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전설의 해커가 던진 도전장… "테슬라 같은 혁신 화장품 개발"

해암도 2022. 3. 2. 06:42

 [스타트업 리포트]

 

[인터뷰] 노정석 비팩토리 대표
과학계 진리 뒤집은 물과 기름이 섞이는 모아시스 기술 이용
세상에 없던 혁신적 보습제와 지방 분해 크림 개발

 

1996년 4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국내 최초의 해킹 사건이 일어났다. 카이스트 해커들이 포항공대 전산실을 해킹해 쑥대밭을 만든 것이다. 국내 최고 두뇌 자리를 놓고 학생들의 자존심 싸움으로 시작된 사건은 포항공대가 물리적 피해를 입으며 주동자가 구속돼 '해커 전쟁'으로 널리 알려졌다. 해커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에 벌어진 이 사건은 나중에 소설 '사과전쟁'의 소재가 됐다.

이때 주목을 받은 인물이 카이스트 산업경영학과 학생으로 불과 스무 살 나이에 해킹 동아리 쿠스 회장을 지낸 노정석(46)이다. 해킹 공격 선봉에 섰던 그는 포항공대의 전산업무를 마비시킨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지도교수께서 나중에 큰일을 할 테니 구제해주자고 하셔서 간신히 제적을 면했어요."

교수의 판단은 옳았다. 이후 국내 최고의 전산 보안전문가로 대접받으며 유명 스타가 된 그는 보안업체와 스타트업들을 잇따라 창업하며 벤처의 전설이 됐다. 그런 그가 최근 혁신 기술을 이용한 독특한 화장품 개발로 새로운 도전장을 던졌다. 그것도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는 과학계의 진리를 뒤집는 획기적 제품을 들고 나왔다. 신생기업(스타트업) 비팩토리의 노정석 대표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나 새로운 도전담을 들었다.

전설의 해커였던 노정석 비팩토리 대표가 획기적 기술로 개발한 보습제 '5나노 앰플'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구글이 주목한 벤처의 전설



노 대표는 해커 전쟁 이야기를 꺼내자 "요즘 누가 과거사에 관심 갖겠냐"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해킹 전쟁은 오늘날의 그를 만든 빼놓을 수 없는 역사다.

해킹 전쟁 이후 그는 보안업체 인젠과 젠턴스를 잇따라 설립해 운영하다가 인젠을 증시에 상장하고 SK텔레콤에 들어갔다. "인젠을 상장해 많은 돈을 벌었죠." 그는 SK텔레콤에서 당시 '천재 소녀'로 꼽히던 카이스트 출신의 윤송이 상무와 함께 '1미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윤 상무는 훗날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의 부인이 됐다.

그는 SK텔레콤을 나와 세 번째로 창업한 태터앤미디어 덕분에 다시 유명해졌다. 2008년 구글이 블로그 서비스업체였던 태터앤미디어를 수백억 원을 주고 아시아 업체 중 최초로 인수한 것이다. "구글은 다음(현 카카오), 첫눈 등 여러 회사를 사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자 태터앤미디어를 인수했죠. 구글은 당시 국내 검색 점유율이 1.5%에 불과해 네이버 등 국내 포털과 대항하기 위해 블로그 등 다양한 서비스가 필요했죠."

그렇게 2년간 구글과 함께 일한 노 대표는 앱, 게임 등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을 차렸고, 2012년 공유 사무실업체로 유명한 패스트트랙 아시아를 설립했다. 이후 가상현실(VR) 개발업체를 거쳐 2016년 지금의 비팩토리를 창업했다.

물과 기름이 섞이는 획기적 기술 개발



노 대표는 비팩토리를 "미래 화장품을 만드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말하는 미래 화장품이란 "기존에 없던 재료를 사용해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만드는 화장품"이다.

이를 위해 노 대표는 김철환(53) 스카이테라퓨틱스 대표가 개발한 독특한 원료를 사용한다. 두 사람은 2014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한중엔젤투자자 회의 때 처음 만났다. 카이스트 화학공학 박사 출신인 김 대표는 2007년 이미지앤머터리얼스라는 회사를 만들어 전자종이를 개발한 뒤 LG디스플레이에 매각했다. 이후 2019년 제약기술 개발업체 스카이테라퓨틱스를 창업해 세상에 없던 '모아시스'라는 획기적인 특허 기술을 개발했다.

인터뷰에 동석한 김 대표는 모아시스를 "물과 기름이 섞이는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뒤엎은 이 기술은 분자 구조를 바꿔 물과 기름이 결합하도록 만드는 획기적 기술이다. 이렇게 결합된 분자가 일정 조건을 통과하면 다시 헤어진다.

김 대표가 이를 보여주기 위해 투명 용기에 담아온 액체를 흔들자 갈라져 있던 수분과 유분 성분이 하나로 섞였다. "피부는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기름막으로 세포를 보호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삼투압 현상 때문에 물이 피부에 들어갈 때마다 엄청 부풀어오르죠. 그렇다 보니 기름막 때문에 세포를 촉촉하게 해주는 수분이 피부에 공급이 안돼 늙게 되죠. 노화를 막으려면 피부 세포에 수분을 공급해 줘야 해요."

그래서 두 대표는 시중에 나온 노화방지용 보습제들이 제 역할을 못한다고 주장한다. "기존 보습제들은 피부의 기름막을 뚫지 못해 0.1%도 세포에 스며들지 않아요. 사람들은 이를 몰라서 피부 겉에 묻었다가 금방 날아가는 보습제를 사용하고 있어요."

반면 김 대표에 따르면 모아시스 기술은 분자구조 배열을 바꿔 수분과 화장품 원료가 함께 녹아서 피부의 기름막을 통과한 뒤 세포에 스며든다. "피부 보습과 콜라겐 형성에 영향을 주는 히알루론산이라는 물질의 분자구조가 바뀌며 5나노 크기로 줄어 세포 안에 들어가죠."

김 대표는 이렇게 개발한 화장품 원료인 '하이알차저'를 노 대표에게 공급한다. "하이알차저에 들어 있는 히알루론산이 피부 기름막을 통과해 세포 안에 들어간 뒤 수분이 날아가지 않도록 잡아 줘요. 히알루론산이 피부에 충분해야 콜라겐 형성이 잘 돼서 탱탱한 피부를 유지할 수 있어요. 이게 노화방지 방법입니다."

김철환 스카이테라퓨틱스 대표가 노 대표에게 공급하는 모아시스 기술로 개발한 화장품 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용기를 흔들자 모아시스 기술 덕분에 물 위에 떠 있던 기름이 하나로 섞였다. 한지은 인턴기자

세상에 없던 보습제와 지방분해제 개발



노 대표는 이 원료를 공급받아 회사 내 스마트팩토리에서 로봇을 이용해 '킵'(Kyyb)이라는 상표의 보습제 '5나노 앰플'을 개발했다. "피부 기름막을 뚫고 들어간 히알루론산이 세포 안에 오래 머무는 진정한 보습제죠. 그동안 없던 혁신적인 제품입니다."

그는 시험 삼아 크라우드 펀딩인 와디즈를 통해 지난해 9월 선판매한 결과 1주일 만에 초도 물량 2,100개가 매진됐다. 와디즈 펀딩용 제품은 지난달 출시됐고, 이달 이후 자체 쇼핑몰을 통해 시중에 판매할 예정이다. "30㎖ 용량 한 병에 8만2,000원이니 비싼 편이죠. 하루 두 번 바르면 한 달가량 쓸 수 있어요. 비싼 데도 매진된 것은 소비자들이 똑똑해진 덕분입니다. 요즘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광고모델과 회사, 브랜드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성분과 효과를 꼼꼼히 따져요. 똑똑한 소비자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죠."

여기 그치지 않고 노 대표는 지방 턱을 없애는 지방 분해 크림도 내놓을 예정이다. 이 제품의 원료도 김 대표가 개발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살찌면 생기는 이중턱 제거를 위해 지방 세포막을 녹이는 디옥시콜린산(DCA) 주사를 수십 번 맞았어요. 이를 모아시스 기술을 이용해 주사 대신 바를 수 있는 화장품 원료로 만들었죠. 주사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어요."

노 대표는 DCA 성분이 들어간 지방 분해 크림을 상반기에 내놓을 예정이다. "DCA 성분이 지방 세포막을 파괴해 분해된 지방을 배설합니다."

노 대표가 개발한 5나노 앰플 보습제와 모아시스 기술이 적용된 원료들. 한지은 인턴기자

"이상한 사람 취급받아" 무모한 도전이 낳은 혁신



두 사람의 도전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모아시스 기술을 믿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무모한 도전이 혁신을 낳았다"고 강조한다. "물과 기름이 섞이는 기술을 개발했다니까 다들 이상하게 봤어요. 아모레퍼시픽에서 10년 이상 기술 고문을 지냈는데 그들도 모아시스 기술을 믿지 않았죠. 심지어 세계적 제약사인 화이자와 머크는 설명을 듣고 이 기술이 사실이면 회사를 사겠다고 했어요. 믿지 않은 거죠. 유일하게 믿어 준 사람이 노 대표였어요."

노 대표는 '모 아니면 도' 전략으로 밀어붙였다. "제품 개발을 하며 2년간 만난 사람들 모두 제품 개발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어요.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한 것이죠. 그런데 진짜 큰 게임은 다들 안 된다고 하는 곳에서 대박이 나요."

김 대표는 모아시스 기술을 이용해 시력을 잃어가는 황반변성 치료용 안약도 개발 중이다. "눈은 시신경 보호를 위해 약물을 통과시키지 못하게 막는 보호막이 있어요. 그래서 그동안 황반변성 치료는 직접 눈에 주사바늘을 찔러 약물을 주입했죠. 모아시스 기술을 이용하면 약물이 눈의 보호막을 통과할 수 있어요. 이렇게 개발한 안약을 국내 제약사와 함께 동물실험 중이에요."

카이스트 동문인 김철환(왼쪽) 스카이테라퓨틱스 대표와 노정석 비팩토리 대표는 "기술에 대한 믿음을 갖고 벌인 무모한 도전이 혁신을 낳았다"고 강조한다. 한지은 인턴기자

“테슬라처럼 화장품을 생산할 것”



노 대표가 겨냥하는 것은 기존 화장품의 통념을 뒤엎는 맞춤형 화장품 개발이다. "신체는 기후와 날씨, 건강상태에 따라 계속 달라져요. 그런데 동일한 재료의 화장품을 사용하는 게 맞을까요. 화장품도 사람의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게 미래 화장품이에요."

개인별로 다른 성분의 맞춤형 화장품은 연내 출시 예정이다. 이를 위해 제품을 자체 쇼핑몰에서만 팔고 이용 후기를 받아 AI가 내용 분석 후 개선 사항을 다음 주문 제품에 반영할 계획이다. "소비자들이 후기를 남기도록 현금 같은 포인트를 주는 등 보상책을 따로 마련할 생각입니다."

화장품 제조는 자체 개발한 '덱스터'라는 로봇이 맡는다. "로봇이 수많은 원료를 조합해 화장품을 만들어요. 원료는 스카이테라퓨틱스와 코스맥스에서 공급해요. 코스맥스는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해 지분도 갖고 있죠."

이를 위해 노 대표는 3년에 걸쳐 로봇과 AI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했다. 전체 직원 13명 가운데 80%가 소프트웨어 개발자다. 그래서 그는 화장품 회사가 아닌 소프트웨어 회사라고 강조한다. "세계적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를 좋아해 이를 참고했어요. 테슬라는 자동차에 소프트웨어를 붙인 게 아니라 아이패드에 바퀴를 붙였죠. 우리도 테슬라처럼 소프트웨어로 화장품을 개발해요."

국내외 투자업체들은 그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40억 원을 투자했다. "신세계 그룹의 벤처투자를 전담하는 시그나이트파트너스, 스톤브릿지벤처스, 코스맥스, 일본 AI업체 파크샤테크놀로지 등이 투자했어요."

두 사람은 예비 창업가들을 위해 시장을 먼저 이해하라고 조언했다. "절대 친구 따라 창업하면 안 돼요.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고 시장이 어떻게 변하는지 먼저 알아야 해요. 그만큼 시장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고 준비한 뒤 창업해도 늦지 않아요."

최연진 IT전문기자 (wolfpack@hankookilbo.com)    기사입력 2022.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