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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6일 미국 식품의약청(FDA)에서 처음으로 ‘먹는 미생물’이 의약품으로 승인을 받았다. 흔히들 먹는 유산균 제품들을 떠올리고 별것 아니라 여길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자주 접하는 그런 제품들은 엄격한 효과 검증을 거치지 않은 건강기능식품일 뿐이다. 그러니 사실상 처음으로 약효를 과학적으로 검증한 ‘먹는 미생물’ 제품이 나온 셈인데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 게 중요하다. 세계적으로 미생물을 이용한 의약품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라서다.
FDA가 첫 승인한 ‘미생물’ 의약품
사람의 몸은 대략 몇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을까. 일반적인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잡으면, 대략 30조개의 세포가 인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게 현재까지의 정설이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의 연구 결과, 놀랍게도 사람의 몸에는 약 40조마리의 공생(共生) 미생물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미생물이 우리 몸 곳곳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사람은 인체와 세균의 공생체(共生體)로 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다. 그런데 세균이 이렇게 많은 걸 걱정할 필요는 없을까.
일반적으로 세균이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인체의 공생 세균들은 인체에 무해한 건 물론이고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는 대부분의 동물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소와 같은 초식동물들은 그 스스로는 풀을 소화할 능력이 없다. 물론 이런 동물들도 들판의 목초를 뜯고 되새김질해서 식물을 소화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기는 한다. 그렇지만 딱 여기까지가 초식동물이 수행하는 일의 전부이지 실제 식물을 소화해서 영양소를 만드는 일은 초식동물의 장(腸)에 공생하는 다양한 미생물들이 수행한다. 그러니 초식동물의 소화기관에 공생하는 세균을 모두 죽이면 소가 아무리 열심히 풀을 뜯어도 이를 소화해 양분을 얻지 못한다.
다행히 사람은 스스로가 가진 소화효소를 이용해서 대부분의 음식을 소화하고 양분을 취할 수 있긴 하다. 그렇지만 인간의 몸에서 가장 많은 수의 미생물이 상주하는 기관인 장(腸)에 공생하는 세균들 역시 사람이 섭취한 음식물의 소화를 돕고 인간이 소화할 수 없는 물질들을 소화해 유익한 부산물을 내놓는 건 마찬가지다.
이런 장내 공생균 중 가장 먼저 알려지고 유익함이 널리 소개된 게 우리가 익숙한 유산균 계열의 세균일 뿐,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정말 다양한 장내 공생균을 찾아냈고 그 세균들이 수행하는 기능을 추적 중이다. 이런 인체 공생 미생물을 통칭하는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유다. 그런데 이런 미생물들이 소화 관련 기능 외에 생각보다 더 포괄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면 어떨까.
장내 미생물이 수행하는 기능 중 가장 주목받고 있는 건 세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당연히 소화와 관련된 작용이다. 남들과 똑같은 양의 식사를 하더라도 누군가는 남들보다 체중이 더 느는 게 어쩌면 장내 미생물의 차이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단순히 체중만이 아니라 당뇨병이나 고지혈증 같은 대사성 질환에 대해서도 장내 미생물의 역할을 밝히려는 연구가 계속 진행 중이다. 인간의 소화효소로 분해되고 남은 산물을 과하게 잘 분해하는 장내 미생물이 많으면 남들보다 혈당이 더 많이 오를 수가 있어서다. 만약 해당 분야에서 명확한 근거를 가진 연구들이 축적된다면 언젠가는 당뇨약이나 고지혈증 약을 먹는 것 말고도 만성질환을 관리하는 새로운 약이 개발될 수 있다.
두 번째는 면역 기능이다. 우리 몸의 면역세포는 내 몸의 일부가 아닌 외래 미생물을 만나면 공격하도록 훈련된다. 문제는 이런 보호 기능이 너무 과해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은 물질에 대해서도 과도한 공격성을 보이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아토피 피부염이나 알레르기성 비염과 같은 알레르기성 질환들이다.
그런데 관련 연구를 진행하다 보니 면역세포 훈련에서 장내 미생물의 영향이 상당하다는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명확한 근거를 가진 연구들이 축적된다면 현재와 같이 증상 조절만 진행하는 알레르기성 질환 치료가 아닌 장내 미생물을 이용하는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될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사람의 감정과 행동이다. 사람의 장이 대체 뇌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 인간의 장 속에 있는 신경들이 뇌신경과 일종의 ‘소통’을 진행한다는, 꽤 설득력 있는 가설이 제안됐다. 배경은 이렇다. 인간의 장 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외부 자극을 감지하는 수용체들이 존재하는데 이렇게 감지된 자극 정보가 뇌까지 전달되어 기분이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극을 장내 미생물들이 수행한다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장내 미생물의 영향에 따라 일정 부분 기분이나 행동이 변화한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 장내 미생물을 건강한 형태로 변화시키면 우울감과 같은 것을 조금 덜 느낄 수도 있지 않겠냐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마이크로바이옴 가능성 확인한 첫 사례
표현에서 짐작하겠지만 아직까지도 마이크로바이옴을 이용한 치료는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게 훨씬 많다. 그렇기에 이번 FDA 허가를 받은 제품은 큰 의미를 지닌다. 가능성만이 아닌, 실제 효과 입증에 성공한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허가된 약은 심각한 세균성 장염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됐다. 장내 세균 감염을 막으려 항생제를 사용하는 게 아닌, 유익균을 넣어 장내 미생물을 안정시키려는 방식이 성공한 것이다. 추가적인 연구가 진행된다면 해당 질환 외에도 배변 관련 질환을 치료하는 데 긴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심각한 수준의 염증성 장 질환이나, 민감성 대장 같은 질환을 ‘먹는 미생물’로 조절할 수 있다면 불편을 겪는 환자들의 삶이 극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
이번 성공을 계기로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던 미생물 의약품의 실현 가능성이 보다 고평가된다면 추가적인 연구개발 자금이 유입되어 또 다른 구체적인 사례가 나올 수 있게 된다. 가능성의 영역에서만 십수년째 머물던 mRNA 기술이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급격히 발전했던 것처럼, 실제 성공 사례가 등장하는 게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먹는 미생물 의약품이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면 인류가 질병 관리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의약품 군(群)이 생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언젠가 올 근미래에는 약 대신 다양한 종류의 미생물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박한슬 약사·‘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저자 조선일보 입력 20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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