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여의도 정치에 질식... 재난 현장으로 사람 살리러 갑니다”

해암도 2024. 4. 6. 08:34

소방관 출신 국회의원 1호 오영환
불출마 후 민주당 떠난 이유

 
소방관 출신 국회의원 1호 오영환은 총선 1년 전인 작년 4월 불출마를 선언했다. 최근엔 민주당을 떠나 새로운미래로 당적을 옮겼다. 소방관으로 복귀하는 그는 “노력했지만 소방 동료들의 죽음을 막지 못해 죄책감을 느낀다”며 “국회의원 생활은 단맛은커녕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재선(再選)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그 길을 포기했다. 서른여섯 살 국회의원 오영환의 불출마는 뜻밖이었다. 지역구도 야당 텃밭인 경기 의정부갑인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여의도에선 별별 얘기가 나돌았다.

총선을 20여 일 앞두고 민주당을 떠나 새로운미래로 당을 옮길 때도 의아해하는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오영환은 진심이었다. 소방관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뭘까, 모든 게 그 생각 하나로 내린 결정이었다.

“저라고 재선을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렇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저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다음 날이 가장 두려웠어요.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어깨가 너무 무거웠거든요. 다시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일했어요. 4년간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한 적도 있지만, 여기에서 성과를 내기보다 위험한 현장에 있는 국민 곁으로, 동료 곁으로 달려가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영환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5호 영입 인사로 정계에 입문해 ‘최초의 소방관 출신 국회의원’ 타이틀을 달았다. 조만간 ‘최초의 국회의원 출신 소방관’으로 돌아가는 그를 여의도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민주당을 떠난 이유요? 지금의 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이 지켜온 가치가 다 무너졌어요. 민주주의부터 국민에 대한 예의까지. 그것에 대한 항의 표시죠. 어쩌면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지난해 4월에 일찌감치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오영환 의원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가족도 응원한 불출마

작년 4월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임기 동안 현장에서 사망한 소방관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으면서 “소방 동료 희생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며 “부족함을 인정하고 내려놓을 용기를 냈다. ‘비극을 줄이기 위해 정치에서 제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오만함도 함께”라고 했다. 그는 국회 내 공인 울보였다. 소방 동료들이 순직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국민 생명이 위협당하는 사건이 터졌을 때마다, 소방 관련 입법이 벽에 부딪히거나 통과됐을 때마다 울었다. “매일 울었던 것 같아요. 절실했거든요.”

 

-정치인들은 매번 ‘한 번 더 배지를 다는 것’이 목표인데.

“이 자리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혜택을 받은 것보다 책임감만 엄청나게 느낀 기억밖에 없어요. 소방관이 순직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낀 적이 훨씬 많지, 이 자리로 인해 권력을, 권한을 향유하거나 그 단맛을 느낀 적이 없어요.”

-그래도 이해가 안 가요.

“여기서 뭔가 더 높은 일, 더 중요한 일을 할 테니 당신들(소방관)은 계속 위험한 곳으로 가라, 이런 심정으로는 도저히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요?

“정치를 하는 데 있어 첫째 필요조건은 권력의지예요. 그 의지를 위해 소신과 양심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죠. 내 속마음은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말도 할 수 있어야 하고요. 그걸 잘하는 분들이 정치를 이어가는 것이고, 의지를 내려놓은 사람이 불출마를 하는 거고.”

-소방 쪽에선 비겁하다는 반응도 있었어요.

“‘이제 누가 우리를 대변해 주냐, 더 많은 역할을 해야지’ 하면서 원망하거나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요. 그보다 ‘환영한다, 빨리 오라’는 반응이 더 많았어요.”

-가족 반응은요?

“부모님은 정치하면서 아들이 고생하는 걸 안타까워했어요. 정쟁과 비난에 노출되면서 그걸 감당하는 것에 가슴 아파했죠. 아주 평범한 부모님이거든요. 또 제가 소방관일 때는 뉴스 보기 겁난다고 하긴 했죠.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또 당당해했는지 알기 때문에, ‘너의 선택을 존중하고 더 응원한다’고 하더라고요.”

-국회의원 아들이 더 좋다고 하지 않나요?

“그런 자부심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요(웃음).”

-정치를 한 것을 후회하나요?

“4년 사이에 20년 늙은 거 같아요. 힘들고 괴로웠어요. 하지만 절대 후회할 수 없는 게, 일할 기회를 얻어 성과를 냈어요. 안전한 사회로 가는 통로가 됐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죠. 후회한다고 하기에는 막중한 일이었어요.”

오영환은 국회 내 공인 울보였다. 대형 사고가 나도 울고, 동료 소방관들의 순직에도 울고, 소방 관련 법안이 통과될 때도 울었다. “절실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소방관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재명 독주, 버틸 힘이 없더라

그는 작년 불출마를 결정하고 1년 후 민주당을 탈당해 새로운미래에 합류했다. “민주당의 민주주의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영환은 조국을 비판해 ‘초선 5적’으로 친문에 낙인찍혔고, 지난 대선 땐 이낙연을 도와 친명에 욕을 먹었다. “그래도 잘 버텼는데 이번 독선적 공천 과정에서 버티지 못한 거죠. 이재명 지도부가 설마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공천 시스템에 대한 불신까지 심어 놨잖아요.” 정당 중 유일하게 소방관 출신을 영입해 비례대표 2번을 준 게 새로운미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는 정치를 떠나지만 국회에 소방관 출신이 있는 것과 없는 건 큰 차이거든요.” 그는 지금 총괄상임선대위원장으로 선거를 이끌고 있다.

-민주당을 탈당한 이유라면.

“지금의 민주당은 제가 선택하고 지지하고 몸담았던 곳이 아니에요. 단순히 주류 교체(친문에서 친명으로)의 시간처럼 말하고, 당내 세력 다툼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안 봐요. 이미 장악당했죠.”

-비명횡사 공천 얘기군요.

“그 대상이 본인과 다른 목소리를 낸 세력에 집중됐잖아요. 어떤 국민이 아무 문제 없는 공천이라 생각하겠어요. 비판을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거라고 확신하는 모습까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죠. 모든 걸 정략적, 유불리 계산으로 해요. 먼저 사과하면 지고 들어간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 잘못해도 금방 잊힐 거다란 모습. 그건 국민을 무시하는 태도죠. 이게 지금 민주당에 만연해 있어요.”

-당에 남아 목소리를 낼 수도 있잖아요.

“끝내 바뀌지 않는 모습에 실망했어요. 현 지도부는 모든 것이 일방적이었지요. 독주하고 있어요. 저 또한 상식적인 목소리를 내다 당을 떠난 동료들처럼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나온 거죠.”

-당에 있을 때 더 세게 비판을 하지 그랬어요. 젊잖아요.

“저로서도 반성하는 지점이에요. 그러나 그랬어도 실질적으로 바꾸진 못했을 겁니다.”

-이재명 대표는 불출마, 탈당 때 연락해 왔나요?

“아니요, 전혀요. 만약 그럴 분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이 오지도 않았겠죠.”

-다른 동료들은요?

“실망하고 절연한 분도 있고요. 이제 더 말릴 힘도, 명분도 없다며 망연자실한 분도 있고요. ‘너로선 그럴 수밖에 없다’며 격려한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새로운미래인가요?

“제가 정치를 시작한 이유는 사람 덜 죽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 거예요. 안전한 대한민국이란 가치 아래 민주당 재건을 외치는 게 새로운미래예요. 비례대표 2번도 문재인 정부 소방청장 출신을 세웠고요. 가치 중심으로 움직인 겁니다.”

-일각에서 민주당의 총선 승리를 예측하는데.

“제가 민주당이 망해라, 졌으면 좋겠다고 할 수는 없죠. 다만 어느 쪽이 승리하더라도 똑같은 지옥도가 펼쳐질 거예요. 완충할 제3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새로운미래에 입당한 거고요. 제일 힘없는 외침일지 몰라도, 주목받지 못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것일지 몰라도요. 언제까지 정치를 심판, 증오, 갈등으로 채워야 할까요?”

-문재인 정부 땐 ‘초선 5적’이었잖아요.

“조국 사태는 국민의 눈높이에서 바라봤을 때 평가한 거예요. 후회 없어요.”

-조국당의 국회 입성이 확실시되고 있어요.

“지금 정부에 대한 분노, 정권 심판에 공감하는 국민의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보복의 정치는 바람직하지 않죠.”

소방관으로 돌아가는 오영환 의원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사람 구하려고 태어나

소방관이 되고자 마음먹은 건 고등학생 때다. TV 뉴스에 나오는 화재 현장을 보다 결심했다. “울고 있는 상인들 속에서 불 속으로 들어가는 소방관의 모습에서 우리 부모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절망할 때, 삶이 흔들릴 때, 무너져 내릴 때 지켜주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은 왜 중퇴했나요?

“스물한 살 때였을 거예요. 대학 안 나와도 소방관을 할 수 있다는 얘길 듣고 바로 교수한테 자퇴하겠다고 했죠. 교수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그런 이유는 처음 듣는다면서 안 된다고 했죠. 제가 계속 우기니까 한참 있다가 받아줬어요. 소방관 되려면 그때만 해도 군필자였어야 해서 바로 의무소방을 지원했죠.”

-그때 처음으로 사람을 구했다고요.

“부산 해운대 소방서 수상구조대에서요. 성수기인 8월 초였어요. 제트스키가 뒤집힐 정도로 풍랑이 심했는데 파도에 떠내려가는 열 살 아이를 구했어요. 살려는 아이의 손이 절 잡더군요.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어요. 아저씨만 믿으라는 마음이었어요.”

-꿈의 현장에 간 뒤에 실망한 사람도 많은데요.

“저는 온전한 소방의 추종자예요. 소방밖에 모르는 바보. 하하. 국민 생명을 구하는 숭고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변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게 제가 하고 싶고 가장 잘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그때부터 있었고요.”

-소방관 시절 뜻깊었던 순간은요?

“너무 많죠. 제 손끝에서 한 노인의 심장이 다시 뛰던 순간부터. 하지만 응급 상황에선 살린 적도 많지만 못 살린 적이 10배는 더 많아요. 그래서 아픔이 먼저 떠올라요.”

-그 상처는 어떻게 극복하나요?

“다음번 출동 벨소리가 울릴 때는 꼭 살리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죠. 어디선가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고, 거기에 달려갈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다는 사명감을 갖고요. 그게 끊임없는 죽음을 보고 동료를 잃고서도 그 자리에서 감당하게 하는 동력이에요.”

-의사도 사람 구하는 일이잖아요. 의사 집단행동을 어떻게 보나요?

“최고의 피해자는 국민이잖아요. 의사를 악마화한 정부 태도도 문제지만 현장을, 환자 곁을 떠나겠다는 의사 결정도 잘했다고 할 수 없죠. 정부와 의사 간 토론을 간절히 요청드리면서 부디, 우선, 일단 현장으로 돌아와 달라 호소하고 싶어요.”

-정치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박근혜 정부에서 소방방재청 해체 등을 추진할 때 1인 시위도 하고, 화재 현장에서 느낀 점을 인터넷에 글로 쓴 걸 엮어 책도 냈는데요. 그거 때문인 것 같아요.”

-영입 제안을 바로 수락했나요?

“그럴 리가요. 저보다 경험이 많은 베테랑 소방 지휘관이 많다고 했죠. 저는 아니라고요.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당신에게 처음 제안하는 게 아니라 소방관 중엔 마지막 제안이다, 거절하면 이번에도 소방엔 기회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거부할 수 없었죠.”

-소방관으로 자부심이 강했는데 사표 냈을 때 반응은요?

“다들 의아해했죠. 그런데 민주당에서 비밀 유지를 요구했기 때문에 말없이 사표에 ‘이직’이라고 썼어요. 뒤에선 2019년 독도 헬기 추락 사고로 같이 근무하던 소방관이 사망한 충격 때문이라는 말도 돌았어요.”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죠. 아내 김자인 선수는 올해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마지막 도전을 위해 훈련하고 있어요. 소방관으로 복귀하면 더 좋은 아빠, 더 좋은 남편이 되려고요"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의정부는 안 떠날

오영환의 부캐는 김자인의 남편이다. 암벽 등반 선수 김자인은 금메달만 31개를 따낸, 두말할 것 없는 여성 클라이밍계의 레전드다. 2015년 오영환이 산악구조대에 있을 때 강사의 소개로 만나 결혼했다. “국회의원 그만두고 당장 소방관 시험을 보겠다고 했을 때 김 선수가 ‘그럼, 우리 아파트 대출은 어떻게 해?’ 하더군요. 웃자고 한 말이었죠. 항상 제 선택을 존중해 주는 사람이에요.”

-김자인의 남편으로 불렸는데, 이제는 김자인이 오영환의 아내가 됐나요?

“무슨요. 저는 한 나라의 국회의원을 한 거지만 거기는 월드클래스잖아요. 존재감은 아내가 훨씬 크죠.”

-국회의원 하면서 좋은 남편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죠. 김 선수는 훈련할 때 빼고는 올해 세 살 된 아이 육아한다고 희생을 많이 했죠. 올해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마지막 도전을 위해 훈련하고 있어요. 제가 돈 못 버는 수험생이 된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소방관으로 복귀하면 더 좋은 아빠, 더 좋은 남편이 되려고요.”

-내년 4월 소방관 시험은 한 번에 붙을 자신 있나요?

“그래야 하는데 망가진 심신 탓에.... 최선을 다해봐야죠.”

-월급이 많이 줄 텐데 괜찮겠어요?

“국회의원은 쓰는 게 더 많던데요? 그래서 별로 걱정이 없어요.”

-어느 지역 소방관으로 갈 생각인가요?

“7년을 근무했던 서울로요. 의정부나 경기도는 다 저를 국회의원으로 만난 분들이라 괜한 민폐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럼 이사를 가는 건가요?

“제 딸을 낳은 고향인데 굳이 떠날 이유는 없죠. 저를 선택해 주고 일할 기회를 준 분들이 사는 곳인데, 나 국회의원 안 한다고 떠나면 얼마나 그렇겠어요. 의정부에 계속 살 겁니다.”

-혹시 소방청장이 꿈인가요?

“무슨 소리요. 간부 후보생으로 들어가도 가기 힘든 길이에요. 저는 약속을 지킨 첫 국회의원 출신 소방관으로 돌아가 재난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 기회가 된다면 소설을 써보고 싶고요.”

-한참 뒤에 정치권에서 다시 콜을 한다면.

“그때 가서 정치를 할 것 같았으면 안 그만뒀죠. 지금은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뿐이에요. 제 인생의 존재 이유가 사람 구하라는 것이거든요. 그거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국회의원 오영환은 대형 참사를 사전에 막기 위해 우레탄폼 등 가연성 건축자재 사용을 금지하는 ‘건축법 개정’, 현장 공무원의 질병 원인을 국가가 입증하도록 하는 ‘공상추정법’ 등을 입법 성과로 꼽았다. 소방관으로 돌아가는 오영환은 22대 국회에 간절히 바랐다. “정치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걸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현장에선 저와 소방관들이 안전하게 국민을 지켜드릴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