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세욱의 호모 코쿠엔스] 전남 곡성 ‘미실란’
호모 코쿠엔스(Homo coquens)는 요리하는 인간입니다. 요리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무이합니다. 20만년 전부터 불을 사용해 요리한 음식을 다른 종과 나눠 먹으면서 인간의 몸과 영혼에는 대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불로 요리하기’가 호모속(屬)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주장하는 ‘요리 가설’ 을 지지하는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요리를 통해 우리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는 아름다운 이들을 만나 음식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봄꽃은 서론이 없다. 피는 봄꽃이 경이로운 까닭도 지는 봄꽃이 시름겨운 까닭도 서론이 없기 때문일 터이다. 밥 짓는 농부과학자 이동현의 미실란이 자리 잡은 곳은 서론도 없이 피고 지고 또 피는 봄꽃이 지천인 곡성 섬진강 마을이다. 내 고향과도 지척이다.
서울대에서 석사학위를, 일본 규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미생물학자 이동현이 폐교로 방치되고 있던 곡성동초등학교에 ‘미실란’을 설립한 해는 2006년이다. 미실란은 발아 현미를 연구하고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한 곡물을 가공하는 농업회사법인으로 성장해갔다. 2015년 대산농촌문화상, 2019년 UN식량농업기구 모범농민 표창도 받았다. 하지만 인구가 2만 7000명인 곡성에서조차 미실란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5년 전쯤 처음 찾았을 때 적막하던 미실란은 곡성과 더불어 소멸하는 듯 보였다.
KAIST를 끝으로 10여 년의 교수 생활을 정리하고 전업 작가로 글을 쓰던 소설가 김탁환도 비슷한 시기에 미실란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으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2020)에는 도시소설가가 농부과학자를 만나 두 번째 인생 발아의 시간을 함께 보낸 이야기를 담았고, ‘섬진강 일기’(2022)에는 농사를 짓고 글을 쓰면서 제철 채소와 제철 과일을 먹듯이 먹은 제철 마음을 옮겼다.
장편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애’의 주인공을 따라 ‘달문의 마음’으로 이름 붙인 2층 집필실을 방문할 때면 형은 옛 교실 통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등지고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맞아준다. 대학 시절 현란한 필력으로 나를 포함한 숱한 문청들을 절망에 빠뜨렸던 형을 고향 근처에서 다시 만나는 감회는 매번 새롭다.
이렇게 도시소설가와 농부과학자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지금 미실란에는 계절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몰려든다. 철 따라 운영되는 생태체험에 참가하려는 초등학생부터 교무실 자리를 새로 단장한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 매달 열리는 북토크나 들판음악회를 찾는 중장년들로 운동장에 주차할 곳을 찾기도 쉽지 않다.
적막하던 밥카페 ‘반(飯)하다’에도 활기가 넘친다. 대표 메뉴는 변함없이 ‘발아오색낭만세트(1인 1만5000원)’이다. 토란흑미쌀수프를 시작으로 이 대표의 고향인 고흥 유자로 맛을 더한 누룽지샐러드, 삼색궁중떡볶이, 흑미두부지짐, 유기농된장국, 각종 찬이 미실란의 자랑 유기농 오색발아현미밥과 함께 나온다. 발아오색낭만세트는 김치까지도 젓갈 대신 과일로 맛을 낸 채식 메뉴이다.
멜론돈가스(멜론 소스로 맛을 낸 ‘겉바속촉’의 생등심 돈가스, 1만2000원), 토란표고탕수(토란과 표고를 천연소스로 조리한 채식 탕수, 2만원), 연잎간장수육(연잎과 한방재료로 삶은 후 수제간장소스를 곁들인 수육, 2~3만원) 같은 단품도 곁들일 수 있다. 장선 들녘이 길러낸 발아현미와 제철 채소, 곡성 특산인 토란과 멜론으로 요리한 정갈한 음식을 음미하자면 철 따라 변해가는 들녘처럼 제철 마음이 절로 깃든다.
음식에는 물질, 욕망, 영혼의 세 차원이 있고, 우리는 음식에 대해 영양주의, 쾌락주의, 영성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다양한 태도를 지닌다. 음식은 내가 세계를 인식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매개이다. “당신은 당신이 먹은 음식이다”라는 격언이나, 미식가로도 유명한 프랑스 법률가 브리야사바랭의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의 “먹고 마시는 음식은 그 자체로 ‘제2의 자아’이다”라는 말의 함의도 그러하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넘쳐나는 영양과 쾌락의 수단으로서의 음식이 아니라 거룩한 음식도 있다는 사실을 미실란과 곡성 들판은 말없이 일러준다.
‘섬진강 일기’에서 4월의 별명은 ‘흙과 사귀고 싹을 틔우는 달’이다. 제철 마음을 담은 제철 음식을 가까이하기 좋은 달이다.
양세욱 인제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조선일보 입력 2023.04.08.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투성이로 두만강 넘었던 소년, 36세에 미국 박사가 되다 (0) | 2023.04.16 |
---|---|
이인규 “盧 돕지 않던 문재인·좌파 언론… 서거 후 喪主 코스프레” (0) | 2023.04.10 |
‘이건희 주치의’가 의사인생 마무리한 곳은 고향 보건소였다 (0) | 2023.04.08 |
제주살이하며 죽음 이후 세계 연구하는 의사 (0) | 2023.04.04 |
“일단 목표는∼ 천하장사 다섯번” (0) | 2023.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