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제도 종교의 시대 막 내렸다…이젠 종교에서 영성으로

해암도 2020. 4. 29. 08:43

서구의 교회당 갈수록 텅텅 비어
사람들이 외면하는 건 제도종교
예수와 붓다는 영성에 무게 중심
생각하는 신자라야 종교가 살아

 

“제도 종교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가야 한다.”
지난달 23일 강화도에 있는 심도학사(尋道學舍)를 찾았다. 길희성(77)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사재를 털어 지은 곳이다. 고전과 경전을 공부하며 ‘삶의 길(道)’을 찾는 곳이다. 길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예일대 신학부에서 석사,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세인트올라프 대학 종교학과 교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에게 ‘종교와 영성’을 물었다.

길희성 명예교수는 "종교는 제도화할 수 있어도, 영성은 제도화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종교에서 영성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지금 서구 사회의 종교를 보라. 유럽의 교회당이 박물관이나 음악당처럼 되어버렸고, 심지어 나이트클럽에 팔린 곳도 있다. 미사와 예배를 볼 때는 교회 안이 텅텅 빈다. 왜 그렇겠나. 사람들이 제도화된 종교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외면하는 종교란 어떤 건가.

 

“종교는 본래 제도나 조직을 위해 생겨난 게 아니다. 사람들의 목마름, 사람들의 근원적인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생겨났다. 그게 영성이다. 예수도 그랬고, 붓다도 그랬다. 영성을 중심에 두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종교에서 ‘영성’이 빠져버렸다. 그 자리를 종교의 제도와 조직이 대신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다. 예수밖에 없다’며 이를 비판했다.”


길희성 교수는 “그러니 사람들이 종교를 외면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서구는 벌써부터 ‘탈근대ㆍ탈종교의 시대’를 살고 있다”며 “역사의 뒤편으로 이미 넘어간 ‘제도 종교의 시대’가 이상하게 한국에서만 ‘성업’ 중이다”라고 지적했다.

길희성 명예교수는 사재를 털어서 만든 심도학사를 일반인을 위한 수도공동체로 만드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한국에서 성업 중인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나는 그게 ‘기복주의 신앙’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도, 불교도 모두 복을 달라고 빌지 않나. 복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을 복으로 생각하는가에 있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오늘날 그들의 이름으로 성업 중인 종교를 본다면 기가 막히지 않겠나.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요즘은 교회에서 누구도 ‘마음의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지구촌에서 제도 종교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첫 단추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에게 왜 종교가 필요한가.

 

“이 물음에 심리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이라고 답했다. 나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동물들은 DNA(유전자)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대로 산다. 동물은 인간처럼 고민하지 않는다. 우울증도 없다. 내가 강화도에서 살다 보니 집 주위에서 고라니를 종종 본다. 고라니는 우물쭈물하는 게 없다. 방황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냥 먹이를 좇아 산다. 그런 고라니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고민이 없으니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인간은 다르니까. 인간은 항상 어디로 가야할지 헤매니까.”

 

강화도 내가면에 위치한 '심도학사'. 길희성 명예교수가 입구에 서 있다. 김상선 기자

강화도 내가면의 심도학사에서 내려다보면 왼쪽으로 고려저수지, 오른쪽으로 서해 바다가 보인다. 김상선 기자

 

인간은 왜 헤맬 수밖에 없나.

 

“자신이 죽는다는 걸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게 동물과 인간의 큰 차이점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면 어떻겠나.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억울하고, 부자는 부자대로 억울한 거다. 그 많은 재산을 두고 가려니 얼마나 억울하겠나. 자신의 죽음을 아는 인간은 결국은 참된 행복에 대한 갈망을 품게 된다. 그것이 종교이고 영성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에 답하기 위함이다.”


길희성 교수는 “인간은 종교를 벗어나 살 수는 있지만, 영성 없이는 못 산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내가 왜 여기 있나. 그 이유가 뭔가. 온갖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이러한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게 영성이다. 그래서 영성은 종교의 핵심이자 존재 이유다. 기복신앙은 세속적 복락을 추구한다. 세속적 복락은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럼 영성은 제도권 안에 있나, 밖에 있나.

 

“영성은 제도권 종교 내에 머물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고, 종교와 비종교의 경계선을 허무는가 하면, 종교 간의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매우 유연하고 무정형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니 종교는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가 되어야 한다.”

 

길희성 명예교수가 서재에 꽂힌 장서를 가져와 종교와 영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길희성 명예교수가 1980년대 미국에서 가져온 볼온 서적이라며 마르크스오 엥겔스으 저서를 보여주고 있다. 또 슈바이처 박사가 쓴 음악가 바흐에 대한 책도 소개했다. 길 교수는 "슈바이처는 세계적인 신약학자"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종교가 명사가 되면 어찌 되나.

 

“기독교는 예수만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만 그렇다는 배타적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은 그런 배타성을 얘기하지 않았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분명히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내 형제 자매다’라고 했다. 그런데 교리화된 후세 기독교는 달리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양자는 될 수 있지만, 예수만 본성상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건 예수 이후에 만들어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다. 모든 인간을 품는 예수의 메시지를 후대의 기독교가 좁혀버린 것이다. 이런 게 종교가 명사가 될 때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 종교가 형용사가 될 때는 어떤가.

 

“종교가 명사가 될 때는 딱딱 자른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른다. 세례를 받았느냐, 교회에 나가느냐를 따진다. 그걸로 이쪽과 저쪽을 나눈다. 하지만 자비로운 불교 신자가 탐욕스런 목사보다 낫지 않나. 또 겸손하고 사랑을 베푸는 크리스천이 탐욕스런 주지 스님보다 낫지 않나. 종교가 형용사가 되면 달라진다. 명사가 될 때는 불가능한 많은 일이 형용사가 될 때는 가능해진다. 가령 예수를 닮은 불자, 부처를 닮은 크리스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얼마나 좋나.”

길희성 명예교수의 심도학사 서재에 종교 관련 책들이 꽂혀 있다. 책 사이사이에 영성과 명상의 수집품들이 올려져 있었다. 김상선 기자

길희성 명예교수는 "종교의 제도와 교리만 붙들게 된다면 자유와 초월, 평안과기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마지막으로 길희성 교수는 ‘주체적 생각’에 대해서 짚었다. “1958년『사상계』에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권두언이 실린 걸 봤다. 그게 엄혹한 군사정권하에서 민주주의 운동의 시발탄이 됐다. 나는 그걸 패러디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생각하는 신자라야 종교가 산다.’ 이제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넘어가야 한다. 제도 종교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강화=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개신교 장례예배에서 반야심경 읊어

 

길희성 명예교수는 "종교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가 되면 많은 일들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수년 년 전이었다. 길희성 교수의 지인이 모친상을 당했다. 지인은 크리스천이었다. 장례 예배의 추모사를 길 교수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고인은 불교 신자였다. 길 교수는 고민했다. ‘어떡해야 할까.’

궁리 끝에 한글로 된 ‘반야심경’을 미리 몇십 부 복사해서 가져갔다. 장례 예배에는 수십 명 교인이 참석했다. 모두 개신교 신자였다. 길 교수는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인은 평소 사랑을 많이 베푸셨습니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공(空)’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그리고 추모객들에게 한글 반야심경이 적힌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이윽고 길 교수가 ‘한글 반야심경’을 읊기 시작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추모객들도 모두 따라서 낭송했다. 길 교수는 “처음에는 걱정도 좀 했는데, 뒤로 갈수록 목청이 더 우렁차더라”고 말했다. 마지막 “아제아제 바라아제” 대목에서는 쩌렁쩌렁할 정도였다. 장례 예배가 끝난 뒤에 추모객들이 와서 말했다. “선생님, 덕분에 은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들 뜻 깊었다고 했다. 길 교수는 “종교가 형용사가 되면 이런 일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백성호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vangogh@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0.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