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안선재 수사의 '번역 수도생활'

해암도 2024. 9. 4. 16:17

 

 
2024년 8월 12일 강원도 인제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 제28회 만해대상 시상식에서 안선재 수사가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안 수사는 "나는 영어를 조금(?)해서 번역했을 뿐"이라며 "원작가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오늘은 지난 8월 12일 만해문예대상을 수상한 안선재 수사 이야기를 조금 더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기사로도 소개됐지만 안 수사는 영국 출신의 테제공동체 소속 수도사입니다. 본명은 앤서니 그레이엄 티그(Anthony Graham Teague)입니다.

 

저는 안 수사를 인터뷰하면서 기억에 남는 대목이 “여러 직함이 있지만 브라더(Brother)가 가장 좋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도자기를 굽는 것도, 번역을 하는 것도 모두 수도(修道) 생활”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수도생활이라면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침묵 속에 기도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요. 그런데 안 수사에게는 일상이 수도생활이고, 수도생활이 일상이었던 셈입니다.

 

안 수사는 원래 고전문학도였습니다. “내 고향은 한국으로 치면 호남”이라고 하시더군요. 무슨 뜻이냐고 여쭸더니 “고향이 영국의 서남부 지방”이라고 했습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외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집에 돈은 없었는데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대 60학번으로 입학했다”고 했습니다. 생활비까지 받는 장학생이었답니다. 그렇게 9년을 공부해 고전문학 박사학위까지 받았지요. 그런데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의 선택은 ‘수도사’였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테제공동체였지요. 테제공동체는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까지 모든 그리스도교인이 교파를 초월해 독신으로 수도생활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안 수사는 어려서는 성공회 교회, 청소년 시절엔 감리교 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공동체에 입회한다는 것은 과거의 경력과는 이별하는 것입니다. 안 수사도 공동체에 입회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연구한 고전문학은 내려놓았답니다. 대신 도자기 굽기와 농사일을 했다지요. 대부분 수도회의 공통점은 순명(順命)입니다. 공동체가 정하면 개인은 따르는 것이지요. 1969년부터 프랑스 테제공동체에서 일하던 안 수사는 1977년 필리핀으로 옮기게 됩니다. 필리핀 빈민가에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살게 됐지요. 한국과의 인연은 김수환 추기경이 이어줬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73년 테제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 인연으로 1979년 홍콩에서 중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던 테제공동체의 로제 수사를 만나서는 “한국으로 오라”고 권했답니다. 김 추기경도 대단하지요. 가톨릭 수도회도 많은데, 초교파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테제공동체의 영성이 한국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해 한국 진출을 권했으니까요. 실제로 김 추기경은 현재 서울 화곡동에 테제공동체 숙소도 마련해주면서 1979년에 테제공동체가 한국에 진출하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안 수사는 1980년에 한국에 왔고요. 김 추기경은 1994년 안 수사가 한국 국적을 얻는 과정에서도 추천과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2024만해문예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안선재 (Brother Anthony) 서강대 명예교수가 서울 마포구 자신의 작업실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 안선재 수사는 한국의 시와 소설을 영문으로 번역해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 받아 수상하게 됐다. /전기병 기자
 

그런데 안 수사 입장에서는 한국으로 온 것이 옥스퍼드 박사 취득 이후 손에서 놓았던 고전 문학을 다시 만나게 된 계기가 됐답니다. 서강대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게 됐거든요. 책을 내려놓고 농기구나 도자기 흙을 만지며 살려고 마음 먹었는데 다시 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지요. 이런 게 하느님의 섭리라고 할까요. 그래서 안 수사는 도자기 굽는 것이나, 농사 짓는 것이나, 학생 가르치는 것이나, 번역하는 것 모두가 수도 생활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번역을 시작한 것은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 덕분입니다. 서강대 인근 안 수사의 오피스텔 작업실 풍경을 보면 그의 한국 문화 사랑을 저절로 느낄 수 있습니다. 벽에는 스님들의 글씨와 그림을 비롯해 김지하 시인의 난초 그림, 유안진 등 문인들의 필묵이 즐비합니다. 한쪽 서가에는 남도 지방의 곳곳에서 올라온 차(茶)가 종류별로 놓여 있고요. 그가 단순히 한글을 영어로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한국 문화에 푹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보물’은 그의 컴퓨터 안에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영어로 번역해 출간한 책의 목록과 이미 번역을 마치고 출간을 기다리는 원고, 그리고 지금 번역하고 있는 작품들이 컴퓨터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었습니다.

 

 

안 수사는 이미 80대에 접어든 연세이지만 작업 속도가 무척 빨랐습니다. 저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책자에 수록할 만해대상 수상소감을 부탁드렸는데, 그 다음날 새벽에 이메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것도 형식적인 소감이 아니라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삶과 ‘님의 침묵’을 비롯한 작품에 대해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을 감동적으로 풀어서 적어주셨습니다. 안 수사는 “나는 ‘역사가 있는 작가’를 좋아한다. 그래서 직접 만나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생존 작가의 작품을 주로 번역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해 한용운에 대한 글을 읽으니 안 수사는 작가가 가진 ‘스토리’ 혹은 ‘히스토리’를 좋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 관심과 번역의 속도(성실성) 덕분이겠지요.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 번역을 시작으로 박 시인에 관심을 갖게 된 안 수사는 올해초에 나온 박 시인의 에세이 ‘눈물꽃 소년’까지 전작품에 대한 번역을 마치셨더군요.

 

그렇게 그는 도자기를 굽듯이, 농작물을 가꾸듯이 쉬지 않고 번역이라는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집과 소설 등 70여권의 한국 문학을 번역한 그에게 ‘어떤 작품을 좋아하느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는 “천상병 시인의 시집 ‘귀천’이 가장 많이 팔렸다”며 한 권 주시더군요. 1996년 ‘도서출판 답게’에서 출간된 영한 대역본이었습니다. 저에게 주신 책은 ‘2021년 3월 15일. 재판 25쇄’라 찍혀 있더군요. 그는 만해대상 수상소감 마지막 문장을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인용해 써주었습니다. 애송시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책을 건네며 “영어로 번역해 미국과 영국에서 많이 출판했는데, 가장 많이 팔린 이 책은 한국에서 팔렸다”며 “부모들이 자녀 영어 교육용으로 사준 것 같다”며 웃었습니다.

안선재 수사가 번역한 천상병 시집 '귀천'의 표지.
 

독자 여러분도 안 수사님의 번역으로 한 번 같이 감상해보시지요.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I’ll go back to heaven again.

Hand in hand with the dew

That melts at a touch of the dawning day,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I’ll go back to heaven again.

With the dusk, together, just we two,

at a sign from a cloud after playing on the slopes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I’ll go back to heaven again.

At the end of my outing to this beautiful world

I’ll go back and say: It was beautif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