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장사익 "늦게 핀 꽃이 오래가요… 3년만 최선을 다하면 못할게 없어요"

해암도 2024. 8. 17. 08:51

방황하다 마흔다섯 살에 데뷔
'노래 인생 30년' 가수 장사익

 
 
장사익은 주름살을 ‘인생의 계급장’이라 부른다. “제가 이렇게 웃기 시작한 것은 노래를 부르게 된 뒤부터예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웃기 시작하니 점점 웃을 일이 더 많이 생겨요. 웃음이 웃음을 부르는 거예요. 이젠 웃지 않은 내 얼굴은 내가 봐도 낯설어요.”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얼굴에 우리나라 산천처럼 굴곡이 있다. 지나온 삶을 이력서로 쓸 때 열댓 가지 직업을 나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보험 외판원, 인쇄소, 가구점 총무, 전자회사 종업원, 독서실 매니저, 과일 노점상, 카센터 직원. ‘찔레꽃’ ‘꽃구경’으로 유명한 가수 장사익은 이미자와 콘서트를 하고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애국가를 부를 정도로 한국을 대표한다.

 

194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 남자는 ‘7학년 5반’, 일흔다섯 살이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나서 가수가 되기 전에 숱한 직업을 전전했다. 1년도 못 채우고 잘리거나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마흔다섯 살, 귀신이 와 서는 것이 보인다는 나이에 그는 가수로 데뷔했다. 올해로 노래 인생 30년. 인생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 천직을 찾은 셈이다. 감회를 묻자 “데뷔 10주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10년이 하루’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했는데 지난 30년이 꼭 사흘 같다”며 천진하게 웃었다. 나이테 같은 무늬가 얼굴에 일렁였다.

 

그 주름살은 장사익 말마따나 ‘인생의 계급장’이다. 주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웃는다. 인생을 사계절에 빗대면 이 가객(歌客)은 봄여름 다 보내면서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 반환점을 돌아 노래를 하기 전까지는. “힘들고 넘어지고 깨지기도 했지만 그 좌절과 방황의 시간이 쌓여 저를 일으켜준 것 같아요. 제가 부르는 노래는 뜨거운 세월 다 보내고 들판에 핀 가을꽃입니다. 지나온 인생의 굽이굽이가 다 감사해요.”

2018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장사익. "키를 높여 우렁차게 불렀습니다. 외국인들도 들을 텐데 ‘이 나라 사람들 에너지가 이렇게 크구나,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다’ 싶게요." /SBS
 

◇봄여름 다 보내고 핀 가을꽃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었다. 홍은동 그의 자택 앞 계곡물이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주앉은 장사익은 직접 찻물을 끓이며 보이차를 권했다. “이거 댓 잔은 마셔야 재미난 이야기가 나와요.”

 

-어떤 계절을 좋아하시나요.

“이 통창 밖 산비탈을 보세요. 봄에는 개나리·진달래가 성곽을 타고 넘는 게 보여요. 여름에는 초목이 무성해지고 가을엔 울긋불긋 단풍이 들고 겨울에는 눈으로 하얗고. 저는 시골에서도 산등성이에 살았어요.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체감할 수 있으니 사시사철 다 좋아요.”

-시(詩)를 노래로 옮기는 가객인 줄로만 알았는데, 올 초에 쓴 희망편지를 보니 글도 좋더군요.

“저는 가는 곳마다 은인이 생깁니다. 개중에 사기꾼도 있지만 돌아서면 결국 도움이 돼요.”

-사기꾼도 도움이 됩니까.

“넘어지면 무릎에 딱지가 생기잖아요. 그런데 넘어뜨린 그 사람 때문에 제가 툭 털고 일어나 걸을 수 있어요. 희망편지가 실리고 연락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노래가 99%인 사람이에요. 글을 쓸 일은 별로 없는데 이렇게 또 저를 살려주시는구나, 생각했지요. 오늘 오전에는 김민기씨 장례식장에 다녀왔어요.”

고교 졸업 후 15가지 직업을 전전했던 그는 1992년 카센터에서 퇴직한 뒤에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다. 바로 태평소 연주였다. 이 태평소가 그를 가수의 길로 이끈 악기였다. /장사익 제공
 

-생전에 인연이 있었나요.

“한 번도 안 만났으나 음악적 교류가 있었어요. 나보다 나이는 밑이지만 그분의 음악과 삶을 존경해요. 꽃으로 말하자면 안개꽃 같은 사람.”

-왜 안개꽃인가요.

“나서질 않았잖아요. 다른 꽃들을 위해 배경이 돼 주고 받쳐주고. 자신이 폼을 잡거나 돋보이려 하지 않은 뒷것, 뒷광대였지요. 제가 베토벤을 좋아하지만 그와 악수 한 번 해본 적 없듯이, 김민기씨와도 음악으로는 늘 소통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빗줄기가 가늘어질 때마다 매미 울음 소리가 들리네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더 필사적으로 울겠지요. 자연에는 순서가 있어요. 5월에 보리가 익을 때쯤이면 산에서 뻐꾸기가 웁니다. 한여름에 매미가 울고 나면 풀벌레 소리가 들려올 거예요.”

-몇 년 사이에 얼굴 주름이 더 늘었습니다. 다른 가수들은 보톡스로 다림질을 하는데.

“그거 해봐야 며칠이나 가겠어요. 주름살은 추한 게 아니에요. 아름답게 보일 땐 정말 멋있어요. 저는 꾸미지 않고 나이 먹은 티가 나는 노래를 합니다. 좀 어둡고 슬프지만 인생을 돌아보고 관조하는 노래. 꼬부랑 할아버지가 될지언정 분장도 염색도 안 해요.”

-어느덧 데뷔 30년입니다.

“30년이 꼭 사흘 같아요(웃음). 저도 모르게 이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검은 머리도 파뿌리같이 하얗게 변하고. 제가 노래하면서 행복하게 보낸 이 30년, 정말 꿈만 같습니다. 다 들어주신 여러분 덕분이지요.”

시를 노래하는 가수 장사익은 “가슴 절절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관조하는 시를 가려낸다”고 했다. “가락을 붙이는 건 일사천리고요. 그렇게 태어난 노래가 살아가는 데 지팡이처럼 힘이 돼주길 바랍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꽃을 준다, 나에게

오는 10월 2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장사익 30주년 소리판이 펼쳐진다. 공연 제목은 ‘꽃을 준다 나에게’. 팸플릿에 “사랑한다, 축하한다. 남들에겐 스스럼없이 건넨 꽃, 돌아보니 나에겐 꽃 준 적 없네. 노래 인생 30년을 다독이며 꽃을 준다, 나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꽃도 셀프? 제목을 좀 설명해주신다면.

“사실 주제를 정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작년 가을에 누가 보내준 시 3편 중에 ‘꽃을 준다 나에게’가 마음에 닿았습니다. 딱 내 얘기 같았어요. 그동안 남들한테만 꽃을 줬지 정작 나한테 준 적은 없으니까요. 마흔다섯에 뒤늦게 찾은 이 직업으로 30년을 살았으니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 내가 나한테 훈장을 주자!”

-격려받고 싶을 때가 더러 있지요.

“맞아요. 사실은 당신들 얘깁니다. 있으나 없으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힘들고 아프지만 견디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대단해요. 우리는 저마다 인생의 승리자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외모는 데뷔 50~60년쯤 된 원로 가수 같은데 실제론 30년밖에 안 된 거 아닙니까.

“아직 팔팔한 축이죠(웃음). 그래도 늦게 출발해서 쉬지 않고 이만큼 달려왔다는 게 스스로 대견해요.”

장사익은 1992년 ‘내가 이거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닐 텐데‘라는 생각으로 카센터에서 퇴직한 다음에야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다. 일명 날라리라 불리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태평소. 그는 ‘있으나 마나 한’ 이 국악 관악기를 붙잡고 3년을 매진해 프로가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서 태평소를 분 남자가 바로 장사익이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채 태평소를 불던 그 아저씨가 전율의 소리꾼이 될 줄이야.

30주년 기념으로 10월 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꽃을 준다 나에게'
 

-막연하지만 막을 수 없는 꿈을 꿨군요.

“젊을 땐 객기가 있었어요. 상고 졸업하고 보험사 외판원을 하며 3년간 서울 낙원상가 근처에 있는 가수학원에 다녔습니다. 현실에 치여 직업을 옮겨다녔지만 언젠가 노래를 하고 싶다는 그 씨앗 하나는 버리지 않았어요. 꿈이 있었기에 시간을 쪼개 악기를 배웠고요.”

-데뷔하던 날 기억하시나요.

“1994년 11월 홍대 앞 100석짜리 소극장이 생생해요. 400명씩 들어와 미어터졌지요. 평생 처음으로 목돈을 만졌어요. 말도 안 되는 촌놈이 국악도 가요도 재즈도 아닌 노래를 하는데 신기하고 재밌단 말이에요. 출시되자마자 히트한 상품처럼 제가 막 불려다녔어요. 한 달 만에 누가 ‘공짜로 음반 내주겠다’고 해서 1집이 나왔는데 사기도 당하고. 하하.”

-가수로 30년 살아 보니 어떤가요.

“행복하죠. 이렇게 웃는 게 그 증거예요.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던 시절의 제 사진을 보면 얼굴이 죽상이거나 굳어 있어요.”

-돌아보면 언제 가장 죽을힘을 다해 살았나요.

“태평소를 연습하던 3년이죠. 밤 12시에 잠실 한강변에서도 불고 이불 속에서도 불며 독학했어요. 정말 무섭게, 죽을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성장했어요. 하찮은 것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뒤에 숨어 있던 노래의 길이 마침내 열린 거예요.”

-마흔다섯까지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뎠습니까.

“궁시렁궁시렁, 땅속에서 우물거리고 있었죠. 매미처럼 국화처럼. 사실 여름이 제일 힘들어요. 국화는 가을에 찬 서리가 내리면 그제야 나오잖아요. 봄꽃은 금방 시들죠. 꽃자리에 생긴 열매가 지루한 장마와 폭염을 견디며 성장합니다.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고 가을에 더 탐스럽게.”

 

-열댓 가지 직업들이 알게 모르게 인생 밑천이 되었겠습니다.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요즘 가수들은 10대에 연습생을 시작해 30대가 되면 은퇴하잖아요. 그들이 데뷔한 다음에 인생을 배운다면 저는 거꾸로예요. 인생을 배우고 나서, 쓰러져도 일어설 힘을 비축하고 나서 가수가 된 겁니다. 노래도 일종의 이야기잖아요. 저는 몸으로 겪은 희로애락에 대해 젊은 가수들보다 더 많은 이야기,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요새는 눈만 뜨면 누구는 아프고 누구는 사고 나고 누구는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요. 제 인생을 90까지라고 보면 저는 7학년 5반이니 죽음에 초연해야져야 할 나이지요. 이어령 선생이 '영웅도 2~3년이면 잊어버린다'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 오늘 하루를 재밌게 살아야죠."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나는 같이 울어주는 사람”

장사익은 독창적 창법과 토착의 서정을 가지고 있다. 정해진 박자도 없이 흥얼거린다. 신세 한탄처럼 들리기도 하고 인생을 달관한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읊조리듯이 낭송하는 노래”라며 “무박(無拍)도 박자”라고 말했다.

-아이고, 반주하는 분들이 힘들 텐데요.

“가수한테 맞춰야지, 하하. 이번에 나온 10집에 마종기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우화의 강’이 있는데 재밌어요. 이런 강 하나 가슴에 품고 살고 싶었죠.”(그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로 흘러가는 이 노래를 즉석에 불렀다.)

-그렇게 시를 노래로 옮길 땐 일일이 허락을 받나요.

“그럼요. 한 20년 전에는 시인이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가수라고 무시한 거죠. 무임승차한다 생각하고. 그런데 시가 원래 노래잖아요. 너도나도 자꾸 노래로 불러줘야 시에 생명력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15년 전쯤부터는 시인들이 거꾸로 저한테 시집을, 시를 보내옵니다.”

-가수 유전자를 물려받았나요.

“아버지가 신명이 있었어요. 동네 농악대에서 아버지가 노동요처럼 풍악을 울렸는데 장구를 잘 치셨고 흥이 좋았지요. 그 끼를 받아 제 몸에 우리 가락이 붙은 것 같아요.”

-직업이 돼지장수였다고 들었습니다.

“충청도에선 ‘돼지장사’라고 했어요. 목돈 만질 일은 곗돈과 돼지밖에 없던 시절이에요. 농사는 오래 걸리고 망하기도 하니까. 돼지는 1년에 두세 번 새끼를 10마리씩 낳아요. 아버지는 자전거 타고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녔어요. 어느 집에서 새끼를 낳는지 본 겁니다. 장이 설 때 리어카로 내다 팔아주면서 수수료를 받으셨고요.”

-아버지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돼지냄새. 아버지한테서 항상 돼지냄새가 났어요. 난 그게 너무 좋았어요, 하하. 우리 집 돼지들도 구정물 받아다 키우면서 친구처럼 지냈죠. 어머니도 무학(無學)인데, 아들이 성공하는 모습은 보고 가셨어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오늘내일 하시면서도 ‘내 아들이 노래하는 장사익이야’ 자랑을 하셨지요(웃음).”

최근에 나온 장사익 10집 '사람이 사람을 만나'. '뒷짐' '사람이 사람을 만나' '나는 가야지' '황성옛터' 등 8곡이 담겨 있다.
 

-이번 공연도 1부는 슬프고 2부는 나이트클럽인가요.

“그렇죠. 관객을 울렸다가 웃깁니다. 일종의 ‘마음 샤워’예요. 세상 사람 열에 아홉은 힘든 하루를 보내잖아요. 진정한 위로는 같이 울어주는 거예요.”

-‘꽃구경’은 1부에 들어 있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이 든 부모를 요양병원으로 보내는 현대판 고려장을 그린 노래지요. 솔직히 요즘은 부모가 돌아가셔도 자식들이 울지 않습니다. 눈물이 메말랐어요.”

-왜 그럴까요.

“돈으로 요양병원 같은 시설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슬픔의 외주화라고 할까요. 내 일상으로 건너오지 않도록, 내가 감당하지 않아도 되도록, 안 보이는 곳에서 제3자가 그 일을 처리합니다. 저는 하찮은 유행가를 부르는데 다들 눈물을 펑펑 터뜨립니다. 그때는 진심인 것 같아요.”

-장례식에서 조가(弔歌)도 많이 부르시더군요.

“그런 자리에서는 ‘연분홍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 유행가 ‘봄날은 간다’가 으뜸이에요. 서양에는 장엄한 레퀴엠이 있잖아요. 천상병의 ‘귀천‘도 불러주고 영정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게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슬픔을 쓸어내려면 슬픈 노래가 필요하고요.”

-곡비(哭婢), 대신 울어주는 사람처럼요?

“네. 울고 싶어 장사익 공연에 온다는 분도 많아요. 나 대신 슬퍼하는 가수가 그곳에 있으니 덩달아 우는 거예요. 비 온 뒤에 세상이 맑아지듯 나올 땐 개운해져요.”

장사익은 구수하면서도 찰진 목소리로 ‘봄날은 간다’ 등 삶의 애환을 토해내는 노래를 불렀다. /조선일보DB
 

◇3년만 죽을힘을 다해 보세요

장사익은 2016년에 성대 결절 수술을 받고 8개월 동안 발성 연습을 하며 노래로 가는 길을 되찾았다. 목소리가 맑아졌지만 전처럼 파워풀하지는 않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그가 애국가를 불렀다.

-요청을 받고 놀라셨겠어요.

“얼래, 이 쭈그렁뱅이한테 애국가를? 통상 성악을 하는 분들이 하거든요. 개막식에는 북한 김여정이 와서 애국가를 못 불렀어요. 저는 키를 높여 우렁차게 불렀습니다. 외국인들도 들을 텐데 ‘이 나라 사람들 에너지가 이렇게 크구나,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다’ 싶게요. 길이를 두 배로 늘여서 천천히, 우리나라 산천처럼 굴곡지게. 노래에도 뼈가 있어요.”

-무슨 뜻입니까.

“애국가나 유행가처럼 모두가 다 아는 노래는 자기만의 창법을 요구해요. 가수가 잡아내 표현하는 핵심이 바로 노래의 뼈예요.”

-노래할 때 보면 눈가가 촉촉합니다.

“방송국 카메라는 그걸 놓칠세라 얼굴을 클로즈업해요. 여느 가수와 달리 저한테 유난히 많아요. 슬픔을 극대화하는 거예요. 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기네 아버지 같은지 괜히 울고 싶어진대요, 하하. 좋은 의미로요. 그렇게 사람들을 위로해요.”

-가객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가슴 절절하고 아름답고 세상을 관조하는 시를 가려내야 해요. 그 과정이 오래 걸립니다. 가락을 붙이는 건 일사천리고요. 그렇게 태어난 한 곡 한 곡이 살아가는 데 지팡이처럼 힘이 돼 주길 바라죠.”

온갖 직업을 거치며 방황하던 장사익은 1990년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에 취직했다. 그는 “‘인마’라고 부르던 매제를 ‘사장님’이라고 깍듯이 불렀다”고 말다. 뒷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40대 초반의 장사익. /장사익 제공
 

-장사익에게 노래란 무엇입니까.

“부끄럽게도 저는 열댓 개 직업을 갈아타면서 살았지만 노래는 30년을 꾸준히, 쉬지 않고 해 왔습니다. 가수는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때 찾아온 직업입니다. 그래서 노래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요. 정성껏 불러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노래는 제 운명입니다.”

-마흔다섯 살에 천직을 찾은 분으로서,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청년이나 노인이나 세상살이는 쉽지 않아요.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사람한테는 하루하루가 기회이고 무대죠. 그런데 어떤 이들은 불만투성이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기회가 오질 않아요. 인생은 딱 한 번뿐입니다. 있는 자리에서 적어도 3년만 최선을 다하고 기회를 잡으세요. 소소한 것이라도 목숨을 걸면 일가를 이룹니다. 내 인생이 증명해요.”

-사람들 열에 아홉은 힘들다 하고 ‘이생망’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인생 조진 거 아닙니다. 고생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잘 사는 사람이에요, 하하.”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웃기 시작한 것은 노래를 부른 다음부터예요. 복이 와서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니 복이 와요. 웃는 게 앞이여. 진리여 진리. 웃지 않는 내 얼굴은 이제 낯설어요.”

보이차를 대여섯 잔 마셨다. 골곡진 삶의 이력을 하나하나 소중히 여기는 자의 청량한 달관을 만났다. 인생의 신산함도 알고 전화위복의 이치도 아는 듯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얼굴에 파도 치듯 또 한바탕 주름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