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황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
양평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이함캠퍼스 실내 전시장에서 만난 두양문화재단 오황택 이사장. 뒷편 철제 의자들은 네덜란드에서 생산된 것들로 누구의 디자인인지 모른다. 하지만 오 이사장은 “녹슨 무명의 가구들에도 나름의 스토리와 디자인 철학이 있어 가치 있다”고 했다. 최영재 기자
오는 6월 30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에 위치한 이함캠퍼스에서 20세기 디자인 가구 기획전 ‘사물의 시차’가 열린다. ‘빈 상자로서’라는 뜻의 한자 이함(以函)과 배움의 공간이라는 의미로 영어 캠퍼스(campus·대학 교정)를 조합한 이함캠퍼스는 1만평 대지 위에 미술관·카페·스테이·사무동 등 노출 콘크리트 건물 8개 동과 아기자기한 정원이 펼쳐진 복합문화공간이다.
‘사물의 시차’ 전시는 지난 100년간 우리 일상의 시공간에 존재하며 현대 디자인의 모태가 된 디자인 가구 11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현대 아파트의 효시라 불리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만든 싱크대부터 장 프루베, 찰스 앤 레이 임스, 한스 웨그너 등이 디자인한 전설 같은 가구들이 연대별로 전시돼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수집된 이 빈티지 가구들은 모두 두양문화재단 오황택(75) 이사장이 수십년 간 하나씩 모아온 개인 소장품이다.
1978년 단추회사 ‘두양’을 설립한 오 이사장은 2013년 재산의 80%인 약 600억원을 기부해 두양문화재단을 설립한 후 2015년 서울 가회동에 청년 인문학교 건명원을, 2022년 이함캠퍼스를 열었다. 단추회사를 운영하던 사업가가 인문·예술을 위한 문화공간을 만들게 된 사연은 뭘까.
46년간 ‘단추’ 한 우물만 팠습니다.
“패션 브랜드를 해 보라는 제안이 여러 번 있었죠. 그런데 내가 천생 장사꾼이라 패션사업에 투자해 이익을 얻기까지 들어가는 돈과 시간을 계산해 보니 단추 사업에 계속 집중하는 것보다 못하더라고요. 그러니 딴 데 눈길을 돌릴 이유가 없었죠.”
친구 아버지가 운영 단추공장 입사가 계기
단추공장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요.
“어려서부터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어요. 대학도 경영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공부를 못했어요.(웃음) 점수 맞춰 국문과를 갔지만, 전공 공부 대신 경영·마케팅 이론 등에 관련된 책들만 읽으면서 혼자 사업할 궁리만 했죠. 군 제대 후 복학 않고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단추공장에 입사했어요. 현장을 알아야 되니까. 1년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신혼집을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기계 3대를 두고 서울 거여동에서 직원 5명과 시작한 게 지금의 두양입니다.”
두양은 현재 국내 단추기업 1위 업체다. 한 달에 약 2000만~3000만 개, 1년이면 약 2억4000만 개의 단추를 생산한다. 매년 새로 개발하는 단추 디자인만 100가지 이상이다. 보라카이·바이엘·빌리브·말리부·둥그니·뽀드득·보리수 등 단추 이름도 흥미롭다. “단추에 이름 붙이는 게 제일 골치 아픈 일”이라 할 만큼 그때그때 생각나는 지명과 단어들을 붙였기 때문이다.
단추 회사 사장님이 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처음엔 나도 옷에 구멍만 뚫으면 달 수 있는 게 단추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단추가 옷의 악센트이자 화룡점정이더군요. 단추 하나 잘못 달면 옷 자체가 이상해져요. ‘단추도 디자인이다’ 깨닫게 될 무렵, 일본 출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돼요. 1980년대였는데 호텔 방에서 모찌를 먹는데 포장이 어찌나 정성스럽고 예쁘던지. 당시 우리나라에선 ‘신앙촌 캐러멜’처럼 디자인이고 뭐고 없이 투명 비닐에 한 번 싸서 양을 많이 담는 포장이 최고였죠. 그런데 일본은 모찌 하나도 예쁜 상자에, 예쁜 포장지에 담더라고요. 상자 안에 회사 연혁과 철학을 적은 종이까지 넣어서. 소비자가 원하지 않으면 생산자는 절대 이렇게 안 만들어요. 포장이 많아지고 정성이 들어갈수록 돈이 드니까. 값이 좀 비싸도 감각 있는 디자인 제품을 사겠다는 소비자들의 안목이 일본의 문화를 만들고 있구나, 문화는 소비재가 아니라 생산재구나 깨달았죠.”
‘문화는 소비재가 아니라 생산재다’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문화는 모든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큰 생산재예요. BTS가 직접 벌어들인 외화 수익이 얼마인지는 중요치 않아요. BTS를 통해 형성된 ‘프롬 코리아’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신뢰와 영향력이 대단한 거지. 문화는 내수 시장이 탄탄하게 형성돼 있어야 힘을 받죠. 1980년대에 포니 자동차가 수출을 잘 할 수 있었던 것도 내수시장이 탄탄했기 때문이에요. 수출만 생각하고 차를 만들 순 없으니까요. 소비자의 안목이 높아져야 생산자의 감각도 높아지겠구나. 소비자의 안목을 높이려면 나는 뭘 해야 하지 고민했죠.”
오황택 이사장이 인문·예술 후원을 위해 설립한 문화재단 뒤에는 그가 46년 간 키워온 단추회사 두양이 있다. 최영재 기자
이후 오 회장은 시간만 나면 인사동을 드나들면서 개인의 안목을 높이는 경험치를 쌓았다. 이함캠퍼스 부근 창고에 한국 전통가구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는 이유다. 빈티지 전문가와 유럽을 여행하면서 20세기 디자인 가구 수 만 점을 수집한 것도 같은 이유다.
‘소비자의 안목이 문화 수준을 높인다’는 생각이 이함캠퍼스의 시작인가요.
“평범한 이들의 안목이 높아지려면 좋은 것을 많이 봐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고, 오리지널 예술·디자인 작품을 볼 수 있는 좋은 공간에 욕심이 생겼어요. 지금은 기획팀이 하지만 예전에 단추 디자인 샘플 결정은 제 몫이었죠. 강원도 어디쯤 혼자 가서 고민했는데, 오가던 길에 지금의 이함캠퍼스 자리를 봤어요. 여기라면 사람들이 올 수 있는 멋진 공간을 만들 수 있겠구나, 그 공간에 내가 수집한 것들을 전시해보자 결심했죠.”
문화, 산업에 미치는 영향 가장 큰 생산재
예술·디자인 작품 수집 기준은 뭔가요.
“한때 내 별명이 ‘독립군’이었어요. 남의 말을 안 들으니까.(웃음)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권해도 내 맘에 안 들면 ‘이거 내꺼 아닌데’ 하죠. 책도 잘 안 봐요. 선입견 갖는 게 싫어서. 미술·디자인 전공도 안 했지만 적어도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에 연연하진 않아요. 베토벤만 최고가 아니거든요. 뽕짝으로 누군가 위안을 받는다면 그 또한 최고죠. 창고에 가면 녹슨 철제 가구, 문짝, 램프들이 많아요. 유럽이나 미국에선 ‘고철’이라고 값도 얼마 안 하는데 나는 그런 ‘언노운(unknown·알려지지 않은)’한 것들에도 관심이 가요. 1달러든, 1만 달러든 내 맘을 울리는 게 중요하니까.”
이함캠퍼스는 완공까지 23년이나 걸렸습니다.
“파리나 로마를 여행하면서 느낀 건 ‘천년이 지나도 그 시대 최고의 예술가·장인들과 자본이 조화를 이룬 명작은 남는구나, 이걸 보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오는구나’였어요. 좋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좋은 것을 채우고 싶어서 오래 고민했어요. 덕분에 김개천 건축가와 좋은 인연도 쌓았죠. 건명원 설립도 김 건축가가 불쑥 던진 한 마디 ‘인문학에 관심 있으신가요?’에서 시작됐으니까요.”
건명원은 개교 당시 최진석(서강대 철학)·배철현(서울대 종교학)·김개천(국민대 공간디자인학)·김대식(카이스트 전자전기공학) 등 인문·예술·과학 분야 스타 교수 8명을 주축으로 하면서 큰 화제가 됐다.
건명원 개교 기념사 중 ‘시대의 반역자를 키워달라’는 말이 흥미롭더군요.
“시대를 벗어나라, 틀을 깨라는 말이죠.(웃음)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고 시대가 변하면 지향해야 할 가치관도 달라져요. 우리 때는 ‘돈은 남자가 버는 것’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아니죠. 지금의 20대가 생존을 넘어 성공하려면 20년 후에 바뀔 세상을 예측하고, 그러려면 현재의 가치관을 깨 부숴야죠. 건명원 학생들을 뽑을 때도 ‘뭘 잘 하는 사람’보다는 ‘뭔가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해요. 교수들에게도 ‘인간답게 살기’보다 인간의 본능대로 ‘생물답게 살기’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어요. 에너지 충만하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욕망대로 확신을 갖고 움직이는 젊은이들을 많이 배출하고 싶어요.”
젊은이들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목적지로 가는 길은 많아요. 어떤 방법으로 가느냐가 각자 다르죠. 인문학은 천 년 전 사람들 이야기 중 오랜 시간 공감대를 형성한 공통분모들이라 좋은 길잡이가 되죠. 물론 어떤 것을 취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이에요.”
재산의 80%를 인문·예술을 위한 재단에 기부하셨어요.
“내가 100살 넘어서까지 살 자신이 없어서요.(웃음) 기껏 살아야 90살 정도일 것 같은데 그때까지 쓸 돈을 계산해 보니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타고,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에서 밥 먹으면서 놀아도 번 돈을 다 못 쓸 것 같단 말이죠. 자식에게 주든지, 사회에 환원하든지 결론은 두 가지였고 난 후자를 택한 거예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시네요.
“통장에 적힌 숫자는 종잇조각일 뿐, 돈은 실제로 써야 진짜 내 돈이 됩니다. 닭 두 마리를 삶아서 나는 한 마리밖에 못 먹는데, 그걸 움켜쥐고 있다가 썩히면 낭비죠. 빨리 이웃과 나눠 먹는다면 효율적이겠죠. 나는 계산에 밝은 장사꾼일 뿐, 대단한 철학은 없어요. 좋아서 관심 있는 학교도, 미술관도 만든 거고 나 죽은 후에도 사람들한테 오랫동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죠.(웃음)”
인터뷰 내내 오 회장은 ‘장사꾼이라 말주변이 없다’면서도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 아마도 꾸준한 메모 습관이 생각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 같다. 그는 두양을 운영하면서 3개월마다 한 번씩 대차대조표를 직접 만들고, 마지막 장에는 이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자신을 움직인 생각들을 짧은 소회로 남겼다. 평상시에도 작은 노트와 연필 또는 휴대폰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그렇게 쌓인 일기장과 수첩이 수십 권. “생각이 정립돼야 힘이 생긴다”는 게 그의 말이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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