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미 물리학계 이끄는
김영기 시카고대 석좌교수
미국 물리학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과학자 단체다. 정회원으로 등록된 연구자만 5만명이고, 리처드 파인만·엔리코 페르미 등 200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학회 소속 과학자들이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지금까지도 미국 중앙 권력에 대한 미 물리학회의 입김은 상당하다.
‘미국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 이상 물리학회의 위상도 변함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미 백악관에서 과학 정책을 세우거나 의회에서 법안을 만들 때면 가장 먼저 과학 자문을 하는 곳이 미 물리학회다. 뿌리 깊은 백인 남성 중심의 문화 탓에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 성향이 강한 단체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최근 한국 출신 여성 과학자가 수장으로 선출돼 큰 화제를 모았다. 주인공은 지난해 9월 미 물리학회 회장단 선거에서 차기 회장에 당선된 김영기(60)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 한국인이 미 물리학회장에 뽑힌 것은 1899년 학회 설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아시아인으론 1975년 중국의 우젠슝에 이어 두 번째다.
김 교수는 국내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선 현재 가장 영향력이 큰 물리학자로 손꼽힌다. 세계 최고 권위의 입자물리연구소인 미국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 부소장(2006~2013년)을 역임했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만 29명이 나온 시카고대에서 2016년부터 물리학과장을 맡고 있다. 참여 인원만 수백 명 단위의 대규모 국제 연구 프로젝트도 여러 차례 이끌었다. 뜨거운 온도 속에서 원자(原子)를 수만 번 충돌시켜 새로운 입자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는 아시아 여성 과학자로서 무수한 벽을 부숴가며 기초과학 최강국 미국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성장했다.
김 교수는 지난해 미 물리학회장직뿐 아니라 3만명의 과학자가 활동 중인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 회장에도 당선됐다. 오는 7월 임기가 시작되면 미 물리학회까지 합쳐 8만명이 넘는 글로벌 과학자들을 대표하게 된다. 최근 한미 과학자 교류 사업 추진을 위해 모국을 찾은 김 교수를 서울에서 만났다.
120년 美 물리학회 첫 한국인 수장
-한국인 그리고 여성으로 어떻게 미국 물리학회장이 됐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유리 천장을 깨느라 남들보다 3, 4배 노력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성격상) 차별 같은 걸 잘 느끼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좋지 않은 건 새겨듣지 않고 훌훌 털어버린다. 키 155㎝의 조그만 아시아 여성이 미국 대학 강단에 서니, 처음엔 아무도 교수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게 나를 단 한 번에 기억하게 하는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실제 학회장 취임은 2년 뒤에 한다.
“한국엔 내가 당장 물리학회장이 된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지금은 학회 부회장이고 실제 회장 취임은 2024년이다. 물리학회는 4명의 회장단이 단체를 이끌어가는데 1년씩 한 단계 위로 올라가면서 역할을 바꾼다.”
-왜 지도부가 4명인가.
“워낙 학회 업무가 방대하다보니 1명이 단체를 도맡기 어렵기 때문이다. 회장단에 들어온 첫해인 올해는 부회장, 내년엔 차기 회장(President-Elect), 2024년에는 회장(President), 2025년에는 전임 회장(Past President) 자격으로 총 4년간 미국 물리학회에서 최고 리더십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미 물리학회장은 어떤 자리인가.
“백악관 고위직, 미 상·하원 의원들을 만나 국가 과학 정책에 대한 자문에 응할 수 있다. 정부 기관의 연구비 지원 결정에도 관여한다. 미국에선 물리학회가 목소리를 내면 미국 정부도 움직인다. 트럼프 정부 당시 백악관이 반이민 정책을 추진했는데 물리학회 차원에서 반대 성명을 냈고, 결과적으로 일부 규제가 완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학회장 선거에 출마한 계기는.
“지난해 전임 회장이 내게 선거 출마를 권유했다. 회장이 ‘김 교수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리더십이 있다고 소문났다’며 나를 후보로 추천했다. 처음엔 학교 일로 바빠서 고사했다. 하지만 백인 남성이 주류인 학회에서 한국인 첫 회장이 탄생하는 것은 나 개인의 성취뿐 아니라 한국인 여성 과학자가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기회가 주어졌다면 도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정말 미국에서 차별을 받은 적이 없었나.
“차별이라기보다 아시아 여성인 이유로 초기에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고 할까. 과학이 서양의 학문이다 보니 동양 여성에 대해서는 낯설어한다. 처음 미국에서 교수로 부임해 강의하러 교실에 들어갔을 땐 학생들이 나를 조교라고 생각했다. 국제 연구 모임에서도 가끔 교수의 비서로 오해받기도 했다. 아시아 출신, 여성이기 때문에 생기는 인식의 장벽을 넘기 어려운 점은 있었다.”
세계 입자 물리 연구 이끄는 ‘충돌의 여왕’
김 교수는 미 물리학회장에 당선되기 이전에 이미 물리학계에서 입자물리학 분야 권위자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지난 2004년엔 미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의 양성자-반양성자 충돌 실험에서 원자보다 작은 입자인 소립자 질량의 근원을 밝히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 업적으로 미 물리학회 펠로에 선정되는 등 스타 과학자로 발돋움했다. 미국 학계에서 김 교수는 ‘충돌의 여왕’(Collision Queen)으로 통한다.
-입자물리학은 무엇을 다루나.
“장난감 블록인 레고처럼 지구와 우주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기본 알맹이가 무엇인지를 찾는다. 물리학은 연구 대상의 크기에 따라 별을 다루는 천체 물리부터 고체·유체 물리, 원자 물리 등으로 나뉘는데 입자물리학은 원자핵·전자보다 작은 미세 입자의 성질을 다룬다. 마치 양파를 까듯 원자의 층을 하나씩 벗겨내 그 안을 이루는 입자를 최소 단위가 될 때까지 찾는 것이다.”
-일반인에겐 너무 생소하다.
“인터넷, 레이저, 위성항법장치(GPS), 많은 의학 진단 및 치료장치가 입자물리학 연구에서 파생돼 발명됐다. 작은 입자에 에너지를 가해 빛의 속도로 가속한 뒤 충돌시키면 우주 초창기 환경을 구현할 수 있는데 우주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알게 되면 우주의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다. 이런 자연의 법칙을 알면 우리 사회에도 언젠가 큰 공헌이 될 거다. 양자역학도 100년 전엔 어디에 쓰는지 모르는 분야였지만 최근 세계적으로 연구가 활발한 학문이 됐다.”
-’충돌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는 어떻게 생겼나.
“2000년 과학 잡지 디스커버에서 ‘21세기 세계 과학을 이끌 20인의 과학자’에 선정될 당시 매체에서 붙인 수식어였다. 입자물리학이라는 게 쿼크와 같은 작은 입자를 서로 빠르게 부딪치게 만들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보니 그런 표현을 붙여준 것 같다.” (당시 김 교수와 함께 20인 과학자에 뽑힌 사람 중 안드레아 게즈 UCLA 교수는 지난 2020년 블랙홀 연구의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앞으로 더 작은 입자가 발견될까.
“19세기 말까지 과학자들은 가장 작은 알맹이가 원자라 생각했다. 이후 그 안에서 전자와 핵이 발견됐고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진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이보다 작은 쿼크라는 입자의 존재도 밝혀냈다. 현미경처럼 원자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입자 가속기라는 대형 연구 설비가 있는데 더 뛰어난 가속기가 개발되면 쿼크보다 작은 입자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낼 수 있다.”
-지금 입자물리의 주요 연구 주제는 무엇인가.
“아직까지 질량의 근원을 확실하게 모른다. 원자를 이루는 전자의 질량은 왜 이렇게 작은지도 모른다. 우주를 이루는 암흑물질을 찾는 것도 큰 숙제다.”
-단체 리더로서 구성원 간 ‘충돌’도 자주 겪었을 텐데.
“한국에서 충돌이라고 하면 갈등과 같은 부정적인 개념을 떠올리지만 과학 연구든, 사회 갈등이든 충돌을 해야 해결되는 게 많다. 연구 과정에서 모두가 같은 의견을 내면 수만명이 모여봤자 발전이 없다. 배운 게 다르고, 남녀가 다르고, 출신 지역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면 의견이 갈리고 갈등이 생긴다. 입자가 충돌해 새로운 입자를 만들어내듯 생각이 다른 것에 머물지 않고 서로 충돌해야 설루션(해결책)이 나온다. 충돌은 갈등이 아니라 만남이라 생각한다.”
좌우명으로 남은 아버지의 붓글씨 선물
경북 경산 출신인 김영기 교수는 학창 시절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친구들로부터 ‘수학의 여왕’이라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물리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인 고(故) 이휘소 박사의 제자 강주상 교수의 지도로 고려대에서 물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3년 시카고대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내 과학자 인생은 경산 출신 시골 소녀가 서울로 유학 가 미국, 유럽 입자 연구소를 오가는 긴 여정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원래 수학자가 꿈이었다던데.
“대학 입학 후 첫 1년은 탈춤 동아리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었다. 이과대 야구단에서 활동하며 뒤풀이를 꼭 쫓아다녔다. 야구부엔 물리학과 선배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선배들의 권유로 2학년에 올라가면서 물리 전공을 선택했다.”
-물리학에 금방 적응했나.
“고등학교 때까지 수학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수학이 바탕이 되는 물리도 곧잘 했다. 수학이 정확성을 추구하면서도 자연과 동떨어졌다면, 물리는 자연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가 합쳐진 게 좋았다.”
-어린 시절에 어떤 아이였나.
“아들(장남) 1명과 딸 다섯인 집의 다섯째였다. 부모님이 언니, 오빠와 막냇동생을 주로 챙겨 나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보니 나는 무엇을 하든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벼루에 먹을 갈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몸이 안 좋으셔서 주로 집에만 계셨는데 붓글씨를 좋아하셨다. 집에서 기르던 박에 붓으로 좋은 글귀를 써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셨다. 내가 2006년 페르미연구소 부소장이 됐을 때는 ‘敬天愛人'(경천애인·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을 붓글씨로 써서 선물로 주셨다.”
-어떤 뜻에서 경천애인을 써주신 걸까.
“하늘의 이치를 따른다는 의미인데 이치는 곧 자연의 법칙을 말하니 과학자인 나에게 딱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좌우명으로 삼았다. 아버지가 11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나에게 왜 이 한자를 써주셨는지 끝내 여쭤보지 못했다. 만날 수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미국인 남편(시드니 네이글)이 같은 대학, 같은 과 교수다.
“남편이 14살 연상인데 내가 버클리대 교수인 시절 지인 모임에서 만나 눈이 맞았다. 말과 행동이 진실하고 따뜻했다. 결혼을 조금 늦은 나이인 40대 초반에 해서 자녀는 없다.”
-물리학과장이니, 남편의 직장 상사인 셈이다.
“남편이 전공(고체물리학)은 나와 다르지만 같은 단과에 있다. 간혹 남들은 내가 남편의 보스라고 해서 불편하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학과 일을 의논할 수 있어 좋다. 다만 아내가 학과장이기 때문에 공정성을 위해 다른 과 교수들과 달리 남편만 연봉 협상을 내가 아닌 자연과학대 학장이 대신 한다(웃음).”
-연구 단체·기관의 수장으로 자주 선출된 비결은 무엇인가.
“한국식 리더십이랄까. 가끔 외국 학생·연구원들 모아놓고 한국의 살풀이춤, 부채춤을 보여준다. 시카고대에서 내가 지도하는 연구원이나 학생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연구실에서 돌잔치도 해준다. 준비물은 한국과 조금 다른데 떡 대신 케이크에 초를 꽂고 상 위에 주판, 기타, 달러 지폐를 올려둔다. 코로나 때문에 2년 넘게 못하다가 올 들어 다시 시작했다. 코로나 때 태어났던 아이들이다 보니 두세 살이 돼서 돌잔치를 하고 있다(웃음).”
-미국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
“돌잔치를 한 번도 안 해봤기 때문에 너무 좋아한다. 연말에 ‘Forget the year party’라는 제목의 망년회 파티도 내가 시작했는데 시카고대 물리학과의 새로운 전통이 되고 있다. 학생들이 교수들 특징을 흉내내거나 교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유쾌한 콩트로 선보이는 시간이다. 과거 연구소에선 세미나를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져온 징을 쳐서 알렸는데 다들 소리가 은은하게 울린다며 좋아했다.”
“한국인, 공부는 잘하지만 출세 못한다”
김 교수는 최근 각종 강연과 인터뷰에서 “미국 과학계에서 아시아인, 특히 한국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적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인은 미국 명문대 진학률도 높고 성적도 뛰어나지만 정작 과학계에서 톱의 위치에 오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한국인의 미국 주류 사회 진출은 어떤가.
“한국인이 미국에서 리더십으로 인정받기엔 아직 부족하다. 나와 같은 사람이 한두 명 나와서 될 게 아니라 계속 꾸준히 (주류에) 진출해야 한다. ‘한국인은 소극적’이라는 인식을 깨고, ‘한국 사람도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미국 과학기술계 요직에 한국인이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언어의 장벽도 있겠지만, 한국 특유의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 문화가 강한 탓도 있다. 윗사람을 공경해야 한다는 문화 때문에 조직에서 이견을 내지 못한다. 미국에서도 한국인들에 대해선 ‘지시하는 건 곧잘 하는데 남을 리드하는 건 못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미국에선 회의 자리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면 ‘저 사람은 본인 생각이 없다’고 판단해서 큰 권한을 주지 않는다.”
-한국은 과학 인기가 시들하다. 미국은 어떤가.
“시카고대에서 물리학과에 지망하는 학생이 최근 10년간 2배 늘었다. 기본적으로 과학에 대한 인기가 높다. 미국에선 물리학이라고 하면 꼭 연구자나 교수가 아니더라도 기업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도 강하다. 물리학은 새로운 환경에 닥쳐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시시각각 대내외 환경이 변하는 시대에선 기업을 새로운 방향으로 바꿀 줄 아는 인재 수요가 늘고 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이 이공계 경쟁력을 약화한다고 한다.
“나도 한국의 과학 교육에 대해 걱정이 많다. 한국에 있는 조카를 보면 나 때보다 교육 방식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입시가 중요하다보니 주입식이 너무 많다. 미국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그룹을 짜서 스스로 과제를 해결하게 하고 수평적인 대화 문화가 강해서 과학 연구에서도 강점을 보이는 것 같다.”
-미국 생활을 한 지 40년 됐다.
“수십 년 동안 연구 발표도 영어로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한국말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게 어색하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만 남아있는 것 같다. 아직도 건전지는 가끔 나도 모르게 ‘빠떼리’라고 발음할 때가 있다(웃음).”
-미국도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 문제가 심각한가?
“미국에도 일, 육아 때문에 중도에 커리어를 그만두는 여성 과학자들이 없지 않다. 한국 같은 아시아 국가에선 더 심하겠지만. 그래도 미국은 여성 인력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해 경력 단절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여성 과학 꿈나무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한국 사회는 여성들에게 과학자가 되라고 하는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여성들이 주변 지지를 받으며 과학을 택하는 건 지금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더 많이 아끼고 격려해야 한다. 나도 수십 년 연구 활동을 하고 있지만 큰 성취를 이루는 건 아주 가끔 있는 일이다. 작은 일에도 기뻐하는 행복한 과학자를 꿈꿨으면 좋겠다.”
최인준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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