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제주살이하며 죽음 이후 세계 연구하는 의사

해암도 2023. 4. 4. 06:36

[함영준의 마음PT] 

 
 

# 우리나라 소화기 내과의 권위자인 정현채(68)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평범한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다. 공부를 잘해 당시 명문 경기 중고를 거쳐 서울대 의대를 다녔다. 워낙 말이 적어 별명이 ‘벙어리’였지만, 사회성도 있어 반장도 하고 잘 컸다.

정현채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죽음은 삶의 종착역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면서 죽음 이후의 삶을 인정했다. /사진=셔터 스톡
 

그런데 그는 늘 자신에 대한 자학이 심했다. 사춘기 시절 머리가 크면서 스스로를 ‘가치없는 인간’으로 여겨 투신자살하려고 한강에 간 적도 있었고, 20대 대학시절에는 손목을 칼로 긋거나 수면제를 모아 먹은 적도 있었다.

그는 70을 바라보는 지금도 왜 그런 자살충동이 생겼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타고난 성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면 그의 업(業) 때문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의 빚을 해소하기 위해서인가.

장가 가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서울대병원에서 잘나가는 의사로 인정받고 사는 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삶에 대한 허무, 자신에 대한 자책, 그리고 이생 너머 죽음에 대한 불안이 강력히 존재하고 있었다.

#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40대 후반인 2003년, 아내가 권해준 ‘사후생(死後生)’이란 책을 읽으면서 비롯됐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자 죽음학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스위스 태생의 미국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 박사가 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목격한 죽음과 관련된 영적 현상을 기록한 책이다.

2만여건의 근사체험(육체이탈체험) 기록 등을 통해 그녀는 한마디로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 지금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환자가 죽음에 직면할 때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그 죽음을 도우러 나타나며, 그 사랑 속에서 환자가 평화롭게 임종을 맞게 되는 등 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인이나 철학자의 관점이 아니라 과학자의 시각으로 죽음을 알고 싶었던 그는 그녀의 임상기록에 크게 공감하고 이후 저명한 의학 저널 ‘랜싯(Lancet)’이나 의과학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근사체험에 관한 논문 등을 찾아 본격적으로 죽음을 공부했다.

마침 고교동창인 이화여대 한국학과 최준식 교수가 창설한 ‘한국죽음학회’에 들어가 함께 공부하고 연구도 했다.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는 걸 확신하게 됐죠.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면 자살하는 이들이 크게 줄 것이며, 말기 암 환자 등 죽음을 앞둔 이들도 불안과 공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사로서 그의 임무가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죽음을 공부함으로써 이생에서 의미있게 살다가 아름답게 세상을 마무리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2007년부터 대중을 상대로 ‘죽음학’ 강의를 시작했다. 진료 활동중에도 연구를 거듭해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란 책 등도 간행했다.

암과 싸우고 죽음을 공부하면서 몸과 마음이 더 넉넉해진 정현채 교수 /사진=정현채 교수

# 명예퇴직을 몇 해 앞둔 2018년 그는 암에 걸렸다. 방광암 2기. 처음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연구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인간을 비롯 모든 동물체는 ‘접근・회피(approach vs avoid)’ 본능이 있다. 좋은 것은 다가가고 싫은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성장과 자유는 두려움과 싫은 것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데서 이뤄진다.

방광과 전립선을 다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고, 소변은 인공방광으로 대신했다. 항암치료는 잠깐 받았다. 암으로 인해 그는 조기 정년퇴직을 하고 제주도에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암 세포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의 ‘대담한’ 마음 자세가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시킨 것인가.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고 한다. 6,7년이 지나도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15분 정도 샤워를 하면서 하는 독특한 감사(感謝) 의식이 있다. 자신의 두눈, 두귀, 두다리 등 모든 신체기관이 멀쩡하고 지난밤 돌연사하지 않은 데 대한 감사다. 의사로서 그는 수많은 환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가 예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감사 기도를 마친 후 그는 샤워의 물줄기를 밝은 빛의 폭포로 생각하는 심상화(imaging) 훈련을 한다. 폭포를 맞으면서 몸에 쌓여 있는 부정적 에너지가 씻겨 내려가고, 손상된 신체 기관이 치유된다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광 속을 거닐며 그는 젊은 시절 느껴보지 못한 자유와 희망, 그리고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사진=정현채 교수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그는 암세포와 싸우는 세포들에 대해 감사하고 격려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암환자들에게 권유되는 이 요법은 의학적으로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임상적으로는 꽤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샤워를 마친 다음에는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자신이 운영하는 네이버 <죽음학 카페>에 들어가 점검을 한다. 3000여명 회원이 죽음이나 인생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고 상담을 구한다. 정교수는 직접 글을 쓰고 댓글을 달아준다.

 

아침을 들고 나면 죽음에 대한 연구나 강연준비를 한다. 오후에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카메라를 들고 인근 숲으로 향해 산책하며 사진을 찍는다. 자연에 대한 사진 찍기는 그에게 탐구요, 몰두요 명상이다.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카페로 들어가보면 이런저런 상담 내용들이 올라와 있다. 답변도 보낸다. 자살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힘을 북돋워주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여윈 이에겐 죽음 이후에 사랑을 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정교수는 은퇴 후 암과 싸우면서 오히려 더 마음이 맑아지고 편안해졌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고 공부하면서 이생에서의 삶에 대해 더욱 의욕과 희망을 느끼고 산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에도 큰 변화가 옵니다. 재물이나 출세, 자식의 성적에 연연하는 지상의 시선을 거두고 삶의 진정한 의미로 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죠.”

 

함영준·마음건강 길(mindgil.com) 대표     조선일보     입력 202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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