 말 다 하는 며느리라 이래저래 말동무 삼으셨던 거고(웃음). 어쩌다 외출하면 내가 들어올 때까지 한길가에 앉아 기다리시던 어머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일선 에미야’ 부르시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세 아들에겐 호랑이 엄마였다고.

“아들 셋이면 전쟁터. 할머니는 한없이 착하시지, 할아버지는 밤에나 들어오시지, 공부를 안 해도 ‘이쁘다 이쁘다’ 하시니 내가 몽둥이를 들 수밖에 없었다. 교문 앞에 내가 뜨면 아들 친구들까지 다 숨었다, 하하!”

이행자 고문이 본태박물관 야외에 세워진 안도 다다오의 ‘푸른 사과’를 만져보고 있다. '영원한 청춘'이라고 쓴 안도의 글씨가 보인다. /신현종 기자
 

◇ 무르익지 않은 ‘푸른 사과’처럼

-사회 생활을 50대에 시작했더라.

“남편 떠난 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버님께 ‘저도 일 좀 하게 해주세요’ 했더니 리바트 가구를 권하시더라. 고가구 수집해본 경험이 도움이 됐다. 일을 한다는 것 자체로 행복했다.”

-고려디자인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리바트에 다니면서 ‘불탑’이라는 독일 주방 가구를 수입해 판매해본 게 그 시작이다. 울산에 가구 공장을 지어 납품도 하면서 사업을 확장해갔다. 큰 회사는 아니다.”

-아나운서 노현정씨 시어머니로도 알려져 있다.

“억센 엄마가 혼자 키운 아들들과 결혼해준 것만으로 세 며느리에게 고마워한다. 나는 맛있는 게 있어도 며느리들 먹어라 하지, 아들들 먹어라 하지 않는다.”

-김장김치도 직접 담근다고.

“시어머님 살아 계실 때부터 한 해도 안 빠지고 담갔다. 아들네는 물론 직원들도 먹여야 하니 100포기 이상 담근다. 나이 들어 그런가 올해는 몸살을 크게 앓았다.”

-숙명여대 퀸카였다는 얘기가 있다.

“헛소문이다(웃음). 대학별 대항전으로 미스코리아 뽑던 시절이 있었는데 거기서 준우승한 적은 있다.”

-돌아가신 정몽우 회장과는 연애결혼이라던데.

“학교 앞에서 기다리던 여러 남학생 중 한 명이었다(웃음). 착한 남자였다. 인생을 맘껏 누리지 못하고 너무 빨리 떠나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둘 다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구사마 야요이 전시관에 ‘나는 이 세상의 또 다른 점일 뿐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더라. 인생은 뭘까?

“남들처럼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말할 자신이 나는 없다. 인생에서 억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더라. 딱 될 만큼만 된다(웃음).”

-저 거대한 사과 조형물은 뭔가?

“투병 중인 안도 다다오가 만든 ‘푸른 사과’. 전 세계에 다섯 개 있는 작품인데 그중 한 개가 작년 여름 이곳에 왔다. 무르익지 않은 푸른 사과처럼 ‘영원히 젊게 살라’는 뜻이란다. 저 사과를 만지면 왠지 젊어질 것 같아 남들 안 볼 때 슬쩍 만지고 지나간다(웃음).”

 

☞이행자

1945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의 4남 정몽우 전 현대알루미늄공업 회장과 결혼했으나 1990년 사별했다. 2012년 제주 서귀포시에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본태박물관을 설립했다. 고려산업개발·현대알루미늄공업·현대리바트 고문을 지낸 뒤, 고려디자인을 창업했다. 지난해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