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그마한 게 통도 크다.”
1979년 어느 날 서울 종로2가 뒷골목의 박술녀 한복학원. 당시 장안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던 한복 장인이었던 박술녀 원장이 한 젊은 여성을 앞에 놓고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돈을 벌어야 하니 일반 강습이 아니라 특강을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한 답변이었다. ‘통 큰’ 여성은 막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초례청주단 이명자(58) 사장이었다.
군인의 외동딸이었던 이 사장은 7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을 갔다. 시댁은 가난했다. 가족 전체가 군대 부사관이었던 남편의 변변치 않은 벌이에 의존해 살고 있었다. 이 사장은 돈을 벌기로 했다. 알음알음으로 어렵게 동사무소에 취직해 1년간 일했던 그는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평생의 업(業)을 만났다. 자투리 광고들 중에서 한복학원 광고가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당장 종로로 달려가 동사무소에서 받은 마지막 월급 6만원을 6개월치 수강료로 몽땅 투자했다.
하지만 강습의 강도와 진도는 성에 차지 않았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했던 박 원장에게 당돌하게 특강 요청을 한 것도 이 때문. 박 원장은 고맙게도 요청을 받아줬다. 이후 그는 삼회장(깃·끝동·고름·곁막이에 다른 색 천으로 장식을 댄 여자용 저고리)·깨끼(안팎이 비치는 엷은 옷감을 두 겹으로 박아 지은 저고리) 등 박 원장의 한복 제작 기술들을 무서운 속도로 빨아들였다. 1년간의 특강이 끝난 뒤 이 사장은 ‘하산’했고, 이후 집에서 일감을 받아다가 일했다. ‘재택 근무’는 쉽지 않았다. 바느질뿐 아니라 집안 살림까지 맡아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셋째 동서가 제안을 했다. “형님, 살림에는 재주가 없는 것 같으니 나한테 살림을 맡기고 가게를 내세요.”

종업원들이 한복을 입고 일을 하는, 이른바 ‘방석집’이라 불리던 구식 유흥주점들이 인근에 즐비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지리적 위치도 좋았다. 서울 동부 외곽에서 가장 큰 시장이라 양수리·청평·마석·호평·남양주는 물론 춘천에서도 구리시장으로 한복을 맞추러 나오곤 했다.
그는 곧 유명해졌다. “어떻게 바느질을 하길래 한복 치마가 이렇게 맵시 있게 펼쳐지는지 모르겠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몰려왔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말 그대로 돈을 긁어모았다. 이 사장은 “한창 때는 하루에 3000만원의 매상을 올린 적도 있었고, 평균적으로도 하루 매출이 200만~300만원에 달했다”며 “하루 수면 시간이 2~3시간 정도에 불과했을 정도로 바빴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시장 내 상당수 한복집들이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전후로 문을 닫았지만 그는 여전히 건재하다. 요즘도 한 달 매출액이 3000만원을 넘는다. 물론 기술만으로 가능했던 일은 아니다. 그는 고객들에게 한복 입는 법을 일일이 가르쳐 준다. “옷이 완성되면 고객에게 반드시 가게로 나오라고 한다. 옷 입고 개는 방법을 일일이 다 가르쳐 준다. ‘치마를 오른자락으로 입는 건 기생들뿐이니 항상 왼자락으로 입어야 한다’ ‘한복은 기본적으로 평면 옷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 같은 것들이다.”
철저한 친(親)고객 마인드는 기본이다. “비를 맞았더니 한복에서 물이 빠졌다”며 옷을 들고 들어온 신혼부부가 있었는데 그는 두말 없이 새로 옷을 지어줬다. 천연염색 옷은 비를 맞으면 물이 빠지는 게 당연한데도 말이다. 이 사장은 “손님을 이기는 상인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철칙”이라고 힘 주어 말했다. “어차피 다시 해줘야 하는데 싸우지 않고, 손님 가슴 아프게 하지 않게 해주면 그 손님은 결국 나한테 다시 돌아오더라”는 것이 그의 경험이다.

부단한 노력도 장수를 이끈 원동력이다. 그는 끝없이 새로운 디자인의 한복을 개발해 나갔다. 일자 치마가 유행할 때 선이 예쁘게 떨어지는 이른바 A라인 한복을 개발했고, 겹치마를 만들면서 안쪽 끝단에 예쁜 무늬를 집어넣기도 했다. 덩치가 커진 신세대들을 위해 어깨가 좁아보이는 조끼 모양 디자인의 저고리도 만들었다. 저고리 군데군데에 스스로 ‘잣’이라고 부르는 무늬들을 집어넣어 포인트를 주기도 했다. 서예를 배워 함에 들어가는 사주단자나 예장지 같은 것을 직접 써줬다. 그의 가게에 오면 옷부터 예장지까지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했던 셈이다. 이 장점이 또다시 입소문을 만들어냈고 손님은 더욱 늘어났다.
수십 장의 수료증과 졸업장·자격증들은 그의 노력 정도를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다. 그는 배울 기회가 있으면 절대 놓치지 않았다. 이 대표는 “2006년께 만들어진 ‘상인대학’을 초기에 다녔던 것, 그리고 구리시장 상인대학 동문회장이 됐던 것이 행운의 시작”이라며 “감투를 쓰게 되고 공무원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생기다 보니 정부에서 지원하는 이런 저런 과정에 다닐 수 있도록 추천해 주는 분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돈 주고도 배우는데 무료로 배울 기회를 왜 버리겠느냐”라며 “피눈물나게 노력을 하다 보니 세상도, 나라도 나를 보호해 주더라”라고 웃었다.
그는 심지어 염도 한다. 이 사장은 “한 명을 염하는데 최소 26종의 한복이 들어간다”며 “한복 연구도 할 겸 부업 삼아 돈도 벌 겸 장례지도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해 염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장사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라며 “무엇이든 많이 배워두면 고객들과 소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상인대학 동문회장 자격으로 청와대에도 다섯 번이나 들어갔다. 이명박 전 대통령 옆자리에 앉은 적도 있었다. 이 대표는 “여러 번 만나다 보니 친해져 이 전 대통령이 나를 보고 ‘이명박자(이명박+이명자) 왔네’라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바로 한복 박물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미 15억원의 재원을 마련했고, 부지를 물색 중이다. “한복 덕분에 땡전 한 푼 없던 우리 가족이 잘 먹고 잘 살게 됐다. 그러니 나도 한복에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가 밝힌 박물관 설립 이유다.
사진=김상선 기자 중앙 2013.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