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커리 도전과 실패담
‘밀밭에서…’ 펴낸 이성규씨
경기도 광명에 있는 자신의 밀밭에서 자신이 구운 '사워도' 빵을 들고 있는 이성규 더베이킹랩 대표. 그는 "우리 밀과 고대 밀로 구운 빵을 실험 중"이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회사를 그만두고 나만의 빵집을 운영하는 건 많은 직장인의 꿈이다. 이성규(48)씨는 그 꿈을 잠시나마 이뤘던 사람이다.
서울대 공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 중국유럽국제경영대학원 MBA 학위를 딴 뒤 한·중 합자회사 법인장(CEO), 국내 자동차 부품 회사 임원 등 승승장구하던 그는 43세였던 2016년 억대 연봉을 받던 직장에서 돌연 퇴사했다. 이듬해 서울 양평동에 작은 빵집을 열었다. 하지만 2년 뒤 동업자에게 넘겼다. 지금은 바이오 기업에서 근무하며 주말에 우리 밀과 빵을 연구하는 ‘더베이킹랩’을 운영한다.
이씨가 빵집을 시작한 계기부터 빵집을 열었다가 결국 그만두고 회사원으로 돌아온 과정을 기록한 책 ‘밀밭에서 빵을 굽다’를 최근 펴냈다. 토종 밀과 고대(古代) 밀을 시험 재배하고 있는 경기도 광명의 작은 밭에서 그를 만났다.
-회사 그만두고 빵집 한다고 했을 때 가족 특히 아내가 반대하진 않았나.
“당연히 반대했다(웃음). 고향인 충남 청양에서 지금도 농사 지으시는 아버지도 ‘어떻게 가르쳤는데 빵집이냐’며 엄청 싫어하셨다. 서울대 공대 나와 좋은 직장 다니는 아들이 자랑이었는데 난데없이 밀 농사 지으면서 빵을 굽겠다니. 지금도 부끄러워하신다.”
-반대를 어떻게 극복하고 설득했나.
“아내가 나를 잘 안다. ‘이 사람은 한번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봐야 한다’는 걸 알았던 듯하다.”
-잘나가던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직장은 이제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라, 50 줄 어디쯤에서는 그만둬야 하는 곳이 됐다. 여기에 기대 수명이 늘어났다. 자의건 타의건 인생 2막을 살 수밖에 없다. 인생 2막에서는 직(職)이 아닌 업(業)을 선택하고 싶었다. 직은 잡(job)이고 타이틀이다. 업은 미션(mission) 즉 나의 존재 가치다. 인생의 전반전이 직을 추구하는 삶이었다면, 인생 후반전에서는 업을 따르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 업이 왜 하필 빵집이었나.
“2007년 당시 근무하던 회사의 베이징 사무소 수석 대표로 발령 났다. 중국에서 끔찍한 음식 스캔들을 여럿 겪었다. 시작은 2008년 멜라민 우유 파동이었다. 당시 세 살이던 딸도 그 우유를 먹었으니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가짜 고기, 가짜 달걀, 하수에서 추출·정제한 식용유 등이 터져 나왔다. 안전한 먹거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여러 음식 중 빵을 선택한 이유는.
“미국 유명 작가 마이클 폴란(Pollan)을 만난 일 때문이다. 2013년 한국 본사로 복귀한 후 이런저런 음식 관련 책을 읽다 폴란이 쓴 ‘요리를 욕망하다’를 만났다. 책 내용이 모두 흥미진진했지만 ‘3부 공기-아마추어 제빵사 되기’에 매료됐다. 저자는 인류 최초의 가공식품이자 최초의 발효 식품인 빵 만들기에 도전한다. 나도 저런 빵을 구워보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원래 빵을 좋아했나.
“밀가루 음식을 좋아했다. 어머니가 분식을 엄청 좋아하셨다. 그런데 빵을 먹으면 자주 더부룩하고 가스가 차고 신물이 넘어오곤 했다. 폴란의 책을 읽고 어떻게 현대에 들어와 최악의 빵으로 변해 왔는지 알게 됐다. 직접 만들어 먹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들볶아 가정용 오븐과 반죽기를 주문해 베란다에 설치하고 빵을 굽기 시작했다.”
그는 건강한 빵을 굽고 싶었다. 흔히 ‘사워도(sourdough) 빵’이라 부르는 재래식 빵이다. 과거 유럽에서 밥처럼 먹던 빵이라 ‘식사 빵’이라 부르기도 한다. 빵의 품질 하락을 불러온 산업화된 제빵 이전의 전통 방식대로 만드는, 밀가루·물·효모·소금만으로 굽는 빵이다.
직장에 사표를 내고 경기도 양평 ‘곽지원 빵공방’과 서울 서래마을 ‘아티장베이커스’에서 빵 수업을 들었다. 덴마크와 일본 유명 빵집을 찾아가 벤치마킹도 했다. 2017년 동업자와 함께 사워도 빵을 주 품목으로 하는 빵집 ‘아쥬드블레’를 서울 양평동에 열었다.
-본인은 ‘건강 빵’을 굽고 싶은데 손님들은 ‘맛있는 빵’을 원했다고.
“사워도 반죽으로 겉이 진한 색이 나도록 구운 딱딱한 유럽식 빵은 인기가 없었다. 반면 달고 부드러운 빵은 반응이 좋았다. 내가 굽고자 하는 빵은 대중성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타협했나.
“건강 빵을 줄이고 달고 부드러운 간식 빵 비율을 20% 정도로 높였다. 하지만 사워도 빵을 찾는 손님도 차츰 늘었다. 식사를 빵으로 하는 이가 늘면서 젊은 층뿐 아니라 장년층 손님도 생겨났다. 우리 빵집 옆에 동네 어르신들이 모이는 사랑방이 있다. 하루는 할머니 한 분이 바게트를 사 가셨다. 잠시 있다가 다시 오시더니 ‘하나 더 줘’ 하셨다. 그러더니 일주일에 두세 번씩 와서 바게트를 사 가셨다. ‘딱딱한데 정말 고소하고 맛있다, 누룽지를 먹는 것 같다’고 하셨다. 진정한 빵 맛을 알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빵이란 어떤 빵인가.
“네 요소가 있다고 본다. 첫째가 밀 본연의 맛과 향이 잘 드러난 빵이다. 둘째가 천천히 발효된 슬로푸드 빵. 셋째가 로컬(local) 즉 우리 밀로 구운 빵이다. 넷째가 충분히 발효시켜 잘 부풀고 잘 구운 빵이다. 너무 허옇게 구우면 빵 본연의 구수한 풍미가 살지 않는다.”
-우리 밀은 잘 부풀지 않는다던데.
“글루텐 함량이 낮기 때문이다. 소위 ‘리치 브레드(rich bread)’라고 하는, 우유·버터·달걀 등이 들어가 부드럽고 촉촉한 식빵이나 브리오슈는 굽지 못한다. 하지만 빵이 주식인 유럽의 밀가루도 글루텐 함량이 모두 높지는 않다. 우리 밀을 주로 하되 블렌딩, 즉 다른 밀가루와 섞어 쓰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 그러면 우리 밀 특유의 풍미와 함께 잘 부풀어 오른 빵을 만들 수 있다.”
-빵이 잘 구워졌는지 판단하는 자신만의 기준이나 방법이 있나.
“우리 집 강아지가 바로미터(척도)다. 빵을 한쪽 잘라서 줘본다. 걔가 잘 먹으면 ‘아 잘 구워졌구나’ ‘이건 팔리는 빵이다’ 바로 안다. 개는 아부하지 않고 정직하다. 그 빵을 다시 한쪽 잘라 딸한테 주면 딸도 틀림없이 잘 먹는다. 단팥빵, 크루아상, 곰보빵 등 간식 빵은 설탕이 들어가 먹이면 안 되고 사워도 빵만 가능한 방법이다.”
이씨는 2019년 아쥬드블레를 그만뒀다. 지분을 공동 운영하던 동업자에게 넘겼다. 빵집은 여전히 영업 중이다. 그는 바이러스 치료제를 연구하는 바이오 회사에 취직했다. 평일은 회사 업무를 보고 주말에만 텃밭에서 밀을 시험 재배하고 빵을 굽는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제빵을 2년 만에 접었다.
“빵집이 안되는 편은 아니지만 나와 동업자 두 가정이 먹고살기에 충분한 수익이 나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도 힘들다. 늦어도 새벽 5시에는 나와야 11시부터 빵을 팔 수 있다. 근무시간도 길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제빵사를 노예라고 불렀단다(웃음). 가장 힘든 건 판매다.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기가 제일 힘들다.”
-빵집을 하고 싶어 하는 이가 많은데 추천하겠나.
“사람에 따라 다르다. 돈을 버는 게 목적이라면 추천하지 않는다. 빵집은 힘들면서 돈도 안 된다. 재미 삼아 은퇴 후 의미 있는 일을 소일 삼아 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매일 오픈하는 건 힘드니 일주일 2~3일만 여는 모델이 나오고 있다.”
-빵 굽는 건 아예 접었나.
“언젠가는 또 할 거다. 꿈이 농장이다. 귀농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환경 가능, 지속 가능 농법을 알려주는 교육 농장. 빵과 제빵은 농장의 큰 축이 될 것이다. 여기 텃밭과 우리 밀을 이용한 빵 굽기 등을 연구하는 더베이킹랩은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테스트다. 한국 실정에 맞는 밀과 밀 농사, 제분, 제빵, 나만의 빵 굽기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알려주는 책도 쓰고 있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gourmet@chosun.com] 입력 202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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