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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스나이퍼는 누구일까?

해암도 2018. 7. 12. 15:52

“신은 많은 병력 편이 아니라 정확한 사수의 편에 선다”는 말을 증명한 저격수들

       
저격수나 전쟁을 미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사람의 목숨을 앗는 저격수의 세계에도 기록이 남는 만큼 ‘역사상 최고의 스나이퍼가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에서 자료를 찾고 기사를 작성했다.
미국의 최고 저격수 중 한 명인 크리스 카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한 장면.(사진=조선DB)
저격수를 뜻하는 스나이퍼(sniper)는 야생 도요새 스나이프(snipe)에서 나왔다. 18세기 인도의 영국군 장교 사이에 이 새를 쏘아 잡는 경쟁이 벌어졌다. 도요새는 워낙 작고 동작이 날래어 맞히기 어려웠다. 스나이프를 떨어뜨릴 만큼 총을 잘 쏘는 사람을 가리켜 그때부터 스나이퍼라고 불렀다.

저격수는 총알을 허비하지 않는다. ‘일발필중(one shot one kill)’이 모토다. 제1, 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 이라크전을 거치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1차대전 때 적 1명을 제거하는 데 들어간 탄약은 7000발, 2차대전 때는 2만 5000발이었다. 저격수들은 평균 1.7발을 사용했다. 저격수 한 명이 1개 중대(100명)만큼의 효과를 낸 셈이다.

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저격수의 한 발은 치명적인 위협이다. 철학자 볼테르가 “신은 많은 병력 편이 아니라 정확한 사수의 편에 선다”고 말한 대로다. 사람의 목숨을 앗는 저격수의 세계에도 기록이 남는다. 그렇다면 역사상 세계 최고의 스나이퍼는 누구일까.


‘백색 죽음’ 시모 해이해

핀란드의 저격수 시모 해이해. ‘백색 죽음’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1939년에 발발한 소련-핀란드 전쟁, 일명 ‘겨울전쟁’에서 스탈린군과 맞서 상상을 초월한 전과를 올렸다.(사진=조선DB)
대부분의 군사사(史) 전문가들은 핀란드의 저격수 시모 해이해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백색 죽음’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1939년에 발발한 소련-핀란드 전쟁, 일명 ‘겨울전쟁’에서 스탈린군과 맞서 상상을 초월한 전과를 올렸다.

평범한 농민이자 사냥꾼이었던 그는 겨울전쟁(1939. 12~1940. 3)에서 라이플총으로 542명을 저격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수치만이다. 기관단총으로 20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하니,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최소한 700명이 넘는다. 참전 일수가 90일 남짓하니, 하루 9~10명의 적군을 사살한 셈이다.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 상황에서 하얀색 옷을 입고 위장한 채 구식 총으로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히는 이 인간 사냥꾼은 소련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당황한 소련군 지휘부는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그가 쏜 것으로 보이는 총알이 날아오는 쪽으로 대규모 포격과 폭격을 가한 것이다. 결국 해이해는 턱과 왼쪽 뺨이 모두 날아가는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지만, 목숨은 구했다. 핀란드의 영웅으로 제대한 그가 개발한 전술은 지금도 전 세계 저격수들이 배우고 있다.


바실리 자이체프

소련군의 전설적 저격수였던 바실리 자이체프.(사진=조선DB)
스탈린그라드 박물관에는 소련군의 전설적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의 모신나강(M1891/30) 소총이 전시돼 있다. 총을 설명한 곳에는 “오른뺨에 총을 밀착, 스코프 십자가에 목표물이 메워지면 방아쇠를 …”이라고 적혀 있다.

1915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자이체프는 우랄산맥 일대에서 자라며 사냥 사격술을 배웠다. 태평양 함대에서 근무하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그는 1942년 10월부터 한 달여간 242명을 저격해 죽였다. 사용한 총알은 243발. 100% 가까운 명중률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엄청나게 활약한 그는 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저격부대 책임자가 되어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세 곳의 지점을 옮겨가며 넓은 목표 지역 내의 적들을 저격하는 전술을 전수했다. 자이체프가 양성한 저격수들은 2차대전 동안 6000명의 적을 사살했고 그의 저격 전술은 현대전의 교범으로 자리 잡았다.

종전 뒤 자이체프는 키예프에서 섬유업에 종사하다 1991년 76세의 나이로 숨졌다. 얄궂게도 소련 해체가 한창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자이체프를 모델로 한 영화도 있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년 작). 독일군을 적으로 돌리는 내용임에도 2001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자이체프 역은 할리우드 최고의 섹시남으로 꼽히는 주드 로가 맡았다.


크리스 카일

2012년 전쟁 경험담을 엮은 《아메리칸 스나이퍼(저격수)》출간 직후 촬영한 크리스 카일의 생전 모습. (사진=조선DB)
크리스 카일은 미 해군 특수전부대 네이비실의 저격수로 복무하며 이라크전을 통해 미군 역사상 최다 저격 기록(공식 160, 비공식 255명)을 수립한 스나이퍼다. 그가 이라크 전쟁에서 세운 ‘군공’은 경이로울 정도다. 2100야드(1.9㎞) 거리 밖에서 저격에 성공하는가 하면 총 한 자루로 도로에 고립된 아군 해병부대를 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갑작스럽게 벌어진 근접전에서 반군을 권총으로 쓰러뜨리기도 했다. 카일을 두려워한 이라크 반군들은 그에게 ‘악마’라는 뜻의 ‘알-샤이탄(al-Shaitan)’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다. 전투 파병이 끝난 후 해군 특수전 저격수 및 대(對) 저격수 팀 훈련과정 수석 교관으로 일하면서 최초의 네이비실 저격수 교본인 《해군 특수전 저격수 교리집》을 집필했다.

이런 활약 덕분에 카일은 은성훈장 2개, 동성훈장 5개, 해군과 해병대 근무유공훈장 2개, 그리고 해군과 해병대 공로표창을 받았다. 국가안보문제 유대연구소가 수여하는 ‘위대한 조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카일은 2013년 2월 2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앓는 미 해병대 저격수 출신 레이 라우스의 치료를 위해 텍사스주에 있는 사격장을 방문했다가 그에게 4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라우스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받았다.

크리스 카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극장에서만 2억 5000만 달러(약 2755억 원)의 수입을 거둬, 전쟁영화 역사상 미국 내 최고 수입 기록을 깼다. 이전까지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2억 1600만 달러)가 최고였다.

아직도 카일이 묻힌 텍사스 주립 묘지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병(老兵)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항상 성조기와 꽃이 에워싸고 있다. 참전 용사나 전쟁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카일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던 가치를 지킨 수호자로 받아들여진다.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죽음의 숙녀(Lady Death)’라 불린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유튜브 캡처)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 중에는 여성도 있다.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키예프 대학 역사학도였던 그는 1941년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보병으로 자원입대해 소련군 25사단에 배속돼 저격 훈련을 받았다. 파블리첸코는 오데사 전투에 투입돼 약 두 달 반 동안 무려 187명을 사살한 뒤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전투에 가담했다.

1942년 6월 박격포에 부상을 당해 전선을 떠날 때까지 그는 소련군 공식 집계로 309명을 저격했고, 그중 36명이 적의 저격병이었다. 그는 ‘죽음의 숙녀(Lady Death)’라 불렸지만, 아군에게는 상대 저격병을 사살한 구원의 천사이기도 했다.

국제적 영웅이던 파블리첸코는 캐나다와 미국, 영국 등지에 초대받아 대중 강연 등을 했고, 백악관에 초대받아 루스벨트와 그의 부인을 예방하기도 했다. 파블리첸코는 1943년 소련 영웅금성훈장을 탔고 소령 예편 전까지 저격 교관으로 복무했다. 종전 후 학위를 받은 뒤로는 사학자로 일했다. 1916년 7월 12일 태어나 1974년 10월 10일 별세했다. 그녀의 시신은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16세기에 건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에 안장됐다. 파블리첸코의 일대기 역시 2015년 영화로 개봉됐다. 제목은 〈1941: 세바스토폴 상륙작전〉.


마테우스 헤체나우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제3산악사단에 배치, 345명의 소련 병사를 저격한 독일 최고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 (유튜브 캡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독일 최고의 저격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제3산악사단에 배치, 345명의 소련 병사를 저격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최다 기록이다. 당시 제3산악사단장은 소련군 2개 중대의 공력을 헤체나우어의 저격만으로 물리쳤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헤체나우어는 특별한 지원 없이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전선의 은폐된 진지에서 소련군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었다고 증언했다.

“아군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날 밤, 포병이 공격준비사격을 했지만 우리수적으로 열세했고 탄약도 부족해 오히려 적의 대포병 사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단독으로 적 지휘관과 포병만을 골라 장거리 저격을 가했다. 결국 적은 잠잠해졌고 아군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헤체나우어는 동료에게 “두뇌가 우수한 사람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고 한다.


환갑을 넘긴 노년의 스나이퍼 아부 타신

173명의 이슬람국가(IS) 대원을 사살한 아부 타신.(사진=조선DB)
최근 활동 중인 저격수 중에서는 아부 타신이 첫손에 꼽힌다. 환갑을 넘긴 노년의 이 스나이퍼는 173명의 이슬람국가(IS) 대원을 사살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그는 2017년 5월 시아파 민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지금까지 저격수로 활동 중이다. 타신이 최고의 저격 실력을 갖춘 것은 풍부한 실전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제4차 중동전쟁과 이란-이라크전 등 총 5차례의 굵직한 전쟁에 참전했다고 데일리메일은 전했다. 타신은 “전쟁 후 은퇴해 지내다 내 고향을 지키기 위해 다시 총을 잡았다”면서 “IS의 누구도 우리 땅에 발을 내딛지 못하게 하겠다고 신께 약속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고향이 한눈에 보이는 산 위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밝혔다.


가장 먼 거리를 저격한 기록

베트남전 영웅 카를로스 해스콕.
베트남전 영웅인 미국의 카를로스 해스콕 상사 같은 뛰어난 저격수는 그 존재만으로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6월 미 제1해병사단 소속의 해스콕은 코끼리 계곡에서 잠복하던 중 개활지를 향해 일렬로 전진해오는 월맹군을 발견한다.

800m 떨어진 곳에 숨어 있던 해스콕 상사가 적의 선두 지휘관과 후미에 있던 부사관을 동시에 사살하자 월맹군은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얼마 후 총알이 날아오는 곳을 확인하려 고개를 든 월맹군은 모두 머리통이 날아가고 만다. 월맹군은 꼼짝 못 하고 더위와 갈증을 참으며 밤을 지새우고 저격수들은 교대로 조명탄을 쏘아 적군을 사살했다. 저격은 이렇게 5일 동안 지속됐고, 월맹군은 결국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이후 해스콕은 짐승을 뛰어넘는 ‘인내자’라고 불렸다. 해스콕은 미군의 저격학교 시스템을 정립하다시피 했다. 미 해병대 저격학교의 모토인 ‘One shot, one kill’을 만든 것이 해스콕이다.

해스콕은 가장 먼 거리(2286m)를 저격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의 기록은 2002년 아프간전쟁에서 캐나다군의 롭 펄롱이 2430m에서 적군을 저격함으로써 비로소 깨졌고, 이 기록 역시 2009년 11월 영국 육군의 크레이그 해리슨이 아프간에서 2475m의 저격에 성공하면서 깨졌다.

2017년 6월 23일 CNN은 캐나다 특수부대 사령부를 인용해 이 사령부 소속의 한 스나이퍼는 3540m 거리에서 목표 대상을 사격해 명중했다고 보도했다. 이 스나이퍼는 모술 전선 후방에서 이라크군을 도와 수니파 급진 무장세력 IS와 싸우는 캐나다 최정예 특수부대 JTF-2 소속이다. JTF-2 측은 군 보안상의 이유로 언제, 어떻게 저격이 성공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JTF-2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종전 세계 신기록을 크게 뛰어넘는다.


천부적 자질과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력

저격수는 천부적인 사격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틀 동안 꼼짝하지 않고 사격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하다. 영화나 게임에서처럼 뛰어다니며 저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전증을 피하기 위해 술을 마셔도 안 되고 완벽한 매복을 위해 담배도 금물이다. 눈도 아주 좋아야 한다. 위장을 구별하기 위해 색맹이 없어야 하고 나안시력도 2.0 이상이어야 한다. 한국 정규군에 스나이퍼가 필요하다고 최초로 주장한 저격수 전문가 황광한 예비역 준장은 “모기가 물어도 꿈쩍 않는 인내력이 필요하다”며 “전설의 스나이퍼 해스콕은 엎드린 자세로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속옷도 안 입었다”고 했다.



2018년 05월호   글 : 최우석 조선뉴스프레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