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삶

해암도 2013. 11. 10. 20:59

	[여성조선]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삶

교복 차림으로 등장한 시대의 천재 작가 최인호가 별세했다. 등단 50년 동안 수많은 작품으로 사랑받던 영원한 청년 작가. 문단의 큰 별이 떨어졌다.

무수한 히트작을 내면서 ‘영원한 청년 작가’로 불려온 소설가 최인호 씨가 9월 25일 오후 7시 2분 별세했다. 향년 68세다. 2008년부터 침샘 부근에 발병한 암으로 투병 중이던 고인은 최근 들어 2주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으며 추석 당일인 지난 9월 19일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한 뒤 병세가 악화해 결국 눈을 감았다. 입원 중에는 인근 병실에 입원한 한 천주교 신부와 함께 기도를 하고 신앙 상담도 하면서 위안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희귀질병인 침샘암으로 5년간 투병 생활 마지막 말은 “주님을 봤다. 됐다. 가자.”

고 최인호 씨는 2008년 6월 ‘목 부위에 덩어리가 만져진다’며 병원을 찾았다가 침샘암 진단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침샘암은 침을 생산·분비하는 침샘에 악성종양(암)이 생기는 질환으로 귀밑샘, 턱밑샘, 혀밑샘 및 여러 개의 침샘 부위에서 발생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매년 2, 3백 명 정도가 발병하는 드문 암이다.


	[여성조선]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삶
암 투병 중이었지만 그는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펴내기도 하면서 의지를 보여왔었다.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은 고인은 지난 2월 문학 인생 50년을 정리한 산문집 <최인호의 인생>도 출간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지난 9월 25일 오후 눈을 감았다.

“주님을 봤다. 됐다. 가자.”

마지막에 남긴 말이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죽음이 눈앞에 왔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예순여덟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을 하는 순간에도 고인은 특유의 인사말을 딸에게 남겼다.

“아빠, 사랑해요.”
“응, 나도 사랑해.”

그리고는 웃으며 세상을 떠났다. 그를 하늘로 떠나보내는 장례미사는 9월 28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에서 유족과 지인 등이 함께한 가운데 봉헌됐다. 미사를 주례한 정진석 추기경은 “고인은 삶을 통찰하는 혜안과 인간을 향한 애정이 녹아 있는 글로 많은 국민에게 사랑을 받은 이 시대 최고의 작가였다”고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황정숙씨, 딸 다혜 씨, 아들 성재 삼성전자무선사업부 과장, 사위 성민석 한라비스테온공조 기획실 상무가 있다. 유가족들은 “추석 이틀 전까지 괜찮아서 입원 후 퇴원했다가 다시 추석날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했다가 세상을 떠났다”며 “편하게 가셨다”고 고인의 마지막을 전했다. 장례까지 마친 유가족을은 고인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측근들에 의하면, 종교적인 믿음이 두터운 가족이라 고인과의 이별을 의젓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교복 차림으로 등장한 시대의 아이콘 10대의 천재 작가

그는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서울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인 1963년 한국문화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로 등단했다. 1967년에는 조선일보에 <견습환자>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최인호는 특유의 주제가 담긴 소설들로 당선 이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인기를 끄는 작가면서 그는 문단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존재였다. 유신체제, 산업화를 겪던 1970년대 우리나라는 새 아침이 밝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했던 분열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이런 사회 모순을 끄집어내서 작품 세계를 구성했다. 모순된 세계에서 절망하고 타락하는 인간을 잡아냈다. 1970년대 근대화 속 개인을 다루되 현실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아 허무주의적 도피 성향을 띤다는 평가도 받았다.

대중적인 인기와 문학성 사이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은 그는 상업주의 문학, 호스티스 문학이라 불리며 저평가되기도 했다.

그가 사회구조에 대한 직선적인 공격을 제거한 공간에는 극단적인 삶을 오가며 방황하는 여러 인간 군상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무너지는 개인, 영악한 위선을 고발하는 아이들, 세계와 대립하며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는 자아 등이 담겨 있다.

덕분에 그의 작품은 영화, TV 드라마에 풍부한 젖줄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작품이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가다. 그의 각본으로 만든 영화는 이장호 감독이 연출한 <별들의 고향>(1974), 하길종 감독이 연출한 <바보들의 행진>(1975)과 <병태와 영자>(1979),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고래 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등이 있다. 이들 작품은 억압의 시대에 방황하던 청춘의 삶을 그린 것들이다.

<상도>, <해신>, <별들의 고향> 드라마,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

최인호는 2000년, 조선시대 상인의 삶으로 바른 상행위와 경영의 도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상도>를 펴냈다. <상도>에서 임상옥은 절체절명의 위기와 기회를 반복해서 안겨주는 고약한 운명 속에서 극약처방을 마다하지 않는 생존술을 펼치면서도 중용의 도로서 인생의 중심을 잡는다. 책은 이듬해 MBC에서 50부작 드라마로 제작됐다.
그는 또 신라 장군 장보고의 일대기를 쓴 <해신>을 출간했다. <해신> 역시 KBS 2TV에서 51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져 2004년 11월부터 2005년 5월까지 방영됐다. 최인호의 소설처럼 두 드라마 역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대중성을 인정받았다.


	[여성조선]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삶


한편 최인호는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뒤 1993년 한국 불교의 전통을 다룬 종교소설 <길 없는 길>을 펴냈다. 이 소설로 최인호는 1998년 불교출판문화상과 가톨릭문학상을 수상했다. 1993년부터는 가톨릭 주보에 ‘말씀의 이삭’이라는 칼럼도 기고했다. 그의 칼럼은 지난해 9월 30일에 멈춰 있다.

1975년 9월부터 2010년 2월까지 34년 6개월간 월간 <샘터>에 연재 소설 ‘가족’을 기고하기도 했다. 국내 잡지 역사상 가장 긴 연재 소설인 ‘가족’은 가톨릭 신자인 그의 신앙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투병 중이던 2011년에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발표해 문학을 향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여줬다.

올해도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연재 글 등을 묶어서 <최인호의 인생>을 펴냈다. 산문집에는 암 투병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후 착잡했던 마음,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에 대한 기억 등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올해 초만 해도 지방으로 피정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등 건강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측근에 따르면 고인은 최근까지도 천주교와 관련된 작품을 쓰기 위해 자료수집 작업을 해왔다고 한다.

교복 차림으로 신춘문예 시상식장에 나타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고, 최초로 책 표지에 얼굴 사진을 실은 소설가였으며,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된 작가였다. 가장 많은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모든 이력은 그가 온몸으로 생을 살아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불교적 가톨릭 신자’ 신앙생활로 완전히 달라진 삶

잘나가는 작가로 성공을 거둔 그는 1987년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에 입교했다. 풍요로움 속에서 오히려 황폐해지는 내면이 종교로 이끌었다는 것이 고인의 고백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 등과 가까이 지냈다. 강렬한 빛을 받는 신앙체험을 통해 작가의 신앙은 새로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자난 1993년 서울대교구 주보에 <말씀이삭>을 연재하면서부터다. 이를 통해 작가는 역량 있는 작가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믿음의 풍성한 양식을, 말씀의 의미를 더욱 친근하게 전해주기도 했다.

이후에는 <잃어버린 왕국>과 <길 없는 길>, <상도>, <해신> 등 역사와 종교를 소재로 삼은 작품을 집중적으로 내놨다. 투병 중에도 묵상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비롯해 <최인호의 인연>, <천국에서 온 편지> 등을 낼 만큼 집필과 출간을 꾸준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두고 “글 쓰는 일이 즐겁다. 앞으로 적어도 10년간은 무지막지하게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4년 연합 인터뷰에서 나눈 이야기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고인은 지난 2012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에 글을 연재하며 침샘암으로 투병하면서 느끼는 인간적 고뇌,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바 있다. 그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불어닥친 이 태풍은 다름 아닌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며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머리를 깎은 천사와 같은 어린 환자의 눈빛을 보았을 때 나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했다”고 고백했다. 직접 암 투병을 하며 겪은 절망과 고통, 그리고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담은 최 작가의 글은 비슷한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준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계와 각별한 인연도 만들어졌다.
“내 정신의 아버지가 가톨릭이라면, 내 영혼의 어머니는 불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불교적 가톨릭 신자’라고 나 자신을 부르고 싶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면서 불교에 대해서도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최인호 작가는 암 투병 중에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고 왕성하게 집필을 했다. 2011년에는 항암 치료로 손톱이 빠진 상태에서 두 달에 걸쳐 육필로 쓴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작품을 통해 암 투병 직전 역사소설에서 현대소설로 전환을 모색하던 꿈을 이뤘다. 이어 묵상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비롯해 <인연>, <천국에서 온 편지> 등을 꾸준히 집필, 출간했다. 올해도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산문집 <최인호의 인생>을 펴냈다.

잡지 역사상 최장의 기록 연재 소설 ‘가족’

그의 작품에는 가족과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은 지난 1975년부터 월간 <샘터>에 연재한 소설 ‘가족’이다. 그는 여기에 신앙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써내려갔다. 연재는 2009년 8월 4백 회의 기록을 세웠다. 소설을 시작할 때 철부지 남편이자 아빠로 그려진 작가는 소설을 연재하는 동안 환갑을 넘겼고, 4살과 2살이던 딸과 아들은 결혼해서 각자의 가정을 꾸릴 정도로 많이 자랐다. 연재는 작가의 암 수술 직후 7개월간 쉬었다가 재개했으나, 2009년 10월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중단했다. 35년 1개월간의 연재는 9권의 단행본으로 남았다. 국내 잡지 역사상 최장이다.

‘가족’은 고인과 그의 가족, 이웃에 관한 이야기를 콩트식으로 잔잔하게 풀어낸 것으로 일종의 일기 형식이다. 그는 마지막이 된 402호에서 착잡한 마음을 솔직하게 남기기도 했다. 그는 연재 종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참말로 다시 일어나고 싶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요절한 소설가 김유정이 죽기 열흘 전 쓴 유서 같은 편지와 릴케의 ‘그대는 불쌍한 가난뱅이’라는 시를 언급한 뒤 이런 글로 연재를 마감했다.

“아아, 나는 돌아가고 싶다. 갈 수만 있다면 가난이 릴케의 시처럼 위대한 장미꽃이 되는 불쌍한 가난뱅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 막다른 골목으로 돌아가서 김유정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고 싶다. 그리고 참말로 다시 일·어·나·고·싶·다.”
월간 <샘터>는 2010년 2월호에서 ‘402+소망-가족은 인생의 꽃밭입니다’라는 특집을 통해 연재 종료 사실을 알리고 그간의 연재를 정리하는 특별 기사를 실었다.

명동성당 장례미사로 마지막 인사… 정부에서는 은관문화훈장 수여

그의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정부에서는 2등급의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고인이 생전 50년 동안 창작 및 문단 활동을 활발히 해 문학의 대중화와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게 훈장 수여 이유다. 모철민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은 정부를 대표해 고인의 빈소를 직접 찾아 유가족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지난 50년 동안 활발한 창작과 문단 활동, 문학의 대중보급 활성화를 통해 한국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을 인정받은 셈이다.

명동성당에서 그의 장례미사가 거행됐다. 약 두 시간 동안 거행된 미사에는 유족과 지인, 독자 등 약 6백여 명이 참석해 고 최인호 작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고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고래사냥>에 출연한 인연이 있는 배우 안성기가 고별사를 했다.

“먼지가 일어난다. 살아난다. 당신은 나의 먼지. 먼지가 일어난다. 살아야 하겠다. 나는 생명, 출렁인다.”

이 글은 고인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 아내 황정숙 씨에게 구술한 문장이다. 삶의 의지가 느껴지는 글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떠나보냈다.
안 씨는 고인을 “인호 형님”이라고 부르며 “너무 서둘러 저희 곁을 떠나신 것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함께 살아온 날들이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했다”고 말했다.


	[여성조선]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삶
절친이 말하는 내 친구 최인호는…

“충분히 잘 살았습니다, 인호” 가수 조영남

“우리가 쎄시봉 무지하게 같이 다녔어요. 대학교 다니면서. (이)장희랑 고등학교 선후배라서 친하다가, 글을 쓴다는 인호랑 친하게 지냈어. 나는 음악을 해서 성공을 하고 그 친구는 글을 써서 성공을 하고 그랬잖아요. 정말 친하게 지냈죠.
인호가 병나기 전에 점심을 한번 먹었어. 이장희랑 셋이 장어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어. 한 5년은 된 일인 것 같아. 무려 4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 할 이야기를 다 해서 후회는 없어요.

어떤 이야기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 그때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는데 무척 기분이 좋은 거야. 우리가 여자 이야기로만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구나.

그때 인호는 종교에 깊숙하게 빠져 있었어. 그런데 그 부분에서는, 나는 조금 심드렁했어요. 아티스트는 자기가 종교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아티스트가 종교에 빠진 사실이 나는 좀 심드렁하더라고요. 인호는 또 날 보면 그랬겠죠. 신학 공부를 했다는 아이가 왜 시큰둥하게 구는지. 그런데 그런 게 참 자연스럽고 좋아요. 어른이 되어서 서로가 생각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건 성숙한 거잖아요.

그렇게 인호는 그쪽에 심취해 있었고, 나는 아트에 심취해 있었어요. 병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두 번 더 본 것 같긴 한데, 그때 4시간 이야기가 나는 기억에 남아요.
절친한 친구들이 세상을 많이 떠났어요. 이윤기, 김점선, 장영희, 최윤희…. 나는 이제 죽는다는 사실에 익숙해졌어요. 이 친구들 모두 죽었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세워졌어요. 죽는 거랑 사는 거랑 한통속이에요. 살아 있는 친구들도 안 보면 죽은 거나 산 거나 똑같은 거잖아요? 직접적인 연락이 안 될 뿐이야. 죽음이, 죽음이 아니에요. 못 만나는 것일 뿐이죠.

우리가 쎄시봉에서 처음 만났을 때, 우리 꼴이 말이 아니었거든. 그런데 지금 대문호가 되었잖아요. 저는 인호가 충분하게 잘 살았다고 봐요.

제가 조금 있다가 45주년 공연을 해요. ‘가곡의 밤’이라는 테마로 할 건데요. 그날 김성태 작곡가가 만든 ‘이별의 노래’ 부를 거야. 최인호 생각하면서. 이런 가사가 있어요.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여성조선]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삶
“죽는 순간까지 가르침을 건네준 내 친구” 감독 이장호

“인호가 호전되어서 친구들이 모두 안심하고 있었어요. 암이라는 것은 극복할 수 있다. 인호가 이겨냈다. 역시 이겨냈다. 투병하면서 소설을 써냈기 때문에 그런 정신력이면 살아난다 생각했는데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많이 놀랐어요.

최근엔 거의 만나지 못해서, 거짓말 같은 사실이 되어버렸어요.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어요. 나뿐 아니라 배창호, 안성기도 모두 함구하고 있었고요.

영화판 사람들이 모두 빈소를 지켰어요. 배창호, 김수철, 이명세 등등. 3일 동안 떠나지 않고 인호 마지막을 지켜줬어요. 인호가 문인이지만 영화에 미친 영향도 굉장히 크거든요.

인호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하는 걸 참 싫어했었어요. 형도 건강하다가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셨고. 인호는 자신의 삶이 운명적인 걸 싫어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투병하면서는 암 자체를 사랑하고 감사하고, 정신력으로 버티는 투병을 하더라고요.

49재 때 가려고 하는데, 가족도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으니까 죽음이라는 것을 영이별로만 받아들이진 않더라고요.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마지막 임종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맞이했어요. 몰랐던 사실인데,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었어요. 인호 덕분이에요.

이 친구가 마지막까지 저에게 가르침을 주고 가요. 죽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하게 됐거든요.

투병하면서는 친구들 만나기를 기피했어요. 나도 못살게 굴기 싫어서 애써 만나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고요. 우리는 마음을 털어놓기보다는 농담을 많이 하던 사이였어요. 나도 뒤따라가면 사후 세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립습니다.”


                               조선 : 2013.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