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이인호의 ‘1948 건국론’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1948년에서야 진정한 독립을 이뤘다며 "1945년이 광복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잘못된 이야기"라고 말했다./김지호 기자
1919년이냐, 1948년이냐.
최근 재점화된 ‘건국 논쟁’에 역사학자 이인호는 단호했다. “1919년 건국설은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국가의 정체성을 훼손하기 위해 내놓은 주장입니다. 1948년 5·10 선거로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해 대통령을 선출한 뒤 건국의 마지막 단계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해 세계에 선포한 이 명백한 사실을 왜 부정하려 합니까.”
그는 8·15 광복절 윤석열 대통령의 경축사도 아쉽다고 했다. “해방 후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마침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출범시킨 건국 75주년의 의미를 강조했어야 하는데, 그걸 언급하지 않아 이 소모적인 논쟁을 잠재울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
87세 노(老)학자는 대한민국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기가 이렇게 힘든 것이냐며 “비애를 느낀다”고 했다.
◇건국 원년은 1948년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는 주장에 대해 ‘역사 왜곡’이라고 반박하셨더군요.
“반(反)대한민국 세력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으니까요. 그리고 ‘광복 78주년’이라는 올해 경축식 제목부터 틀렸어요. 제대로 쓰려면 ‘해방 78주년, 건국 75주년 기념 광복절’이라고 해야지요. 해방이 광복은 아니었잖습니까.”
-해방과 광복이 다른가요?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일제 치하에서 놓여난 겁니다. 그 감격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우리 힘으로 해방을 얻은 게 아니고, 나라도 미국 소련으로 분단 점령된 상황이라 독립국가가 되지는 못했어요. 1948년 정부를 수립하고 자유민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하면서 광복은 비로소 이뤄집니다.”
-윤 대통령의 경축사는 왜 아쉬웠습니까.
“독립운동은 건국운동이었고 대한민국이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뤘는가에 대해선 말씀하셨는데, 그게 다 1948년 나라가 건국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언급이 없었어요.”
-건국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건국이 어떻게 논쟁이 됩니까? 대한민국 사람이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탄생한 걸 기뻐해야 당연하지요. 세계 어디라도 물어보세요. 대한민국 탄생이 언제인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이 되면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의 단체였고, 국가적 기능을 하진 못했어요. 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고, 국민들도 임정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임정과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발언으로 들리지 않을까요?
“그분들이 추구했던 게 독립이고 독립을 이룬 게 1948년인데, 그게 왜 독립운동가를 폄훼하는 겁니까.”
-미국도 독립 선언을 한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하지 않았나요?
“미국은 영국 식민지였지만 처음 형성될 때부터 각 주별로 자치정부가 있었어요. 독립을 선포한 건 영국에서 부과하는 세금이 과다해 그걸 못 내겠다고 한 데서 출발한 거지, 나라는 이미 스스로 운영하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독립 선포가 곧 독립이 될 수 있지만, 우리는 달라요. 일본 법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우리가 독립을 선언했다고 해서 그게 독립이 됩니까?”
◇단독정부? 공산화 막기 위한 고육지책
-이승만 대통령도 대한민국 원년이 1919년이라고 했다던데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선포 식사(式辭)에 ‘대한민국 30년’이란 대목이 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앞부분엔 이렇게 썼어요.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하는 것을 겸하여 경축한 것입니다.’ 국가의 새로운 탄생이 1948년 8월 15일에 드디어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1948년 건국론’을 비판하는 사람은 모두 좌파입니까?
“1948년이 건국의 해라고 말하길 주저하는 사람들 중에는 좌파가 아닌 사람도 물론 있었어요. 영구 분단에 대한 우려 때문이죠. 김구 선생도 그중 한 분인데, 이승만 박사는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위협을 막으려면 남한만이라도 독립을 시켜야 한다고 설득한 겁니다.”
-실제로 좌파 역사학자들은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의 시작이라고 비판합니다.
“북한은 이미 1946년 2월부터 공산국가 체제를 만들기 시작해요. 이를 간파한 이승만이 우리도 서둘러 주권국가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쪽에 넘어갈 수 있다며 ‘정읍 연설’을 합니다. 좌파들은 이를 분단 획책이라 비판하지만 남한까지도 공산화되는 걸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보는 게 맞아요. 그리고 우리 헌법에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 전체라고 명시돼 있어요. 아직 우리 법의 권능이 북한까지 미치진 못하지만 언젠가 회복해야 할 영토로 남아 있는 겁니다.”
-KBS 이사장 시절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에 공로가 없다’고 발언해 논란이 됐었지요?
“난 사실을 말한 겁니다. 김구는 이승만처럼 국제 정세에 밝지 못해 한반도가 분단으로 가고 있는 걸 인지하지 못했어요. 처음엔 김구도 정읍 연설에 동조했는데 ‘장덕수 암살 사건’을 계기로 두 분 사이가 갈라지면서 단독정부 추진을 비난하기 시작하죠.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가로서 큰 공헌을 했지만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유엔에도 지지하지 말라고 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건국에 공로가 없다고 한 겁니다.”
◇김구 앞세운 이승만 죽이기
-이승만과 김구 모두 공산주의에 반대했는데 두 분은 왜 좌우의 대립 구도에 서게 됐을까요.
“좌익이 김구를 이승만 죽이기의 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암살당한 김구를 성역화해서 대한민국 하면 김구 선생이 떠오르도록 기획한 거죠. 그 일환으로 이승만을 악마화한 ‘백년전쟁’이 만들어졌고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독재 하면 박정희, 전두환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1990년대 소련이 무너지고부터 독재자 하면 이승만을 떠올립니다. 이상하잖아요? 이승만은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4·19 의거도 헌법이 국민의 항의권을 보장하는 민주적 토대를 만들어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그런 이승만이 갑자기 독재자의 상징이 된 건 운동권에 종북 세력이 침투했기 때문입니다. 김구를 이용해 이승만 죽이기 작업을 하고, 1948년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가 되고요. 이 대통령의 운구가 하와이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장례식 치를 때 어마어마한 인파가 도심을 메우고 애도했습니다. 4·19 주역들이 왜 이승만 대통령 묘역을 찾아갔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된 혁명은 1948년 건국혁명이라고 하셨더군요.
“북한과 우리를 보세요. 똑같이 능력 있고 부지런하고 자식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민족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어떻게 달라져 있습니까. 우리가 국민의 역량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에 선진국 반열에 올랐어요. 1948년 제헌 헌법이 계급 간 차별 금지, 남녀 평등을 선포해 모두가 평등하게 투표하고 교육받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건국은 혁명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에 합류하셨지요?
“이승만 기념관은 한 사람의 공과를 평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니에요. 독립 투쟁과 건국, 그리고 13년 동안 대통령을 한 사람의 족적을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웠고 어떤 난관에 부딪혔으며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게 됩니다. 또, 이 대통령은 기록을 꼼꼼히 남긴 분이에요. 기념관이 생겨 모든 자료가 다 공개되면 이승만뿐 아니라 동시대 활동했던 김구, 안창호 같은 분들에 대해서도 소상히 밝혀지겠죠.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건 그간의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는 이들입니다.”
-이승만 우상화, 신격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누가 이승만을 신격화합니까. 이승만의 족적을 그대로 보여주자는 거지. 기념관의 장점은 사료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한다는 거예요. 이 박사가 프린스턴 대학에 다닐 때 쓴 일기를 보고 내가 충격을 받았어요. 학교 생활에 대한 건 없고, 오늘 제일감리교회 가서 강연을 하고 2달러를 벌었다, 오늘은 어디서 8달러를 벌었다…. 그만큼 하루하루 절박하게 살며 독립운동을 했어요. 그런데 좌파들은 이승만은 어딜 가든지 돈 냄새가 난다고 비하해요. 참 나쁜 사람들 아닙니까?”
◇조작과 선동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386세대가 공부를 안 해서 종북세력에 이용당했다고 개탄하셨지요?
“독재 타도하자고 싸운 기간이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인데 이때 제대로 된 역사서를 읽고 고민하고 토론했다면 시비를 가릴 능력이 생겼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386 운동권 세대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들이라고 봅니다. 80년대 초 내가 일간지에 기고한 글이 있어요. 시위하는 학생들을 전부 폭도로 몰면 이 나라엔 희망이 없다고. 그런데 그들이 기득권이 되면서 민주화 정신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된 겁니다.”
-문재인 정부 때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나는 죽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 학자들의 비겁함이죠. 역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면서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이 공백을 우리 역사에 부정적 시각을 가진 이들, 선전선동의 귀재인 좌파들 손에 다 내주게 된 겁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건 조작과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 지성을 키우기 위해서라고도 하셨지요.
“지도자의 판단은 49대51의 상황에서 51을 택하는 거지, 흑백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통찰과 지혜는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는데 파렴치한 자들이 역사를 조작하고 정치도구화해 나라를 흔들고 있어요. 사실 요즘 나는 비애에 빠져 있어요. 내가 얼마나 게으르게 살았는가, 완전히 어항에서 살았구나, 하는.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녔을 만큼 빚이 많은 내가 후대들은 그렇게 교육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큽니다. 그래서 미안하고 아픕니다.”
☞이인호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서울대 사학과에 다니다 미국 웰슬리대로 유학,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 하버드대에서 러시아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서울대 교수를 거쳐 1996년 핀란드 대사로, 1998년 러시아 대사로 임명돼 건국 최초 여성 대사가 됐다. 박근혜 정부 때 KBS 이사장을 지냈다.
김윤덕 선임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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