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무소유' 법정 스님 다비식…제자가 외친 한마디, 그 깊은 이치

해암도 2022. 4. 13. 08:15

 [백성호의 한줄명상]

 

“상처의 존재 이유는 치유다.”

 

#풍경1

독일 출신의 안젤름 그륀 신부는
가톨릭 수도자이자 영성가로 유명합니다.
저술한 책만 약 100권에 달합니다.

오래 전에 그를 서울 명동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처음 마주했을 때,
눈에 확 들어온 것은
그륀 신부의 ‘눈’이었습니다.

독일 가톨릭의 베디딕도 수도회 소속인 안젤름 그륀 신부는 저명한 영성가다. [중앙포토]

 

아주 맑았습니다.
아무런 설명이나 소개가 없어도
아, 이 사람은 수도자구나.
그걸 알 수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영성가에게
저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인간의 상처와 치유,
거기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풀고 싶어하는
삶의 숙제이니까요.

 

#풍경2

투명한 눈망울의 그륀 신부는
이렇게 입을 뗐습니다.

“나 역시 상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느 호숫가에서 묵상하다가
그륀 신부는 오히려
그 상처에 대한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안젤름 그륀 신부는 어느 호숫가에서 묵상하다가 상처에 대한 고마움을 절감했다고 했다. [중앙포토]

 

상처는 아픔이고 고통이다,
상처가 왜 고마움이 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온전함에 대한 동경이 있다.
   치유에 대한 열망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상처 때문임을
   깨닫게 됐다.”

우리는 갈망합니다.
상처 없는 삶,
아픔 없는 삶,
결핍이 없는 삶을 소망합니다.

그륀 신부는 그런 갈망의 뿌리가
다름 아닌 ‘상처’라고
답했습니다.

이말 끝에 그륀 신부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상처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요?”

글쎄요,
상처는 왜 존재하는 걸까요.
다들 피하고 싶어하는 게 상처인데,
그에게도 존재 이유가 있나요.

그륀 신부는
“상처는 치유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는 상처가 있기에 인간은 온전함을 동경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우리는 따로따로라고 생각합니다.
밥 따로, 국 따로인
따로국밥처럼 말입니다.
상처 따로, 치유 따로 식으로,
둘로 쪼개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륀 신부는
상처야말로 치유를 위한
강력한 엔진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상처가 있기에
치유도 있다는 뜻입니다.

 

#풍경3

법정 스님이 타계했을 때,
전남 순천의 송광사 근처 숲에서
다비식이 열렸습니다.

포개진 장작더미 안으로
불이 들어갈 때
법정 스님의 제자 스님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화! 중! 생! 연!”

전남 순천의 송광사 근처 숲에서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열리고 있다. [중앙포토]

 

화중생연(火中生蓮),
글자 그대로
불꽃 속에서 연꽃이 핀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이치가 담겨 있습니다.

그륀 신부의 메시지로 치자면
불꽃은 상처에,
연꽃은 치유에 해당합니다.

 

불교에서 연꽃은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화중생연의 화(火)는
번뇌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이 피어나는 장소는
천상의 낙원이 아닙니다.
결핍이 없는
완전함의 언덕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꽃이 피는 곳은
다름 아닌 번뇌입니다.

번뇌를 밀어내고
번뇌를 털어내서
깨달음이 오는 게 아닙니다.

불꽃 속에
이미 연꽃이 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법정 스님은 봄과 가을에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대중을 향해 법문을 내놓았다. [중앙포토]

 

이런 우주의 이치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왜냐고요?

우리가 치유의 씨앗을
따로 찾지 않아도 되니까요.
상처의 씨앗 속에
이미 치유의 씨앗이 숨어 있다고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꾸 겁먹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가 찾아 헤매던
인생의 답이,
문제 속에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호의 한줄명상’은 매주 수요일 연재〉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2.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