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AI 기사' 격전장에 괴물 '블랙홀'이 등장했다

해암도 2020. 4. 14. 08:33


중원에 마름모꼴 진지 구축하고 막강 전투력으로 9할 승률
"실력 감추고 실험중인 느낌… AI 판도 변화·포석 혁명 가능성"

바둑 인공지능(AI)들의 격전장인 인터넷 무림(武林)에 괴물이 등장했다. 출신국도, 제작자도 베일에 덮인 채 오직 알려진 건 '블랙홀'이란 이름뿐이다. 이 괴물은 3월 하순부터 CGOS(Computer Go Server)란 AI 전용 대국 사이트에 출몰해 기존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블랙홀이 괴물로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기이한 포석 때문이다. 귀[隅]에서 변(邊)으로, 변에서 중원으로 옮겨가는 기존 문법을 비웃듯 중원의 어정쩡해 보이는 네 곳부터 차지한다. 흑번·백번 구분 없이 모든 판에서 똑같이 중앙에 마름모꼴 진지를 구축한다. 바로 블랙홀이다.

이미지 크게보기블랙홀의 초반 4수 포진. 왼쪽은 흑번으로 267수만에, 오른쪽은 백번으로 316수 만에 불계승한 기보의 초반 진행이다. 두 판 상대는 모두 카타고이며 4월 4일 두었다.

 

그런데 이런 비상식적 포석으로 놀라운 승률을 올리고 있다. CGOS엔 변종 버전들 포함, 20여 종의 AI가 들어오는데, 블랙홀의 최신 5차 버전은 최근 212국에서 189승 23패(승률 89.2%)를 기록 중이다. 4월 4일 이후만 따지면 51승 1패다(이하 4월 13일 현재). 세계 4~6위권 인공지능으로 평가받는 릴라제로조차 블랙홀에 4승 66패(변종 버전 성적 합계)로 철저히 눌리고 있다.

CGOS 무림에서 블랙홀의 유일한 맞수는 카타고(katago)뿐이다.블랙홀이 유일한 열세(16승 18패)를 기록 중이다. 하지만 이건 최신 버전끼리의 대결 결과이고, 카타고의 다른 버전들은 블랙홀에 78전 전패로 참혹하게 당했다.

카타고는 요즘 국내 프로들이 가장 애용하는 AI로, 최근엔 줴이·골락시에 버금가는 세계 랭킹 3~4위권으로 평가받는 강자다. 카타고에게 3점으로 이겨낼 국내 프로는 30명 남짓에 불과할 것이란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CGOS 랭킹 1~3위는 카타고(3766점) 블랙홀(3750점) 릴라제로(3594점) 순이다. 블랙홀의 등장으로 AI 판도 재편도 불가피해졌다.

국가대표팀 코치 이영구 9단은 "변칙 포석 탓에 블랙홀은 20%대의 낮은 승률로 출발하고도 대등하게 싸운다. 이것은 정상 포진으로 임할 경우 무조건 이기는 실력이란 의미"라고 분석한다. "엄청나게 강한 AI가 본색을 드러내기에 앞서 실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다.

블랙홀의 '초반 4수'가 기존 포석의 경직된 사고 체계를 무너뜨릴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독특한 포진으로 성적이 상승하면 추종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신포석' '중국식 포석' '우주류'가 그랬다. 서봉수 9단은 전성기 때 "초반은 어디에 두어도 한 수 가치가 있다. 승패는 중반 전투에서 결정난다"는 소신을 밝힌 적이 있다.

블랙홀의 정체에 관해선 아직 알려진 게 없다. 구미권 컴퓨터 엔지니어의 작품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유튜브 채널 '인공지능 바둑 TV'를 통해 블랙홀 기보를 소개 중인 이주영 박사는 "컴퓨터 사양 등 기술적 데이터마저 베일에 가려있 다"며 답답해했다. 그는 국산 AI '바두기' 개발자이기도 하다.

신민준 9단은 "한없이 자유스러운 포석에 충격받았다. 함부로 따라 하긴 어렵겠지만 뭔가 새로운 세계를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2016년 말 홀연 등장해 각국 정상권 고수들을 상대로 60연승을 내달렸던 알파고 마스터를 보는 것 같다는 사람들도 있다. 블랙홀의 정체는 언제쯤 드러날까.


조선일보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입력 2020.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