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의 맛]
먹고 살기 위해 배달, 배달하다 장애까지
그를 지탱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중국집 하나로 시작, 전국에 체인점 140개
보배반점 김진혁 사장 인터뷰 #사장의 맛
지난 10일 오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중국집 ‘보배반점’ 야탑점 앞. 머리를 깔끔하게 민 남성이 오른쪽 다리를 쩔뚝 거리며 다가왔다. 이날 만나기로 한 이곳의 사장 김진혁(41)씨였다. 보배반점 야탑점은 월 매출 2억5000만원인 동네 1등 중국집이다. 2014년 서울 성북구에 1호점을 시작으로 이달 기준 전국에 140개 매장이 있다.
부모 없는 아이로 자라 서른이 되기 전 사고로 장애까지 얻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 그를 먹여 키워준 곳에서 그는 장년의 삶도 일궜다. 중국집이다.
◇”수돗물로 배 채워”...악착 같이 살아남다
–중국집과 인연이 깊다고요?
“저는 부모님 얼굴도 모르고 자랐어요. 5살 때부터 가족이 아닌 ‘이모님’이 맡아줬는데, 사정이 좋지 않아 말 그대로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21살 때 이모님이 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도망가듯 입대했는데, 제대하고 보니 갈 곳이 없더라구요. 중국집에서 배달 하면서, 밤에는 매장 테이블을 붙여 잠을 잤습니다.”
–어릴 적 꿈은 뭐였나요?
“학생 때는 좋은 대학을 가는 게 꿈이었어요. 수능에서 경희대 경영학과를 갈 성적이 나왔는데 당시 등록금이 350만원이었어요. 저에게는 터무니 없는 돈이었죠. 포기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전남대 법대에 간 친구 아버지가 전남대 경영학과를 가라며 등록금 100만원을 내주셨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회계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학기 중에 마트에서 배달을 하고, 방학 때는 고기잡이 배를 탔어요. 그런데 그렇게는 공부를 못하겠더라구요. 돈부터 모을 생각으로 휴학하고 중국집에 취직했어요.”
–휴학 이후의 일과는 어땠나요?
“한 달에 2번 쉬는 날을 빼고 매일 4시간 잤어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조선일보를 200부씩 배달하고, 낮에는 13시간씩 중국집에서 음식 배달을 했죠. 월급 180만원을 몽땅 모아서 2년에 4000만원을 모았어요.”
–돈도 모았겠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나요?
“아뇨. 오히려 돈이 생기니까, 학교로 못 돌아가겠더라고요. 큰 돈을 벌겠다는 각오로 중국 광저우로 갔어요. 중국산 옷을 동대문에 파는 의류 도매업을 했습니다. 2년 반 동안 1억5000만원까지 불렸지만, 사업 내내 사고의 연속이었어요. 동업자가 돈만 받고 잠적하거나, 받아 보니 불량품이 무더기로 나오는 거죠. 게다가 온라인 판매가 활성화되면서 공장들이 직접 수출을 하면서 가격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어요. 결국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중국집으로 온 거죠.”
◇교통 사고로 얻은 장애...”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다시 중국집으로 돌아왔나요?
“제가 가장 잘 아는 일이었어요. 창업을 목표로 배달 뿐만 아니라, 주방에서 직접 칼질을 하고, 면을 뽑고, 고기를 튀겼습니다. 그러다 식자재 납품 업체에 들어가서 잘 되는 거래처(중국집)들의 상권, 운영 방식부터 그릇의 모양까지 메모하면서 분석했어요. 이때도 종잣돈을 불리기 위해 투잡(Two-Job)을 뛰었습니다.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납품,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배달을 했죠.”
–정말 쉼 없이 일했네요.
“네. ‘30살 창업’을 목표로 악착 같이 일했는데, 30살을 한 달 앞둔 29살 12월에 야간 배달을 하다 음주운전 차에 치였어요. 의사 선생님이 “다리를 잘라야 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경희대병원에서 큰 수술을 3번 했어요. 화장실도 혼자 못 가서 병실에서 똥, 오줌을 처리해야 했어요. 모은 돈도 대부분 까먹었죠.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싶어서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했어요.”
-정말 운명을 탓하는 심정이었겠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반복될까,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식당에서 만나 같이 고생해온 아내에게 모아둔 돈으로 새출발 하라는 말까지 했어요. 그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했죠. 가스통, 신문배달하며 몸뚱이로 먹고 살았는데, 걷지도 못하는 몸, ‘내 인생은 끝났다’ 싶었죠.”
–어떻게 다시 일어서게 됐습니까.
“4~5개월 폐인처럼 살다가, 휠체어를 탈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어요. 조금씩 정신이 차려지더라구요. 역경을 극복한 사람들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전신화상을 입고도 포기하지 않은 이지선 교수님 같은 분의 스토리를 보면서 ‘나도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죠. 그때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을 달고 살았어요. 내가 고아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멋지네요. 창업은 언제 했어요?
“31살 때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황궁’이라는 중국집을 인수했어요. 인수 당시 직원이 3명이었는데, 배달 위주로 장사를 키워서 직원을 17명까지 늘렸어요. 오토바이, 직원 유니폼, 배달 책자까지 싹 바꿔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죠. 월 매출 5000만원 정도 되던 곳을 1억2000만원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그 뒤로 서울 성북구에 보배반점 1호점을 냈고, 당시 월 3000만원 하던 매출이 지금은 1억8000만원 정도 나옵니다.”
2편에는 2019년까지 성북구에서 중국집 3개를 운영했던 김진혁 사장이 2년 반만에 매장 100개 넘는 프랜차이즈 대표가 된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채제우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3.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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