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의달이 만난 사람] <신양반사회>의 저자 인류학자 김은희 박사
“정치·경제·사회·역사관 등에서 한국 엘리트들의 사고방식이 조선 후기로 퇴행하고 있다. ‘성장’ 보다 ‘균등 분배’를 강조하고 ‘가진 자’를 적대시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을 외치는 정치인들이 늘어나는 게 증거이다. 이는 빈부 격차 없이, 모두 고르게 사는 농민사회를 지향한 조선시대 유교(儒敎) 경제관의 완벽한 부활이다.”
지난달 하순 <신양반사회>라는 저서를 낸 인류학자 김은희 박사가 내린 진단이다. 서울대 의류학과 75학번인 그는 1993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중앙대 겸임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2016년 여름부터는 소셜미디어(SNS) 소통을 늘리고 있다.
김 박사는 이 책에서 586운동권을 위시한 한국 진보 진영의 정서(情緖)와 세계관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해부했다. ‘586, 그들이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부제(副題)를 달았다. 기자는 김 박사와 6차례에 걸쳐 전화 및 서면 인터뷰를 했다.
◇“‘586운동권’은 한국의 새 특권층”
- 지금 대한민국이 ‘새로운 양반사회’로 향해간다고 보는가?
“그렇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멸망까지 300여년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통치 이념은 ‘덕치(德治)’였다. 의(義)와 예(禮)를 추구하는 군자가 자신의 이익을 좇는 소인을 교화(敎化)하며 지배하는 게 덕치이다. 1990년대 초 문민정부 출범으로 슬며시 되살아난 ‘덕치(德治)’의 망령이 21세기 한국 사회에 한층 강력해지고 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가 있나?
“2년 여전 터진 ‘조국 사태’와 ‘윤미향 사태’부터 그렇다. 양반들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구분한 것처럼, 조국과 윤미향 지지자들은 한국 사회의 구성원을 사회정의를 위해 살아온 운동권 ‘양반’들과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기득권·적폐 세력 ‘소인’으로 나눈다. 대의(大義)에 헌신해 온 운동가에게 법률적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고 이들은 강변한다. 도덕적 우월성이 법치(法治) 보다 훨씬 가치있고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김 박사는 이어서 말했다.
“자녀 명문대 입학을 위한 입시 부정과 시민 단체의 회계 부정은 시민 사회의 근간인 신뢰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다. 하지만 두 사람 지지자들은 ‘정의롭게’ 살아온 조국·윤미향의 범죄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정의로운’ 사회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통치하는 양반사회이지, 법치에 기반한 근대 시민 사회가 아니다.”
◇“6대손도 학비 지원...성리학 의리론 부활”
- 다른 사례가 있다면?
“문재인 정부가 5년 내내 펼쳐온 ‘친일(親日) 청산’이다. 양반사회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 의리론(義理論)에서 보면, 도덕적 가치는 목숨보다 중요하고 식민지 시대에서 ‘친일 협력’은 용서 못할 배신이다. 586운동권은 동일한 논리에서 자신의 이익, 즉 출세를 위해 산 친일 부역자들을 처단하고 정의로운 독립운동가들을 한국 사회의 중심으로 복권시키려 하고 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예우를 대폭 강화한 것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군자’의 후손은 대대손손(代代孫孫) 예우해줘야 한다는 양반 의식의 발로(發露)”라며 이렇게 말했다.
“고(故) 박원순 서울 시장은 독립운동 유공자의 4~5대손(代孫)까지 대학교 학비를 지원하는 ‘독립유공장학금’ 계획을 내놓았다. 2021년 서울시 ‘독립유공장학금’은 6대손까지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국가유공자법은 취업시험 당락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5%의 가산점(加算點)을 유공자 가족에게 지금도 부여하고 있다.”
- 이는 민주 사회의 평등 원칙을 깨는 것 아닌가?
“미국은 참전 군인을 포함한 국가 유공자에 대한 지원을 본인과 그의 배우자, 미성년 자녀 등 당대(當代) 핵가족으로 제한한다. 6.25 참전군경 유족에게 서울시가 지급하는 생활 지원 월(月) 수당은 독립유공자의 절반(10만원)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독립유공자 지원은, 모든 전사자(戰死者)들을 평등하게 추모하는 현대 국민국가 원칙에도 어긋난다.”
◇“‘현대 한국 사회의 양반은 누구인가’ 놓고 갈등”
- 친일 청산과 관련해 문재인 정부는 ‘독립운동 정신’ 계승을, 북한 정권은 ‘만주항일빨치산운동’을 강조하는데 서로 닮아 보인다.
“그렇다. 남한 운동권 정부와 북한 김정은 정권은 통치의 정통성을 ‘항일(抗日)투쟁’과 ‘정신(精神)’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촛불시위는 독립운동 정신의 계승’이라고 문 대통령은 말했다. 이 선언은 세습 정당화를 위해 만주항일빨치산운동을 신성(神聖)시하는 북한 정권을 빼닮았다. 김일성 가계를 정점으로 한 빨치산 후손들은 북한 사회의 ‘최고 특권층’이며, 김정은의 가장 열렬한 지지 집단이다.”
김 박사의 말이다.
“친일 청산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겪는 갈등의 중심에는 ‘누가 도덕적으로 우월한가’라는 물음이 있다. 이 질문은 ‘현대 한국 사회의 양반은 누구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남·북한의 정권은 공통적으로 ‘무장독립운동은 절대 선(善)이고, 친일은 절대 악(惡)’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개인의 생명·재산 경시하는 진보 세력”
- 이런 역사관은 근대적이고 타당한가?
“전쟁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생명을 버려서 끝까지 ‘항일’, 즉 ‘의(義)’를 실천하라고 요구하고 찬양하는 것은, 일본 군국주의의 가미카제 특공대를 찬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대 한국인들이 20세기초 항일무장투쟁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보 세력은 백성의 생명과 재산, 인권을 경시(輕視)한 조선 후기 척화(斥和)론·위정척사(衛正斥邪)파의 전(前)근대적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다.”
- 그들의 논리라면 586운동권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특권층’이 된다.
“그렇다. 이는 모든 시민은 가문과 경력, 평판에 상관없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근대사회의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새 특권층의 등장은 근대 시민의 기본권인 개인(個人)의 평등과 자유를 파괴하고, 전체주의(全體主義)화를 앞당긴다. 의사·경영인·엔지니어 같은 전문가들도 운동권 정부의 감독·감시 대상이다. 이들을 통제하지 않으면 이기주의와 빈부 격차 확대로 부정의(不正義)한 사회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김 박사의 말이다.
“근대 시민 사회의 특징은 반일(反日) 민족주의가 사회정의라고 생각하는 집단과 이에 반대하는 집단이 공존(共存)하는 것이다. 두 집단 중 어느 집단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측정할 방법이 없고 단지 생각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덕치를 떠받드는 도덕 사회는 사상의 자유와 사유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조국·윤미향 사태는, 한국 사회가 정치와 도덕이 분리되지 않은 양반 사회로 다시 돌아가느냐, 아니면 모든 시민이 도덕적으로 평등한 다원적 시민사회로 전진하느냐 하는 선택의 과제를 던져주었다.”
그는 “양반 체제라는 제도는 조선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지만 사회 ‘지도층’이 국민을 ‘지도’할만큼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한다는 문화적 정서는 한국 사회에 그대로 강건하게 살아있다”고 했다.
- 1인당 GDP 3만달러의 부국(富國)인 한국이 신양반사회가 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이익 공유제’, ‘사회적 기업 만들기’, 부동산 ‘투기’를 응징하는 ‘임대차 3법’ 등은 개인이 이익을 추구하고 부를 축적하는 일상적 행위까지 억압하는 반(反)자본주의적 정책이다. 여기에는 부의 균등한 분배를 최우선시하는 유교적 경제관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무능한 양반 리더십 물리친 박정희”
-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가?
“박정희의 집권이 ‘혁명’이든, ‘쿠데타’든 간에 그의 리더십은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혁명적’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잘 살아보세’와 ‘일하는 정부’ 같은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는 부(富)의 축적을 죄악시하고 상공인을 천대(賤待)한 조선시대 양반 리더십과 결별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주식회사 한국(Korea, Inc.)의 창업주이자 CEO’였다. 그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방해하며, 무능하고 게으른 양반의 이념인 유교 문화를 물리쳤다.”
- ‘경제 민주화론’은 어떤가?
“유교적 경제관은 민주화 운동을 벌인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증폭되어 왔다. 초대 문민 정부인 김영삼 대통령부터 ‘가진 것이 고통이 되게 하겠다’, ‘돈 있는 자가 권력까지 잡으면 안 된다’며 부자들을 때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6.10 민주항쟁 기념사에서 ‘평등한 경제는 우리가 반드시 성취해야 할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했다. 정의와 도덕, 균분(均分)을 핵심 가치로 한 조선후기 양반 사회와 무엇이 다른가?”
◇“‘士農工商' 되살린 문재인 정권”
김 박사는 “문(文) 정부 5년 내내 공무원 대우가 좋아지고 공시생들은 급증한 반면, 기업가 정신과 기업인들의 사기(士氣)는 크게 쇠락(衰落)했다. 이런 현상 역시 조선후기 ‘사농공상(士農工商)’ 관념이 어느 정권 때보다 강하게 투영되고 표출된 결과”라고 했다.
- 책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천명(天命)’과 ‘민심(民心)’을 내건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의 여론 정치를 그대로 잇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렇다. 한국 민주주의는 집단적 존재로서 국민이 법 위에 존재한다는 게 큰 특징이다. 이는 사람들이 ‘법’의 지배를 받으며 ‘국민’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는 대다수 민주주의 사회와 크게 다르다. 영국 언론인 마이클 브린이 지적했듯이, 한국 사회에서는 ‘국민들’이 분노하면, 공정한 법적 절차나 객관적인 증거, 변호와 인권 따위는 중요치 않게 된다. ‘국민’은 ‘야수(野獸)’로 변하고, 법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야수에 복종한다.”
◇“국민이 神인 한국은 新양반 사회”
그는 “브린의 표현처럼 한국은 ‘국민을 신(神)으로 모시는 사회’이다. 이는 간관(諫官)과 선비들을 통해 형성된 공론은 군왕도 복종해야 하는 ‘천명’이고 ‘민심’이라는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재판(再版)이다”고 했다.
- 서구 민주주의 국가는 어떤가?
“서구 시민사회에서 여론은 정치행위에서 참고할 요소이지 절대적인 명령이나 지침이 아니다. 미국에선 닉슨 대통령이 탄핵 소추돼 1972년 8월 사임하기 전까지 약 2년 동안 사실 관계에 대한 엄정한 수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촛불시위 시작지 몇 주 만에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됐고, 다시 석달 만에 헌법재판소가 만장일치로 탄핵을 인용했다. 국민의 즉흥적인 판단은 무조건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가?”
◇“‘비판적 사고’하는 개인들이 전체주의 독재 막아”
- 한국이 ‘신양반사회’로 계속 치닫는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법치 붕괴를 넘어 사상·언론 자유의 소멸,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심화될 것이다. 정의와 도덕을 독점한 소수 특권층이 전체를 다스리는 북한·중국·러시아 같은 독재(獨裁)적 전체주의가 한국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그러면 경제적 성취는 점차 사라지고, 국민들은 다시 가난해질 것이다.”
- 이런 흐름을 막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고도의 분업화가 이뤄진 산업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농촌 공동체의식에 기반한 신양반사회는 구(舊)시대 유물이자, 환상이다. 한국 사회가 시민 사회로 발전하려면,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능력을 가진 개인이 많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선거에서 한 사람이 한 표(票)의 투표권을 갖는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송의달 선임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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