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맞은 국내 最古 골동품점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씨
“아버지가 갑자기 부르셨어요. 통장과 도장을 건네면서 ‘이제부터 네가 주인이다. 우리 가게가 망하면 네 밑에 있는 직원들은 딴 회사에 갈 수 있겠지만, 너한테는 누구도 사장 자리를 주지 않을 거다. 그러니 잘해라’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께 ‘알겠습니다. 100년을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김완규(78)씨가 서울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골동품점 ‘통인가게’를 아버지 고(故) 김정환씨에게 물려받았을 때 그는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 2대째는 수성(守成)만 해도 성공이라고 했다. 김완규씨는 아버지가 1924년 창업한 통인가게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통인갤러리’, 국내 최초 공예 전문 ‘통인화랑’, 포장 이사를 국내 처음으로 도입한 ‘통인익스프레스’, 국내 최대 규모 문서 보관 회사 ‘통인안전보관’, 해외 화물 운송 기업 ‘통인인터내셔날’ 등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통인그룹’으로 키웠다.
통인가게가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50여 년 전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김완규씨는 “하나만 고집하기보다 변화를 줘야 한다. 멈추지 않고 시대에 맞춰 꾸준히 변화했기에 100년을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100주년에 새로운 도전에 나설 계획이다. “내가 한 갑자(60년)는 더 살 사람이야. 미술은 100년이면 충분히 했잖아요. 이제부터 자유롭게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삼성 홍라희 여사 “이 집도 막내가 잡았네요”
1924년 서울 서촌 통인동에서 ‘통인가구점’으로 출범했다. 창업자 김정환씨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12대를 살며 벼슬살이를 한 안동 김씨 집안 자손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그에게 “구슬을 팔아 보라”는 이가 있었다.
-유리 구슬이 어떻게 돈이 되죠?
“일본 사람들이 조선 구슬을 가공해 여자 머리에 꽂는 뒤꽂이를 만들었어요. 일본에는 그런 구슬이 없어요. 아버지가 구슬을 모아 일본인 상인에게 파는 게 시작이 된 거요.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무도 일을 안 하셨어. 양반이라 상업도 공업도 할 수 없었고, 서울 안에서만 살았으니 농사지을 땅도 없었어. 벼슬이 딱 끊긴 다음에 아무것도 못 하고 죽게 생긴 거야.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열두 살부터 구슬을 팔아서 온 식구를 먹여 살렸어요. 일본에서는 여자 장신구가 제일 비쌌거든. 구슬을 사러 다니다 보니 ‘가구도 사가라’는 이들이 있어서 거래하게 된 거예요.”
-주 거래 품목이 골동품이 된 계기라면.
“가구와 함께 도자기나 패물이 우리 가게로 들어왔죠. 포마이카(합성수지 도료), 플라스틱이 등장하면서 그런 물건들이 가치 없는 세상이 돼 버렸잖아요.”
-인사동으로 옮겨 온 건 6·25전쟁 이후죠?
“1962년. 인사동 일대가 대학, 방송사, 개인병원, 고전음악 감상실 등 복합문화지구로 바뀌고 있었어요. 고서점 ‘통문관’, 일본인들이 두고 떠난 표구점 등이 이웃 효과를 일으키며 골동품상을 끌어들이고 있었죠. 게다가 인사동이 양반 잔재가 많은 곳이라 물건도 많이 나왔어요. 보물이나 패물을 까만 봉지에 이만큼 담아 와서 주르륵 쏟아 놓고는 ‘술값이나 주쇼’ 했어요. 돈 많이 벌었지. 하하.”
-그때만 해도 인사동이 완전 흙바닥이었죠?
“하수도가 없어서 비가 내리면 무릎까지 차. 종이로 물이 안 들어오게 문틈을 막았어요.”
-어떻게 스물 갓 넘긴, 그것도 삼형제 중 막내가 가게를 물려받았나요?
“스물셋에 주인이 됐지만, 가게에 나와 일한 건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도자기 등 좋은 물건을 사면 내게 보여주셨어요. ‘이건 이래서 좋은 거다, 이래서 비싼 거다’ 설명해 주시고. 딴 아들들은 안 보여주셨어. 나만 아버지 진지 잡술 때 겸상할 수 있었어요. 막내인 나를 굉장히 귀여워하셨어요. 딴 형제들한테도 ‘완규가 장사하는 데 얼씬하지 마라’ 하셨어요. 무안할 정도로. 나중에 (삼성) 홍라희씨가 ‘이 댁도 막내가 잡았네요’ 하더라고(웃음).”
-중학생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나요.
“좀도둑이 많던 시절이라 누군가 숙직을 서야 했어요. 내가 그 역할을 맡았죠. 잔심부름, 청소도 하고요.”
-그때 만난 언론인이자 민속문화 연구자였던 예용해(1929~1995) 선생 덕분에 영어를 잘하게 됐다면서요.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 아침, 숙직 방에서 만화 보고 땅콩 까먹으며 뒹굴고 있는데 예 선생이 오더니 ‘영어 공부 하라’고 야단치시더라고. ‘앞으로 미국 사람 많이 오는 시대에 너 영어 못 해서 어떡할래? 도그(dog) 몰라서 ‘멍멍’, 버드(bird) 몰라서 ‘짹짹’ 하면서 물건 팔래?’ 어찌나 창피하고 분하던지. 그때부터 영어 공부를 했어요. 덕분에 미국 석유왕의 손자이자 뉴욕현대미술관(MoMA) 이사회 회장을 지낸 데이비드 록펠러 같은 외국 거물들을 단골로 만들 수 있었죠.”
-어린 막내에게 물려준 데 대해 반대는 없었나요?
“동네에서 말이 많았지. 어느 날 아버지가 ‘완규야 내 방에 좀 와라’라고 전화했어요. 내가 지금 최 영감, 신 영감하고 같이 점심 먹고 들어왔다. 그 영감들이 ‘어린 자식한테 재산 통째로 맡기면 다 망한다, 나이가 30 넘으면 주란다’ 하시더라고요. 아, ‘다시 내놓으란 얘기시구나’ 싶었죠. ‘그래서 아버지는 뭐라 그러셨어요?’ 물었지요. 아버지는 ‘어, 나는 내 아들을 믿는다고 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아버지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아버님이 “고려청자와 불화(佛畵)는 절대 사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절대 사지도 팔지도 말아라. 청자는 100% 도굴품이고, 불화는 절에서 도둑질한 거니까.”
-‘골동품은 네가 살 평생 동안 나오니 걱정 말라’고도 하셨다고요.
“아버님 말씀처럼 못 봤던 새로운 게 계속 나오더라고요. 아주 짜릿해요.”
-미술계에 영향력이 큰 BTS(방탄소년단) 리더 RM도 고미술에 관심이 많다던데요.
“고미술을 볼 줄 알면 현대미술은 그냥 보여요. RM이 제대로 된, 업그레이드된 미술 공부를 하는 거죠.”
◇남이 필요한 걸 먼저 생각하니 성공했다
현재의 통인가게 건물은 그가 1973년 건축했다. 당시 인사동에서 가장 높은,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된 현대식 건물로 개관하자마자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다. 청와대에 외국인 VIP가 오면 보내는 단골 명소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최대 은행 체이스맨해튼 총재였던 록펠러는 한국에 도착하면 외자 확보를 위해 목 빠지게 그를 기다리던 박정희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보다 통인가게부터 찾았다. 록펠러는 이곳에서 금강산 민화 한 세트를 샀다.
미술·공예 작가들과 이병철 삼성 창업주 등 내로라 하는 컬렉터, 문인, 기자들이 문턱 닳게 드나드는 문화·예술 사랑방이 됐다. 재벌가, 명문가 며느리들도 한동안 즐겨 찾았다. 미술 공부가 유력 집안 신부 수업 코스가 됐다는 말도 나돌았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박서보 화백이 1976년 묘법 화풍으로 첫 개인전을 연 장소도 이곳이다. 외교 사절과 명사들을 초청해 사교의 장을 만들어 주기도 하는 ‘통인오페라’와 판소리를 소개하는 ‘조선풍류감상’ 공연도 100회 넘게 열렸다. 현재 통인가게 1층과 지하1층은 전통·현대 공예, 3층과 5층은 현대미술, 4층은 고미술을 전시하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은 미국 국무장관 부인 때문에 설치하게 됐다고요?
“건물을 새로 짓기 전, 박 대통령 시절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의 부인이 왔는데 화장실을 쓰겠대. 재래식 화장실이라 난감했죠. 사용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했는데, 괜찮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위치를 알려줬죠. 그런데 화장실에 들어간 부인이 ‘악!’ 소리를 지르며 기겁하는 거예요. 경호원들이 권총을 들고 뛰어가더라고. 부인이 깔깔대고 웃으며 나와서는 ‘미스터 김, 30분 뒤에 돌아올게요’라고 말하곤 소공동 반도호텔로 차 타고 갔어요. 얼마나 부끄럽던지.”
-통인가게라는 이름은 전설적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일즈맨이자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을 펴냈던 출판인 한창기(1936~1997)씨가 지어줬다고요?
“예용해 선생과 함께 우리 단골이셨죠. ‘월급받은 거 어떻게 알아가지고 전화하냐, 돈 다 털린다’고 했지요(웃음). 브리태니커 한국지사장 할 때 회계 전문가를 보내 장부 관리는 국제 기준으로 다듬어줬고, ‘뿌리깊은나무’의 한글전용주의에 따라 옥호를 통인가게라 고쳐주었죠.”
-화가들은 그림과 골동품을 바꿔갔다던데.
“(사무실 자리 뒤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저 그림이 천경자 작품이에요. 지금은 15억원이지만 그땐 아니었지. 천 화백이 강화 반닫이와 조선 백자와 바꿔간 거예요. 천경자씨가 돈이 없다며 난처해하자, 함께 온 권옥연 화백이 ‘현금 안 줘도 된다. 새로 그린 그림을 주면 되잖냐. 다 그림 주고 골동품을 입수한다’고 알려줬죠. 당장 구루마(리어카) 모는 인부 윤씨를 불러 옥인동 천 작가 작업실로 골동품을 보냈지요. 천 작가도 돌아오는 편에 대금으로 작품을 보냈어요.”
천경자의 1972년 작 ‘꽃과 항아리’다. 군청색 화선지에 다채로운 꽃이 갈색 화병에 가득 꽂혀 있는 정물화다. 팔리지 않아 40년 동안 창고에 보관하다 천경자 사후 창고를 정리하다 발견해 집무실에 걸었다. “망가진 액자를 알루미늄으로 새로 만들어 교체하려 했는데, 천경자의 수제자였던 이화자 작가가 ‘그러면 안 된다’며 비용도 받지 않고 말끔히 원상태로 고쳐줬죠.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는 ‘한 화병에 사계절을 담은 점이나, 외래종인 흰 카라와 여러 색의 우리 꽃을 어울려 낸 아이디어에는 천경자다운 파격의 해석이 돋보인다.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표구나 액자도 1972년 꾸밈이 그대로 유지돼 우리 20세기 미술 재료의 역사를 엿보게 해준다’고 감상평을 써줬지요.”
-제아무리 록펠러라도 한 푼도 깎아주지 않았다면서요?
“누구에게도 할인은 없다는 게 통인가게 원칙이니까.”
-통인인터내셔날이 생겨난 게 록펠러 덕분이라던데.
“록펠러가 ‘세계적인 회사가 되려면 세계적 시스템을 갖추라’고 조언했어요. 당시만 해도 골동품을 가져가려면 포장지가 없어 신문지에 싸서 가져가야 했어요. ‘미군 기지에 가면 널린 게 포장지’라는 거예요. 가보니 정말 미국에서 온 포장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요. 그걸 가지고 포장하기 시작하면서 통인인터내셔날이 생겨났죠.”
-포장 이사는 어떻게 도입하게 됐나요?
“미국은 땅이 넓어서 이동이 어렵잖아요. 이사는 포장 이사 직원들이 해서 나르고 주인은 열쇠만 가져가더라고요. 그 시스템을 도입했죠. 입주나 이전이 늦어지는 경우 짐을 보관할 마땅한 방법이 없잖아요. 그 짐을 보관하면서 ‘통인안전보관’이 만들어졌어요. 그렇게 통인가게를 이용하는 이들의 필요에 따라서 여러 일이 생겨나고 회사가 생겨났지요.”
-통인안전보관은 국내 최대 문서 보관 업체로 커졌습니다.
“9·11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면서 거기 입주해 있던 회사의 99%가 없어졌어요. 살아남은 1%는 우리 같은 보관 회사에 문서를 맡긴 회사들입니다. 외국계 보험회사와 신용카드사들이 다 고객입니다. 문서를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방온·항습이 갖춰져 있어요. 또 서류를 전부 스캐닝해서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 연락하면 바로 찾아서 보내줘요. 종이를 잘게 부수는 파쇄 업체도 세웠어요. 내가 필요해서 한 게 아니라 남이 필요한 걸 먼저 생각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이제부턴 신사업 도전… 육십 년 더 살 거니까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골동품 가게 주인은 변화와 새로움을 끊임없이 말했다. 사무실 책상에는 ‘세계를 바꿀 테크놀로지 2024′(시크릿하우스)와 1911년 계연수가 한국상고사를 서술한 역사서 ‘환단고기(桓檀古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는 “‘과거에 무엇을 했다’고 말하기가 점점 싫어진다. 변화가 미래의 가치인데 나는 몇 십 년간 똑같은 일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앞으로 공부하는 심정으로 강화도 미술관 프로젝트, 노인문제연구소 개설, 부산에 빵집 만들기, 영종도 개발 등 또 다른 사업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기념 사업이 있나요?
“없어요. 평생 시끄럽게 살았으니 조용하게 맞으려고(웃음).”
-강화도에 지으려는 10개의 박물관과 미술관 중 첫 번째가 올해 문을 연다고 들었습니다.
“강화도에 통인도자연구소가 있어요. 거기를 비워서 시작합니다. 이름은 ‘통인미술관’. 우리가 소장품이 많아요. 작은 규모로 10개를 짓고 도자기, 고가구, 백자, 고려청자, 의상, 서책, 다리미 등 각각 다른 걸 보여주려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거대한 박물관을 만들기보다는 각각의 이야기가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려는 목적이죠.”
-왜 하필 강화도인가요?
“통인도자연구소에서 오페라 음악회를 했는데 일본 소니 회장이 왔어요. 다음 날 ‘고려 궁터에 데려가 달라’고 해요. 갔더니 1000평 넓은 땅에 작은 사당 하나 지어놨어요. 들어가 보니 먼지 쌓인 마네킹 정도가 전부였어요. 보여주지 말 걸, 후회했어요. 또 절에 가보고 싶대서 전등사 밑에 갔더니 빈대떡 부치고 생선 튀기고 음식 파는 곳들만 즐비했어요. 이렇게 놔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바이어를 데려가면 ‘한국 문화가 위대하구나’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야 수출이 잘되거든요. 강화도에서 K팝의 뿌리가 무엇인지 세계인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부산에 내겠다는 빵집은 뭡니까.
“통인가게에서 ‘카페 범’을 하다가 빵집을 해보면 어떨까 싶더라고. 부산에다가 하려는 이유는 도망가고 싶어서. 마누라가 못 보잖아(웃음). 제빵학원에서 빵 만드는 법도 배우고 있어요.”
-빵을 직접 만들려고요?
“되살림 가구 수출할 때도 내가 만들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볼 수 있는 눈은 가지고 있었어요. 옛 가구를 많이 봤기 때문에 어떤 형태와 비율이어야 하는지가 몸에 익어 있어요. ‘한 치만 더 깎아서 낮게 만들어’ ‘상판이 너무 두꺼워. 한 번만 대패로 밀어’ 이렇게 지시하면 정상적인 물건이 나와요. 마찬가지로 빵도 내가 배우면 기술자가 만들더라도 감이 있으니까 지시를 할 수가 있지요.”
-’통인메타시티’는 뭔가요?
“영종도에 마카오의 4배인 3300만 평 규모에 인구 30만 명이 상주할 수 있는 미래도시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세계 최초로 온·오프라인으로 건설되는, 현실의 도시와 함께 메타버스상에 구현되는 디지털 도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빈 살만이 추진하는 ‘네옴시티’와 비슷하죠.”
-노인문제연구소도 만든다고요?
“심각하잖아요. 지금은 노인에게 돈만 주는데, 돈보다는 일자리를 줘야 해요. 그래야 일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더 오래 살고, 사회도 건강해지죠. 그런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동안 해왔던 골동품, 공예, 미술과는 동떨어진 일들 같습니다만.
“철학에서 항상 말하는 게, ‘점이 모여서 선이 되고 선은 일직선상에서 만난다’잖아요? 내가 해왔던 일들과 하려는 일들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점이 모여서 선이 되는 것처럼 모두 같이 있는 겁니다. 떨어져 있는 게 전혀 아니죠.”
-이걸 모두 실현 가능할까요?
“시간은 충분해요. 나는 앞으로 60년 더 살 거니까(웃음).”
스물셋 청년처럼 그의 눈이 반짝였다.
김성윤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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