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조국·김명수 자기성찰 없이 뻔뻔, 상상하기 힘든 인간형”

해암도 2021. 6. 12. 05:38

[SUNDAY 인터뷰]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

최근 칼럼집 『생각의 저편』을 펴낸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현 정부의 적폐 청산을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비판했다. 박종근 기자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83)씨는 현실에 발붙인 문학주의자, 균형감 있는 보수주의자로 통한다. 문학만이 최고라고 강변하지 않고,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1974년 그는 등 떠밀려 한국기자협회장을 맡았다가 기관에 연행된 후 다니던 신문사에서 해직됐다. 이듬해 김현 등 이른바 ‘문지 4K’와 함께 문학과지성사를 차려 지금의 문학전문 출판사로 키웠다.

 

문학지상주의를 추구하면서도, 70~80년대 창비 진영의 참여문학에 우호적이었다. MB 정부 시절 진보 문학단체인 작가회의가 불법시위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확인서 제출을 거부해 정부 지원금 3400만원을 못 받게 되자 같은 금액의 개인 돈을 작가회의에 내놓기도 했다.
 

촛불혁명 후 새 정치 기대했는데
부끄러움 모르는 집권층에 실망

콤플렉스 없는 젊은 ‘이준석 세대’
편협·오만·고집 풍조 극복 희망

적폐청산은 또 다른 적폐 만들어
눈에 보이는 잘못 고쳐나가면 돼

좋아했던 문 대통령 지금은 불신
추미애 내세워 검찰개혁 무리수

 

해직 기자 출신, 문학과지성사 일궈
 

생각의 저편

 

 

그는 2016년 말 세상의 움직임에 매우 큰 기대를 품었다고 했다. 한겨레신문 연재 칼럼을 묶어 최근 펴낸 『생각의 저편』(문학과지성사)의 ‘서문’에 따르면 그렇다. 2017년 4월 신문에 게재됐던 ‘‘인간의 얼굴’을 한 거버넌스’라는 글에서는 “행복의 정치경제학을 약속하는 인물에게 내 귀중한 한 표를 드릴 참”이라고 쓰기도 했다. 임박한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를 찍겠다는 뜻이었다.
 
그랬던 칼럼의 기조가 어느 순간 바뀐다. 대략 2019년 중반, 조국 사태 즈음부터다. 올 초 글에서는 “다수의 횡포를 넘어 독재로의 후퇴가 어른거릴 정도”라고까지 할 정도로 현 정부에 대한 거센 비판자로 돌아섰다.
 
이런 반전을 어떻게 봐야 할까. 보수주의자의 한계인 걸까. 그의 균형감각을 대치 정국을 바라보는 하나의 가늠자로 삼을 수 있을까. 지난 1일 서울 서교동 문지 사무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신문 게재 순으로 책에 실린 칼럼들을 보면 처음에는 정부에 우호적이었다가 갈수록 비판적이 된다.

“세상에 대한 기대를 얘기한 글은 2016년 말 촛불혁명 때 쓴 건데, 촛불시위의 정치적 의미보다 정서적 의미가 내게는 따듯하게 다가왔다. 현장에 가지는 않았지만, 미국 같은 나라의 폭력시위와 달리,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차분하게 내면의 빛을 밖으로 발산하는 촛불이 참 아름다웠고, 새롭게 나타날 정치적·사회적 양상에 대해 기대를 품게 했다.

 

노무현 정부가 민주주의의 일상화에 크게 기여했다면 이 정권에서는 사생활화까지로 발전하겠다는 기대를 갖게 됐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내면화되서 장애인, 동성애자, 소수자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하는 일 말이다. 그런데 내가 실망한 건 조국 사태 이후다.”

 

어떤 점에선가.

“그렇게 오만하고 자기성찰이 없는 유형을 별로 보지 못했다. 일제시대나 6·25 전쟁통에서도 그런 오만은 없었다. 조국만이 아니다. 대법원장은 자기가 거짓말했다고 고백하면서도 꿈쩍을 하지 않는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같은 분은 정말 꼿꼿하게 법대로 하면서 자기 내면과 사회현실 사이에 갈등이 없도록 하셨는데. 그래서 86세대가 갖고 있는 집권층의 뻔뻔함이랄까, 그게 참 실망을 줬다. 자기성찰이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지식인이나 사회활동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인데, 그런 점에 대한 의식 없이 그렇게 한다는 건 나로서는 참 상상하기 힘든, 그런 인간 타입이다.”

 

86세대 전체의 문제는 아니지 않나.

“정치적 야심이 있거나 권력을 탐하는 사람은 어느 세대에나 있다. 86세대 가운데 권력지향적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집권층 속에 들어가 있다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부끄러움이라는 말을 가장 아름답게 쓴 사람은 시인 윤동주였다.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원죄의식을 가진 서구사회에서 비롯된 용어인데, 윤동주는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준 아름다운 시인이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분들이 그 세대를 주도하고 있다고 할까. 그게 문제고 그 세대가 바뀌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86세대가 변해야 한다는 건가,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한다는 건가.

“둘 다다. 86세대가 반성도 해야 하지만 밑에서 올라오는 세대가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선배 세대를 지난 세대로 밀어붙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게 2020년대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 전조가 지금 30대 이준석으로 비치는 게 아닐까. 섣부른 정치 얘기 같지만 정치 얘기라기보다는 세대적인 감각이라고 해야겠다.”

 

이준석 세대에서는 어떤 희망을 보나.

“새로운 것은 항상 새로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라든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내로남불식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지금 집권층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이준석 세대는 별로 싸운 세대가 아니다. 고용주와 싸우지도 않았다. 디지털 세대로 우리 같은 활자 세대보다 의식이 훨씬 자유롭고, 풍요 속에서 살아온 세대다. 콤플렉스가 없다. 우리 같은 경우는 선진국에 대한 콤플렉스, 부자 나라에 대한 콤플렉스, 콤플렉스 덩어리였는데 말이다. 물론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헤매는 젊은이도 많지만 세대 전체적으로는 미국이나 일본의 어느 세대 못지않게 풍요롭고 자유롭고 콤플렉스가 없다. 그런 세대가 우리 지도층이 된다면 편협하거나 오만하거나 고집부리는 그런 풍조는 좀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희망을 거는 거다.”

 

지나치게 좋게 보는 것 아닌가.

“취업을 못 하거나 집이 없어 고통받는 젊은 사람들 숫자가 우리 세대보다 많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더 심각하기는 할 텐데 그들의 시련을 어떻게 성숙시킬 것인가는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될 거다. 책의 마지막 글에서 소개한 『추월의 시대』의 30대 저자들은 한국사회가 ‘추격의 시대’를 지나 ‘추월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썼던데, 젊은 세대의 그런 자신감이 그렇게 환하고 좋더라. 일본 사람들도 갖지 못한 자신감이 아닐까 싶고, 그런 세대의 출현이 참 고맙고. 우리 세대는 모든 게 뒤떨어져 있다는 자학의 시대로부터 일본·미국에 뒤떨어질 게 없다는 자신감의 시대까지, 80년의 변화를 살아온 셈이다. 스스로 행운의 세대였다는 생각을 한다.”

 
맹목적인 이분법과 거리를 두려 했던 김씨의 행보는, 문학에서는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출된다.
 
“현실-문화-문학의 복잡한 연결 회로는, 특히 오늘날과 같은 착잡한 사회에서는, 직선적이며 단선적인 순진한 시각으로는 정확히 포착되지 않으며, 올바로 해명될 수도 없다. 다양성이나 다원주의적 관점이 아니고서는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1991년 책 『두 열림을 향하여』에 실린 글이다. 이번 책에서도 김씨는 ‘역사에의 관용’이라는 글에서, 한국사회를 지금까지 발전시킨 힘이 어쩌면 투기나 부정 같은 부도덕·불의였을 수 있다는 ‘반전의 해석’을 제시한다. 절대선 위에서 지금의 풍요를 쌓아 올린 게 아니라는 얘기다. 때문에 역사의 전개를 보다 관대하게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현 정부의 타협 없는 적폐 청산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평했다.
 
“한 세대의 강점과 약점, 아름다움과 추악스러운 점을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 새롭게 하면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유당 시절이나 박정희 시절에서 얻을 점도 많지만 잘못된 점도 많다. 역사의 변증이라고 하면 거창한 말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걸 느끼는데, 적폐라는 게 전에도 있었지만 지금 정권에도 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잘못이나 무능력, 이런 것들을 고쳐나가면 되는 거지 굳이 적폐라는 말을 써야 하는지, 반드시 개혁이나 혁명, 적폐청산, 이런 거창한 말로 또 하나의 적폐를 만들어야 하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경쟁하는 공존 등 네가지 방향 제시
 

결국 이 모든 일의 배경에 대통령이 있다.

“내가 문재인씨를 참 좋아했다. 지금은 많이 불신하게 됐지만. 최근에도 검찰총장 후보자가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했는데도 그냥 임명하지 않았나. 그렇게 무례할 사람으로 안 보였는데 자기 고집에 갇힌 건지 더 많은 무리를 저지른다. 그분의 겸손함, 인정스러움, 관용적인 태도를 희망적으로 봤는데 조국이나 추미애를 법무부 장관으로 쓰면서 내면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그대로 잡고 싶으면서도 추미애를 내세워 검찰개혁을 하고 싶은 갈등 아니었나 싶은데, 이제는 일방적으로 자기 고집으로 선회한 게 아닌가 걱정된다.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신문으로 보는 것으로는 그렇더라.”

 
김씨는 앞으로 한국사회가 이뤘으면 하는 “형용모순의 변증”이라며 네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성장 없는 발전. 경쟁하는 공존. 인공의 자연화. 마지막으로 겸손한 자신감이다. 가령 ‘성장 없는 발전’의 경우 지구 자원의 고갈이나 기후변화 없는, 그러니까 양적인 성장이 아닌 지속가능한 성장을 뜻한다. ‘겸손한 자신감’은 역시 지나친 자기 확신에 빠진 것 같은 86세대 집권층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담겨 있다.
 
김씨는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했다. “그런 점을 부끄러워하거나 자랑하거나 하지 않고 내 성격이 그렇다는 정도로 여겨왔다”고 했다. 대척점에 있는 창비에 대해 “마포 신수동에 출판사가 나란히 있을 때부터 창비 쪽을 바라보며 저쪽 편 처지를 생각해 버릇 해왔던 것 같다”고 했다. 상대 처지를 생각하는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선악의 도덕을 기초로 판단은 엄격하되 평가는 보다 큰눈으로 헤아려야 할 일이었다.”
-‘역사에의 관용’, 2019년 6월 21일
 
“논의가 진영론으로 옮겨가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경직, 후퇴한 것이다. 조국 사태를 둘러싸고 진영론이 전개되었다면 그것은 또 오늘의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386세대의 분열을 시사한다.”
-‘세대론 수감’, 2019년 12월 13일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1.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