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부 초대 장관(1990~1991)을 지낸 이어령(88)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26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고인의 유족은 “오늘 낮 12시 20분쯤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큰 통증 없이 돌아가셨다”며 “유언은 따로 남기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고인은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다. 노태우 정부 때 신설된 문화부 초대 장관이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문학평론)으로 활동했다.
이어령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내가 돌상에서 돌잡이로 책을 잡은 걸, 어머니는 두고두고 기뻐하셨다”라며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나는 책을 읽고 상상력을 키우는 인간이 됐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그는 서울대 국문학과 재학 중이던 1956년 비평가로 등단한 뒤 문학을 바탕으로 인문학 전반을 아우른 지성의 필력을 휘두르면서 6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짧게 말하겠다”면서도 홀로 서너 시간은 족히 쏟아내는 달변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지난 2009년 저술 활동 50주년을 기념한 자리에서 그는 “내가 ‘닭은 빛을 토할 뿐 울지 않는다’는 문장을 쓴 적이 있지만, 나는 계유생(癸酉生)이라 늘 울고 다니기만 했다”라며 왕성한 말과 글의 인생을 우스개로 풀이했다.
이어령은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것을 비롯해 10여개가 넘는 직함을 거쳤다. 경기고교 교사,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월간 문학사상 발행인, 조선일보 객원 논설위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어령은 1956년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면서 기성 문단을 향해 “무지몽매한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그렇듯 고가(高價)한 우리 세대의 정신을 제물로 바치던 우울한 시대는 지났다”라고 통렬하게 비판해 신세대 문학의 기수가 됐다. 그는 1963년 산문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통해 수난의 역사를 거쳐온 한국인의 심성이 지닌 장점을 새롭게 풀이해 역경 극복의 정신을 제시했다.
‘언어의 마술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수사학이 뛰어났던 그는 비평가로선 순수 문학의 입장에서 참여 문학을 비판했다. 1968년 조선일보 등의 지면을 통해 김수영 시인과 불온시 논쟁을 펼치면서 그는 “불온성을 작품의 가치기준으로 삼고 있는 김수영씨 같은 시인에게는, 문학비평가의 월평보다는 기관원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품명을 훔쳐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며 “문학의 가치는 정치적 불온성 유무의 상대성 원리로 재판할 수 없는 다른 일면을 지니고 있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김수영 50주기를 맞아 쓴 평론에선 화해를 모색했다. 그는 “서로 누운 자리는 달랐어도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라며 “보수·진보, 참여·순수 어느 한쪽의 흑백 하나로 보면 어떤 시인도 도그마의 희생양이 된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시는 자유요, 그 자체”라고 풀이했다.
이어령은 1982년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펴내 일본 사회의 심층을 분석하면서 일본의 하이쿠와 분재, 쥘 부채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축소 지향’이 트랜지스터를 비롯한 소형 상품 생산의 성공 요인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일본이 축소 지향을 유지해 공업사회의 거인이 됐지만, 대륙 침략을 통한 확대 지향을 시도했던 것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령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을 총괄 기획했다. 개회식 마무리를 침묵 속에 홀로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의 등장으로 꾸미면서 정적과 여백의 미학을 전 세계에 제시했다.
이어령은 1990년 문화부 장관에 취임한 뒤 국립국어원을 세워 언어 순화의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장관으로서 가장 잘 한 일은 ‘노견(路肩)’이란 행정 용어를 ‘갓길’로 바꾼 것”이라고 자평하길 좋아했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세워 문화 영재 양성의 기반도 닦았다.
90년대 초부터 정보화 사회의 도래를 일찍 파악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표어를 제시했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장점을 융합한 ‘디지로그’란 신조어를 내놓으면서 현실 변화에 창조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거듭나기’의 비결에 대해 ‘호기심이야말로 창조의 근원’이라고 강조했다.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가는 삶이었다. 미지(未知)에 대한 목마름으로 도전했다. 우물을 파고 마시는 순간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났다.”
그는 서울대 재학 중 만난 강인숙 건국대 명예 교수 사이에 2남 1녀를 뒀다. 강 교수는 “집에 오면 늘 글을 썼고, 몇 년에 한 번은 1년씩 외국에 나가 책 한 권을 써냈다”고 회상했다. 그는 2012년 맏딸 이민아 목사를 암으로 잃었지만, 딸의 권유로 기독교에 귀의했다. “지성의 종착역은 영성(靈性)”이라고 했다. “하나님도 인간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면 가엾게 여겨서 잠시 그 자비로운 손으로 만져줄 때가 있다. 배 아플 때 어머니 손은 약손이라고 만져주면 반짝 낫는 것 같지 않나. 그때 나는 신께 기도한다.”
그는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에 대해 “모든 게 선물이었다”고 했다.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
고인은 지난해 10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른다.
박돈규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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