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 신영복 선생은, 겨울철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것을 정겹게 일컬어 ‘원시적 우정’이라 했습니다. 오늘 세계 각지에서 모인 우리들의 우정이 강원도의 추위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리라 믿습니다.〉
(2018년 2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의 평창 동계올림픽 리셉션 연설 중)
(2018년 2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의 평창 동계올림픽 리셉션 연설 중)
1979년 5월 17일 자 이범석 대사의 보고. 북한이 인도받기를 원하는 대상자 이름 중에 ‘신영복’이 보인다. |
1978년 12월 인도 뉴델리, 북한 측 대표단이 입을 열었다.
“이 회담은 남선(南鮮·남한-편집자 주) 혁명가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남선 인원과의 교환을 위한 것으로서… 피고인의 입장에 있는 남선 측은 재판관인 북선(北鮮·북한-편집자 주)의 요구에 따라 본인의 출생지와 거주지에 관계없이 당연히 이들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남선 측은 남선 출신 ‘혁명가’들을 연고자 때문에 못 주겠다고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그 가족을 함께 받을 용의가 있다.”
북한이 이토록 애타게 데려가고 싶어 했던 ‘남선 혁명가’는 누구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 동계올림픽 리셉션 환영사에서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라고 밝혀 새삼 조명된 신영복(申榮福·1941~2016) 성공회대 교수다. 이 사실은 2016년 외교부가 ‘베트남 억류공관원 석방교섭 회담(뉴델리 3자회담)’ 외교문서철을 비밀해제하면서 밝혀졌다. 재미(在美)언론인 안치용씨가 이 사실을 최초 보도했던 2016년 7월 당시에는 이 외교문서철이 전문(全文) 공개되어 있었으나, 기자가 2018년 3월 외교부 산하 외교사료관을 방문해 문서를 확인했을 때는 일부 비공개로 전환된 상태였다. 다행히 국가기록원에서 외교부가 비공개 처리한 기록물의 사본을 열람할 수 있었다.
베트남에 억류된 외교관들
“이 회담은 남선(南鮮·남한-편집자 주) 혁명가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남선 인원과의 교환을 위한 것으로서… 피고인의 입장에 있는 남선 측은 재판관인 북선(北鮮·북한-편집자 주)의 요구에 따라 본인의 출생지와 거주지에 관계없이 당연히 이들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남선 측은 남선 출신 ‘혁명가’들을 연고자 때문에 못 주겠다고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그 가족을 함께 받을 용의가 있다.”
북한이 이토록 애타게 데려가고 싶어 했던 ‘남선 혁명가’는 누구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 동계올림픽 리셉션 환영사에서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라고 밝혀 새삼 조명된 신영복(申榮福·1941~2016) 성공회대 교수다. 이 사실은 2016년 외교부가 ‘베트남 억류공관원 석방교섭 회담(뉴델리 3자회담)’ 외교문서철을 비밀해제하면서 밝혀졌다. 재미(在美)언론인 안치용씨가 이 사실을 최초 보도했던 2016년 7월 당시에는 이 외교문서철이 전문(全文) 공개되어 있었으나, 기자가 2018년 3월 외교부 산하 외교사료관을 방문해 문서를 확인했을 때는 일부 비공개로 전환된 상태였다. 다행히 국가기록원에서 외교부가 비공개 처리한 기록물의 사본을 열람할 수 있었다.
베트남에 억류된 외교관들
이대용 전 주월공사. |
남(南)베트남이 패망한 1975년 4월 30일, 공산화된 베트남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우리 외교관은 9명이었다. 이들 중 최선임자는 이대용(李大鎔) 공사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남베트남 한국대사관 무관(대령)으로 재직하였고 1968년 준장 진급 후 다시 파월(派越)되어 한국대사관 공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6·25 남침 직후 6사단 장교로서 춘천 지역 방어에서 공을 세웠고, 북진 때는 가장 먼저 압록강에 이르러 일시적으로 통일의 기분을 만끽하였던 이다.
북(北)베트남 공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북한은 이들 한국 외교관 9명의 신병(身柄) 인도를 요구하고 나선다. 외교관은 ‘빈 협약’에 의거 면책특권(免責特權)을 가진다. 어떤 형태의 체포 또는 구금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형사재판 면제권을 가진다. 교전(交戰) 당사국 내에 상대국인 적국(敵國) 외교관이 머물러 있어도 제3국을 통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 당시 한국은 미국과 함께 남베트남 측에서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전쟁을 치렀고, 북한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잔류 한국 외교관들을 북한으로 데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9명의 외교관 중 6명은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북베트남 공산 정부의 퇴거 조치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3명은 북한의 방해공작으로 사이공에서 계속 억류되어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경무관이 바로 그들이다. 이 공사와 안 영사는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 서 경무관은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 소속 총경으로 대사관 내에서 정보를 다루는 특수 신분이었다. 때문에 북한이 ‘거물급 인사’로 표적 삼아 북송공작(北送工作)을 벌인 것이다.
특히 이대용 공사는 황해도 출신의 현직 외교관이자 6·25 참전 영웅으로서 선전 가치가 매우 컸다.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은 이 공사를 전향(轉向)시켜 북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일곱 차례에 걸쳐 신문하며 설득하였다. 북한에 남아 있는 누님과 조카를 들먹이며 회유하는 한편 ‘북반부에서 도망친 도주범’이라며 평양으로 강제로 데려가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북베트남 특수경찰들도 시시때때로 이 공사를 신문하며 ‘가이따우(改造·사상전향)’하지 않으면 총살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협박했다. 이 공사는 치화형무소의 햇볕도 안 드는 방에 갇혀 78kg이던 몸무게가 46kg이 되도록 인권유린을 당하면서도 끝내 그들이 요구하는 ‘북한 망명 자술서’를 쓰지 않았다.
이대용 공사는 저서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외교관을 강제로 납치해 간다는 것은 국제법상 위법이다. 그러나 자의(自意)에 의한 타국으로의 망명은 불법이 아니다. 내가 자의에 의해 북한으로 망명한다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서명한다면, 그것으로 나의 평양행은 합법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북한 노동당 3호 청사 측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베트남 안닝노이찡(安寧內政·베트남 특수경찰)과 협조하여 나에게 참기 어려운 굶주림, 육체적 고통, 공갈, 협박, 그리고 함정으로 몰아넣는 회유책을 쓸 것이다. 앞으로 계속적으로 수도 없이 많이 이루어질 신문에서 어떠한 강압적인 변고가 일어날 것인가? 죽어야 할 시기가 오면 깨끗하게 목숨을 끊어야 한다. 나는 결심을 더 굳게 다졌다.〉
뉴델리 3자회담과 ‘남한 출신 혁명가’
북(北)베트남 공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북한은 이들 한국 외교관 9명의 신병(身柄) 인도를 요구하고 나선다. 외교관은 ‘빈 협약’에 의거 면책특권(免責特權)을 가진다. 어떤 형태의 체포 또는 구금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형사재판 면제권을 가진다. 교전(交戰) 당사국 내에 상대국인 적국(敵國) 외교관이 머물러 있어도 제3국을 통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 당시 한국은 미국과 함께 남베트남 측에서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전쟁을 치렀고, 북한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잔류 한국 외교관들을 북한으로 데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9명의 외교관 중 6명은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북베트남 공산 정부의 퇴거 조치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3명은 북한의 방해공작으로 사이공에서 계속 억류되어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경무관이 바로 그들이다. 이 공사와 안 영사는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 서 경무관은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 소속 총경으로 대사관 내에서 정보를 다루는 특수 신분이었다. 때문에 북한이 ‘거물급 인사’로 표적 삼아 북송공작(北送工作)을 벌인 것이다.
특히 이대용 공사는 황해도 출신의 현직 외교관이자 6·25 참전 영웅으로서 선전 가치가 매우 컸다.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은 이 공사를 전향(轉向)시켜 북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일곱 차례에 걸쳐 신문하며 설득하였다. 북한에 남아 있는 누님과 조카를 들먹이며 회유하는 한편 ‘북반부에서 도망친 도주범’이라며 평양으로 강제로 데려가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북베트남 특수경찰들도 시시때때로 이 공사를 신문하며 ‘가이따우(改造·사상전향)’하지 않으면 총살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협박했다. 이 공사는 치화형무소의 햇볕도 안 드는 방에 갇혀 78kg이던 몸무게가 46kg이 되도록 인권유린을 당하면서도 끝내 그들이 요구하는 ‘북한 망명 자술서’를 쓰지 않았다.
이대용 공사는 저서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외교관을 강제로 납치해 간다는 것은 국제법상 위법이다. 그러나 자의(自意)에 의한 타국으로의 망명은 불법이 아니다. 내가 자의에 의해 북한으로 망명한다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서명한다면, 그것으로 나의 평양행은 합법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북한 노동당 3호 청사 측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베트남 안닝노이찡(安寧內政·베트남 특수경찰)과 협조하여 나에게 참기 어려운 굶주림, 육체적 고통, 공갈, 협박, 그리고 함정으로 몰아넣는 회유책을 쓸 것이다. 앞으로 계속적으로 수도 없이 많이 이루어질 신문에서 어떠한 강압적인 변고가 일어날 것인가? 죽어야 할 시기가 오면 깨끗하게 목숨을 끊어야 한다. 나는 결심을 더 굳게 다졌다.〉
뉴델리 3자회담과 ‘남한 출신 혁명가’
이대용 공사 송환을 위한 남북대화 때 우리 측 수석대표였던 이범석 당시 주인도 대사. |
한국 정부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이들 억류 공관원을 석방하기 위해 프랑스, 미국, 스웨덴, 유엔 등 가능한 모든 채널을 동원하고 있었다. 마침내 베트남에서 반응이 왔다. 주(駐)베트남 프랑스 대사가 북베트남 공산 정부의 고위층 인사에게 한국 외교관 석방을 권유하자 “북한이 한국 공관원 석방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조치와 계기 없이는 석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우선 목표는 억류 공관원들의 조기(早期) 석방”이라는 지침을 주었다. 프랑스의 중개로 한국에 억류 중인 북한 간첩들과 우리 공관원들의 교환 교섭을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다. 1978년 극비리에 진행된 ‘베트남 억류 공관원 석방 교섭을 위한 뉴델리 3자회담’이 그것이다.
우리 정부는 3자회담을 진행하는 한편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치화형무소에 갇혀 있는 이대용 공사에게 이순흥 베트남 교민회장을 통로로 외무부 장관 훈령을 전달한다. “현재 억류된 3명의 외교관 석방을 위해 한국, 북베트남 공산 정부, 북한이 3자회담을 하고 있으며 본인 의사에 반해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북한 요원의 협박과 공갈에 겁내지 말고 버텨라”는 내용이었다.
1978년 7월 24일 막을 연 3자회담 본회담에서 우리 정부는 이범석(李範錫·외무부 장관·대통령비서실장 역임. 아웅산사태 때 순국) 인도 대사가 수석으로, 하태준 중앙정보부 제1차장보와 공로명(孔魯明·외무부 장관 역임) 외무부 아주국장, 송한호(宋漢虎·통일원 차관 역임) 중앙정보부 아주국장이 대표로 나섰다. 북한 측은 조명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수석대표로 박영수, 한영국, 김완수 등이 대표로 참석했다. 북측 대표로 참석한 박영수는 억류된 이대용 공사를 찾아가 북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회유, 협박, 신문했던 사람이다.
간첩보다 ‘남한혁명가’ 더 중시
우리 정부는 3자회담을 진행하는 한편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치화형무소에 갇혀 있는 이대용 공사에게 이순흥 베트남 교민회장을 통로로 외무부 장관 훈령을 전달한다. “현재 억류된 3명의 외교관 석방을 위해 한국, 북베트남 공산 정부, 북한이 3자회담을 하고 있으며 본인 의사에 반해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북한 요원의 협박과 공갈에 겁내지 말고 버텨라”는 내용이었다.
1978년 7월 24일 막을 연 3자회담 본회담에서 우리 정부는 이범석(李範錫·외무부 장관·대통령비서실장 역임. 아웅산사태 때 순국) 인도 대사가 수석으로, 하태준 중앙정보부 제1차장보와 공로명(孔魯明·외무부 장관 역임) 외무부 아주국장, 송한호(宋漢虎·통일원 차관 역임) 중앙정보부 아주국장이 대표로 나섰다. 북한 측은 조명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수석대표로 박영수, 한영국, 김완수 등이 대표로 참석했다. 북측 대표로 참석한 박영수는 억류된 이대용 공사를 찾아가 북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회유, 협박, 신문했던 사람이다.
간첩보다 ‘남한혁명가’ 더 중시
1978년 11월 17일 이범석 대사의 보고. 북한 측이 ‘수령님의 명령’ 운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한국과 북한, 북베트남 공산 정부의 3자 비밀협상은 사실상 한국과 북한의 양자(兩者) 대화로 진행됐다. 회담은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남한에서 복역 중인 북한 간첩’들과 베트남에 억류된 공관원들의 교환으로 이해하고 회담에 나섰던 우리 측에 북한이 ‘체포 구금된 남조선 혁명가들’로 교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 실랑이가 시작됐다. 교환 비율에 있어서도 우리 정부는 1대 1을, 북한은 1대 70을 요구하고 나섰다. 무려 4개월여의 논쟁 끝에야 비로소 억류 외교관 1명당 7명, 총 21명을 북한에 인도하기로 합의했다.
교환 비율 합의 과정에서 이범석 대사가 서울에 보낸 긴급 전보에는 중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교환 비율의 타결이 임박했던 1978년 11월 17일, 조남일 북측 수석의 요청으로 이 대사가 개별접촉을 갖는다. 조 수석은 북한이 제시한 1대 7 타결안을 우리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까 안달하는 모양새로 이런 말을 덧붙인다.
“1대 7이 사실은 김일성 수령의 명령이다. 우리들 체제상 ‘수령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은 남측도 잘 알지 않는가?”
이 3자회담에 김일성이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다음엔 북한에 인도할 21명의 명단 선정이 쟁점이 되었다. 우리는 북측에 인도받길 원하는 21명의 명단을 일괄 제출할 것을 요구했으나 북(北)은 1차 회의에 1명, 2차 회의에 1명 등 산발적으로 이름을 제시했다. 우리 정부가 “이미 사형이 집행된 사람”이라고 답하면 사형 집행 증거를 제시하라는 등 무리한 주장을 계속했다. 우리 측 대표가 “더 이상 개별 확인은 없다”며 명단의 일괄 제시를 강력하게 요구하자 3차 회의에서 7명, 4차 회의에서 12명, 총 21명(1~4차)의 명단을 전달해 왔다.
북한이 제시한 21명을 확인해 보니 사형이 집행된 자가 13명, 무기수(無期囚) 7명, 유기수(有期囚) 1명이었다. 살아서 복역 중인 8명은 모두 남한 출신이었다. 복역 중인 8명 중 3명이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남한 내 지하당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이었다. 우리 대표는 “북괴 측은 우리의 회담 진전을 위한 성의를 역이용, 이 회담을 대남(對南) 간첩의 재고조사를 위한 기회로 악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한편 교환 대상에 남한 출신은 포함될 수 없으며 남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도 넘겨줄 수 없다는 기본 입장을 유지했다. “억류 인원의 교환 결과로 말미암아 비인도적 결과, 즉 이산가족 발생이라는 비극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측 대표가 북한 출신 남파간첩 및 재일교포 출신 중형자(重刑者)들의 명단 제시를 권하자 북측은 “필요치 않다”며 남한 출신 복역자의 인도를 다음과 같이 끈질기게 고집했다. 이는 북한 정권이 남파간첩이나 재일교포 간첩보다는 남한 내의 김일성 추종자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北, “가족도 함께 받을 용의 있다”
〈“남한 출신 혁명가는 정말로 넘겨줄 수 없는가? 남한 출신 혁명가를 남한 내 가족문제로 인하여 넘겨주기가 곤란하다면 가족과 함께 넘겨주면 어떤가? 이 경우 그 가족도 21명 속에 계산할 용의가 있다.”(1978년 12월 4일 1차 회의)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도를 거부한다면 회담이 성립될 수 없다.”(1978년 12월 8일 3차 회의)
“이 회담은 ‘남선 혁명가’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남선 인원과의 교환을 위한 것으로서 ‘남선 혁명가’ 중에는 남한 출신자가 당연히 포함된다. 남한 출신자를 인도할 수 없는 입장이 진정 강하다면 이 회담은 결렬될 수밖에 없다.”(1978년 12월 11일 4차 회의)
“남한 출신자는 진정 인도가 불가한 것인가? 그렇다면 회담의 장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형편이라면 월남(북베트남 공산 정부)을 시켜 회담을 그만두도록 할 수밖에 없다.”(1978년 12월 15일 6차 회의)
“억류 인원의 교환에 있어 요청자의 의사에 따라 인원을 넘겨준다는 것은 국제관례에 비추어서도 당연한 것이다. 피고인의 입장에 있는 남선 측은 재판관인 북선의 요구에 따라 본인의 출생지와 거주지에 관계없이 당연히 이들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1978년 12월 16일 7차 회의)
“21명 중 기(旣) 사형 집행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있으나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러나 현재 살아 있는 8명에 대해서는 어떤 성의를 보여주어야 다음 명단 토의에 들어갈 수 있을 것 아니냐?”(1978년 12월 21일 양측 대표 개별접촉)
“살아 있다고 한 8명에 대해서는 이들을 전원 인도해 주고 기 사형 집행된 자에 대해서는 믿을 수 있도록 납득시켜 주어야 다음 명단 토의에 들어갈 수 있다.”(1978년 12월 26일 양측 대표 개별접촉)
“남선 측은 남선 출신 ‘혁명가’들을 연고자 때문에 못 주겠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 가족을 함께 받을 용의가 있다고 시사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천명코자 한다.”(1978년 12월 28일 남북 대표 4자회담)〉
북한이 간절하게 데려가고 싶어 했던 사람, 신영복
북한 대표들이 집요하게 ‘남한 출신 혁명가’를 인도해 달라고 주장하는 강도(强度)로 미뤄 교환 비율 합의에서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직접 관심사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산가족 발생이 우려된다면 “가족과 함께 넘겨주면 어떤가”라고까지 물고 늘어진다. 심지어 “이 회담을 통해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 동(同) 사실을 월남에 통보해 주면 월남은 억류하고 있는 남한 외교관 3명을 월남법에 따라 재판해 사형을 집행하고 그 사실을 신문에 공포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우리 정부는 자국민 보호 원칙을 내세우는 한편, “북괴 측이 남한에 본적을 두고 있는 자들의 인도를 통하여 남한에도 자생 혁명가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 가족까지 데려가려는 의도는 가족을 인질로 하여 재차 남파시킬 것과 가족들이 대한민국에 염증을 느껴 북으로 왔다고 국내외 모략 선전에 이용할 것으로 사료되므로 인도 불가”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우리 정부는 북한 출신으로 구성된 21명의 자체 명단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북측은 이어 우리가 제시하는 북한 출신 10명, 북한이 제시하는 남한 출신 11명으로 명단을 확정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북한이 제시한 남한 출신 11명이 진정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던 사람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최후의 최후까지 간절하게 원하던 사람들 중에 바로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던 신영복이 있다. 신영복의 이름은 3차 회의에서 북한이 제시한 7명 명단에 처음 등장한다. 북측은 “신영복은 독신자로 이산가족이 생기는 ‘비인도적 결과’가 초래하지 않는다”며 끈질기게 인도를 요구했다.
당시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 관련 반(反)국가 단체인 ‘민족해방전선’ 결성 모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다. 통혁당은 북한 노동당의 남한 내 지하당(地下黨) 조직으로서 북한 노동당의 지령과 공작금으로 운영됐으며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 요인암살·정부전복을 하려다가 일망타진되었다. 신영복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로서 김질락 등 통혁당 사건의 핵심 인물들과 자주 만나 지시를 받고 청년들을 포섭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서울(외무부)에서 회담 대표자들에게 보낸 ‘북한 요구 교환 대상자에 대한 인적사항’ 자료에는 신영복에 대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남한 출신 무기수, 재북 가족 없음, 1968년 8월 16일 간첩죄 등으로 검거, 형 인도일 1970년 4월 30일, 전향일 1970년 12월 21일, 근면 성실.〉
서울에선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린다.
“북괴 측이 요구한 이○○, 신영복은 이북에 연고자가 없으며 검거 후 조기에 사상 전향하여 남한 내 가족들과 긴밀히 접촉을 지속하고 있으므로 ‘출신지에 관계없이 전향한 좌익수를 본인 의사에 반하여 인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지난 훈령에 준하여 절대 인도 불가하다.”
이어 남한 출신 전향 좌익수의 인도문제에 대해 “출신지가 남북한 어디이든 간에 기히 전향한 좌익수를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인도하는 것은 국가의 자국민 보호원칙, 우리의 반공정책,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절대 불가하며, 대상자의 전향 여부도 밝히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시하고 있다.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북한 관계 급랭(急冷)
시간낭비만 하며 이견(異見)이 좁혀지지 않는 회담만 계속되던 1978년 12월부터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북한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우리 측 수석대표 이범석 주(駐)인도 대사가 응우옌 반 신(Nguyen Van Sinh) 인도 주재 베트남 대사와 비공식 개별 접촉을 해보니 초기 베트남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베트남 대사는 개인 의견을 전제로 “베트남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 이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억류하고 있는 3명의 한국 인사를 북한에 인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다. 이어 북한 측이 남한 측에 한, “남한 외교관 3명을 월남법에 따라 재판해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위협 발언에 냉소적 논평을 한다.
“하노이 정부가 나와는 별도로 조명일과 직접 통신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본국 정부로부터 그런 훈령을 받은 바도 없고 사람을 죽임으로써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이 월맹 정부의 방침이다.”
1979년 1월 12일 자 《로동신문》은 사설에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과 관련하여 “월남이 캄푸차(캄보디아)의 독립과 주권을 유린했다. 월남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월남의 무력침공은 국제법 위반인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신용추락”이라고 비난했다. 양측 관계가 급랭(急冷)하기 시작한 것이다. 3자회담에 대표로 참석했던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 변화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79년 3월 19일 이범석 대사와 신 베트남 대사의 접촉에서 이 대사가 북한이 교환 대상자 명단 접수를 거부하고 있어 회담의 진전을 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베트남이 중간 역할을 해줄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베트남 대사는 “현재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는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는 말을 했다. 그 전날의 접촉에서도 신 대사는, 이범석 대사가 “인도차이나 정세가 많이 변화된 이때, 하노이 정부가 이 문제를 재평가할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고 묻자 “아직까지 그런 시사를 받은 적은 없으나 북한 태도에 베트남이 불유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 덧붙였던 것도 주목되는 일이었다.〉
회담 결렬
이 무렵 3자회담에 임하고 있던 한국 대표단에 상부로부터 특별훈령이 하달됐다.
〈가. 현재 진행 중인 회담은 적절한 명분을 내세워 모양 좋게 즉시 결렬시킬 것. 결렬 이유는 억류 중인 우리 외교관에 대한 구제책을 다른 방법으로 강구할 수 있는 전망이 있기 때문임.
나. 향후 북괴 측에서 회담 계속을 종용하는 태도로 나오더라도 북괴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명분을 내세워 회담을 결렬시키고 이를 정식으로 북괴 측에 최후 통첩할 것.
다. 회담 결렬 직후 월남 측에 대해 북괴의 무성의한 태도 및 비인간적 처사로 인하여 북괴와의 회담 지속은 무의미하며 시간낭비이므로 부득이 회담이 결렬됐음을 정식으로 통고할 것.
라. 동 회담 결렬 사실을 인도 정부 측에도 적절히 통보하되 결렬 책임이 북한 측에 있다는 점을 설명해 둘 것.〉
북한과의 협상 없이도 억류 외교관 3명을 자력(自力)으로 구출할 수 있으니 회담을 결렬시키라는 지시였다. 이범석 대사는 훈령에 따라 1979년 5월 23일 남북한 비공식 회담에서 회담 종결을 선언했다. 북한 수석대표 조명일은 “한국 측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회담을 깨버릴 생각이 없다”고 매달렸지만 이 대사는 회담 종료 후 신 베트남 대사를 만나 남북한 회담 종결을 통보했다. 교환 비율 결정에 4개월, 명단 선정에 7개월. 근 일 년의 지루한 공방에서 ‘남한 출신 혁명가’를 고집하던 북한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자국민 북송은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기에 신영복씨는 한국에서 여생(餘生)을 보낼 수 있었고 여러 권의 책을 썼으며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10·26으로 중단되었다가 성공
교환 비율 합의 과정에서 이범석 대사가 서울에 보낸 긴급 전보에는 중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교환 비율의 타결이 임박했던 1978년 11월 17일, 조남일 북측 수석의 요청으로 이 대사가 개별접촉을 갖는다. 조 수석은 북한이 제시한 1대 7 타결안을 우리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까 안달하는 모양새로 이런 말을 덧붙인다.
“1대 7이 사실은 김일성 수령의 명령이다. 우리들 체제상 ‘수령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은 남측도 잘 알지 않는가?”
이 3자회담에 김일성이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다음엔 북한에 인도할 21명의 명단 선정이 쟁점이 되었다. 우리는 북측에 인도받길 원하는 21명의 명단을 일괄 제출할 것을 요구했으나 북(北)은 1차 회의에 1명, 2차 회의에 1명 등 산발적으로 이름을 제시했다. 우리 정부가 “이미 사형이 집행된 사람”이라고 답하면 사형 집행 증거를 제시하라는 등 무리한 주장을 계속했다. 우리 측 대표가 “더 이상 개별 확인은 없다”며 명단의 일괄 제시를 강력하게 요구하자 3차 회의에서 7명, 4차 회의에서 12명, 총 21명(1~4차)의 명단을 전달해 왔다.
북한이 제시한 21명을 확인해 보니 사형이 집행된 자가 13명, 무기수(無期囚) 7명, 유기수(有期囚) 1명이었다. 살아서 복역 중인 8명은 모두 남한 출신이었다. 복역 중인 8명 중 3명이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남한 내 지하당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이었다. 우리 대표는 “북괴 측은 우리의 회담 진전을 위한 성의를 역이용, 이 회담을 대남(對南) 간첩의 재고조사를 위한 기회로 악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한편 교환 대상에 남한 출신은 포함될 수 없으며 남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도 넘겨줄 수 없다는 기본 입장을 유지했다. “억류 인원의 교환 결과로 말미암아 비인도적 결과, 즉 이산가족 발생이라는 비극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측 대표가 북한 출신 남파간첩 및 재일교포 출신 중형자(重刑者)들의 명단 제시를 권하자 북측은 “필요치 않다”며 남한 출신 복역자의 인도를 다음과 같이 끈질기게 고집했다. 이는 북한 정권이 남파간첩이나 재일교포 간첩보다는 남한 내의 김일성 추종자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北, “가족도 함께 받을 용의 있다”
〈“남한 출신 혁명가는 정말로 넘겨줄 수 없는가? 남한 출신 혁명가를 남한 내 가족문제로 인하여 넘겨주기가 곤란하다면 가족과 함께 넘겨주면 어떤가? 이 경우 그 가족도 21명 속에 계산할 용의가 있다.”(1978년 12월 4일 1차 회의)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도를 거부한다면 회담이 성립될 수 없다.”(1978년 12월 8일 3차 회의)
“이 회담은 ‘남선 혁명가’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남선 인원과의 교환을 위한 것으로서 ‘남선 혁명가’ 중에는 남한 출신자가 당연히 포함된다. 남한 출신자를 인도할 수 없는 입장이 진정 강하다면 이 회담은 결렬될 수밖에 없다.”(1978년 12월 11일 4차 회의)
“남한 출신자는 진정 인도가 불가한 것인가? 그렇다면 회담의 장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형편이라면 월남(북베트남 공산 정부)을 시켜 회담을 그만두도록 할 수밖에 없다.”(1978년 12월 15일 6차 회의)
“억류 인원의 교환에 있어 요청자의 의사에 따라 인원을 넘겨준다는 것은 국제관례에 비추어서도 당연한 것이다. 피고인의 입장에 있는 남선 측은 재판관인 북선의 요구에 따라 본인의 출생지와 거주지에 관계없이 당연히 이들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1978년 12월 16일 7차 회의)
“21명 중 기(旣) 사형 집행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있으나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러나 현재 살아 있는 8명에 대해서는 어떤 성의를 보여주어야 다음 명단 토의에 들어갈 수 있을 것 아니냐?”(1978년 12월 21일 양측 대표 개별접촉)
“살아 있다고 한 8명에 대해서는 이들을 전원 인도해 주고 기 사형 집행된 자에 대해서는 믿을 수 있도록 납득시켜 주어야 다음 명단 토의에 들어갈 수 있다.”(1978년 12월 26일 양측 대표 개별접촉)
“남선 측은 남선 출신 ‘혁명가’들을 연고자 때문에 못 주겠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 가족을 함께 받을 용의가 있다고 시사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천명코자 한다.”(1978년 12월 28일 남북 대표 4자회담)〉
북한이 간절하게 데려가고 싶어 했던 사람, 신영복
북한 대표들이 집요하게 ‘남한 출신 혁명가’를 인도해 달라고 주장하는 강도(强度)로 미뤄 교환 비율 합의에서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직접 관심사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산가족 발생이 우려된다면 “가족과 함께 넘겨주면 어떤가”라고까지 물고 늘어진다. 심지어 “이 회담을 통해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 동(同) 사실을 월남에 통보해 주면 월남은 억류하고 있는 남한 외교관 3명을 월남법에 따라 재판해 사형을 집행하고 그 사실을 신문에 공포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우리 정부는 자국민 보호 원칙을 내세우는 한편, “북괴 측이 남한에 본적을 두고 있는 자들의 인도를 통하여 남한에도 자생 혁명가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 가족까지 데려가려는 의도는 가족을 인질로 하여 재차 남파시킬 것과 가족들이 대한민국에 염증을 느껴 북으로 왔다고 국내외 모략 선전에 이용할 것으로 사료되므로 인도 불가”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우리 정부는 북한 출신으로 구성된 21명의 자체 명단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북측은 이어 우리가 제시하는 북한 출신 10명, 북한이 제시하는 남한 출신 11명으로 명단을 확정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북한이 제시한 남한 출신 11명이 진정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던 사람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최후의 최후까지 간절하게 원하던 사람들 중에 바로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던 신영복이 있다. 신영복의 이름은 3차 회의에서 북한이 제시한 7명 명단에 처음 등장한다. 북측은 “신영복은 독신자로 이산가족이 생기는 ‘비인도적 결과’가 초래하지 않는다”며 끈질기게 인도를 요구했다.
당시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 관련 반(反)국가 단체인 ‘민족해방전선’ 결성 모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다. 통혁당은 북한 노동당의 남한 내 지하당(地下黨) 조직으로서 북한 노동당의 지령과 공작금으로 운영됐으며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 요인암살·정부전복을 하려다가 일망타진되었다. 신영복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로서 김질락 등 통혁당 사건의 핵심 인물들과 자주 만나 지시를 받고 청년들을 포섭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서울(외무부)에서 회담 대표자들에게 보낸 ‘북한 요구 교환 대상자에 대한 인적사항’ 자료에는 신영복에 대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남한 출신 무기수, 재북 가족 없음, 1968년 8월 16일 간첩죄 등으로 검거, 형 인도일 1970년 4월 30일, 전향일 1970년 12월 21일, 근면 성실.〉
서울에선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린다.
“북괴 측이 요구한 이○○, 신영복은 이북에 연고자가 없으며 검거 후 조기에 사상 전향하여 남한 내 가족들과 긴밀히 접촉을 지속하고 있으므로 ‘출신지에 관계없이 전향한 좌익수를 본인 의사에 반하여 인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지난 훈령에 준하여 절대 인도 불가하다.”
이어 남한 출신 전향 좌익수의 인도문제에 대해 “출신지가 남북한 어디이든 간에 기히 전향한 좌익수를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인도하는 것은 국가의 자국민 보호원칙, 우리의 반공정책,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절대 불가하며, 대상자의 전향 여부도 밝히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시하고 있다.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북한 관계 급랭(急冷)
시간낭비만 하며 이견(異見)이 좁혀지지 않는 회담만 계속되던 1978년 12월부터 북베트남 공산 정부와 북한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우리 측 수석대표 이범석 주(駐)인도 대사가 응우옌 반 신(Nguyen Van Sinh) 인도 주재 베트남 대사와 비공식 개별 접촉을 해보니 초기 베트남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베트남 대사는 개인 의견을 전제로 “베트남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 이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억류하고 있는 3명의 한국 인사를 북한에 인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다. 이어 북한 측이 남한 측에 한, “남한 외교관 3명을 월남법에 따라 재판해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위협 발언에 냉소적 논평을 한다.
“하노이 정부가 나와는 별도로 조명일과 직접 통신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본국 정부로부터 그런 훈령을 받은 바도 없고 사람을 죽임으로써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이 월맹 정부의 방침이다.”
1979년 1월 12일 자 《로동신문》은 사설에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과 관련하여 “월남이 캄푸차(캄보디아)의 독립과 주권을 유린했다. 월남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월남의 무력침공은 국제법 위반인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신용추락”이라고 비난했다. 양측 관계가 급랭(急冷)하기 시작한 것이다. 3자회담에 대표로 참석했던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 변화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79년 3월 19일 이범석 대사와 신 베트남 대사의 접촉에서 이 대사가 북한이 교환 대상자 명단 접수를 거부하고 있어 회담의 진전을 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베트남이 중간 역할을 해줄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베트남 대사는 “현재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는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는 말을 했다. 그 전날의 접촉에서도 신 대사는, 이범석 대사가 “인도차이나 정세가 많이 변화된 이때, 하노이 정부가 이 문제를 재평가할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고 묻자 “아직까지 그런 시사를 받은 적은 없으나 북한 태도에 베트남이 불유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 덧붙였던 것도 주목되는 일이었다.〉
회담 결렬
이 무렵 3자회담에 임하고 있던 한국 대표단에 상부로부터 특별훈령이 하달됐다.
〈가. 현재 진행 중인 회담은 적절한 명분을 내세워 모양 좋게 즉시 결렬시킬 것. 결렬 이유는 억류 중인 우리 외교관에 대한 구제책을 다른 방법으로 강구할 수 있는 전망이 있기 때문임.
나. 향후 북괴 측에서 회담 계속을 종용하는 태도로 나오더라도 북괴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명분을 내세워 회담을 결렬시키고 이를 정식으로 북괴 측에 최후 통첩할 것.
다. 회담 결렬 직후 월남 측에 대해 북괴의 무성의한 태도 및 비인간적 처사로 인하여 북괴와의 회담 지속은 무의미하며 시간낭비이므로 부득이 회담이 결렬됐음을 정식으로 통고할 것.
라. 동 회담 결렬 사실을 인도 정부 측에도 적절히 통보하되 결렬 책임이 북한 측에 있다는 점을 설명해 둘 것.〉
북한과의 협상 없이도 억류 외교관 3명을 자력(自力)으로 구출할 수 있으니 회담을 결렬시키라는 지시였다. 이범석 대사는 훈령에 따라 1979년 5월 23일 남북한 비공식 회담에서 회담 종결을 선언했다. 북한 수석대표 조명일은 “한국 측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회담을 깨버릴 생각이 없다”고 매달렸지만 이 대사는 회담 종료 후 신 베트남 대사를 만나 남북한 회담 종결을 통보했다. 교환 비율 결정에 4개월, 명단 선정에 7개월. 근 일 년의 지루한 공방에서 ‘남한 출신 혁명가’를 고집하던 북한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자국민 북송은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기에 신영복씨는 한국에서 여생(餘生)을 보낼 수 있었고 여러 권의 책을 썼으며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10·26으로 중단되었다가 성공
이대용 공사를 회유·협박해 북으로 데려가려 했던 북한의 박영수. |
우리 정부는 3자회담 진행 중에도 억류 공관원들의 석방을 위해 우방국들의 협력을 모색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3명의 억류 공관원들을 살려내라”는 지시를 받은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은 외교 공관망과는 별도로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1979년 초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던 독일 출생의 유대인 상인 사울 아이젠버그가 등장하였다. 그가 “이대용 공사 등 3명의 한국 외교관을 서울에 데려올 수 있다”고 장담하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접근해 왔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전쟁 당시부터 무역상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며 턴 키 베이스의 기간산업 건설과 이에 따른 외자(外資) 알선으로 떼돈을 벌었다. 1969년에는 한국 정부 고위층에 캐나다의 중수로(重水爐) 원자로를 소개하기도 했다.
김재규 부장은 즉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우리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 없이도 외교관들을 데려올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3자회담을 뒤엎었다. 특별훈령 중 “억류 중인 우리 외교관에 대한 구제책을 다른 방법으로 강구할 수 있는 전망이 있다”는 대목이 바로 아이젠버그를 이용한 방안이었다.
김재규 부장은 이종찬(李鍾贊·국가정보원장 역임) 국제정보국 과장에게 아이젠버그를 통한 억류 외교관 3명의 송환을 일임한다. 김 부장이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는 비밀 임무였다. 순조롭게 송환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1979년 10월 26일 아침, 태국 주재 한국 대사가 외무부로 급전(急電)을 보냈다.
“ESCAP 총회 도중 구엔 코 탁 베트남 외교담당 국무상을 만났는데 그가 억류 공관원 송환에 대해 ‘아이젠버그를 통해 연락해 주겠다. 시간문제이니 최대한 보안에 유의해 달라’고 했다”는 전문(電文)이었다. 이는 즉시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됐지만 그날 밤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서거했고 김 부장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2012년 5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10·26사태 후 중정(中情)이 추진하던 기존의 사업들은 사실상 마비됐다. 나는 구출 공작건(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2·12사태 후 사태가 안정을 찾기를 기다려 12월 말, 나는 보안사로 찾아가 전(全) 사령관 면담을 신청했다. 전 사령관은 17년 만에 만나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간의 억류 외교관 구출 공작에 대해 설명하고, 그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김재규를 만나 관련 서류를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사령관은 김재규와의 만남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연금(軟禁) 중이던 김재규의 비서실장 김갑수 장군이 보관하고 있던 관련 서류를 입수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경무관은 5년여의 수감생활 끝에 석방되어, 1980년 4월 12일 아이젠버그의 개인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스웨덴 외무부 차관 라이프란드와 외무부 비서실장 넬슨이 이(李) 공사 일행을 인수하였고, 아이젠버그의 하노이 지사장 그윌크맨이 구출 공작의 실무를 맡았다고 한다.
“통일혁명당은 없었다”는 신영복
북한의 강력한 희망을 한국 측이 받아들였다면 여생을 북한에서 보낼 수도 있었던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아 복역한 지 20년 만인 1988년 8월 14일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통혁당 사건의 주범 중 한 사람인 김질락은 처형되기 전 《어느 지식인의 죽음(원제: 주암산)》이라는 옥중 수기를 남겼는데, 여기에 신영복을 어떻게 포섭했고 신영복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자세히 썼다.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우리 집으로 끌어들였다. 육군 중위 신영복은 이미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교양하면서 여러 가지로 그들의 인품과 사고의 특수성을 간파하는 데 상당히 신경을 썼다. 적어도 이들 두 사람은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사회주의에 대한 ABC를 알고 있었고, 자진해서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왔다. (중략) 나는 그들의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종태 삼촌으로부터 불온문서를 받아 신영복에게는 〈청춘의 노래〉, 이진영에게는 〈제야의 종소리〉를 주며 읽어보라 했다.〉
〈신영복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기독교 학생단체인 CCC 내의 경제복지회와 서울상과대학 내의 경우회에 관련하고 있었고, 구성원의 대개가 이화여대 학생으로 이루어진 여학생 서클을 하나 지도하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기존 서클에 당원을 침투시킨다는 지하당 조직방법은 신영복에게 있어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신영복을 향해 조직을 함에 있어서 너무 덤벼서는 안 된다고 수차에 걸쳐 당부했다.〉
출소 이후 신영복은 각종 인터뷰에서 통일혁명당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1989년 1월 김정수 신부와 가진 인터뷰에서 “(학생운동) 과정에서 여러 선후배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는데, 대학 선배이고 또 《청맥》이라는 잡지사를 경영하고 있던 김질락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발표되면서 다른 사람들 이름도 알게 되고 제가 관여하고 있던 학생 서클이라든가 학생운동 전체가 통혁당의 이름 밑에 전부 망라되어서 커다란 피라미드의 하부를 이루는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저도 그 피라미드의 메커니즘 속에 일정한 자리를 찾아 도표에 올라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앞으로 좀 더 확실한 자료로서 다시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문제 제기를 시작한다.
이후 1992년 10~11월 정운영씨와의 대담에서는 “《청맥》지 편집을 맡고 있던 김질락과의 인연으로 집필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학생 서클 운동에 열심이었던 때라 기관지나 교재 편집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청맥》의 편집에 관여해 서클의 교재로 이용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맥》에 글을 쓴 적은 없지만 김질락 선배와 잡지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 논의를 많이 했고 이 과정에서 법률적 용어로 포섭당하게 된 셈”이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발전한다. 포섭 자체가 공안당국의 누명이라는 뉘앙스다. “통일혁명당은 조선노동당과는 무관한 조직”이라는 발언도 덧붙인다.
사상 전향 부인
《인물과 사상》 2007년 11월 호에 실린 인터뷰에서는 더 대담해진다. 아예 통일혁명당이 만들어졌고 주요 간부라는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제가 학생 서클 운동의 1세대입니다. 사실, 당시엔 통일혁명당이란 게 없었어요. 감옥에 들어간 후에 만들어졌다는 걸 들었죠. 아무튼 감옥에 가게 되고 무기징역까지 받을 줄 전혀 몰랐죠. (중략) 정확하진 않지만, 당시 서울대 학생 서클 간부 하나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해요.”
이런 신씨의 주장은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좌파 진영 내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2015년 5월 9일 자 《한겨레》에 게재된 인터뷰에서는 기자가 이렇게 단정해 쓰고 있다.
〈스물일곱의 신영복은 육군 중위로,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1968년 8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후, 그는 ‘간첩’이 되었다. 대학의 독서회와 연합 서클 세미나를 지도한 이력이 ‘반국가단체구성죄’로 ‘구성’되었다.〉
1970년 9월 안양교도소에서 신영복이 전향서를 쓴 것에 대해서는 이런 면죄부를 준다.
“교도소 당국은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미 다 전향을 했다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고, 가족들도 통혁당 사건의 다른 관련자들도 전향서에 날인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강력히 권하였다. 그래서 인적사항을 적고, 북한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간단한 내용으로 ‘전향의 변’ 난을 메워 전향서를 작성했다.”(한홍구, 《신영복의 60년을 돌아본다》 중)
신영복씨는 1998년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물론 사상을 바꾼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고 밖에서 사회활동을 하는 가족들이 그게 좋겠다고 권해서 한 겁니다. 전향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라고 사상 전향을 부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
김재규 부장은 즉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우리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 없이도 외교관들을 데려올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3자회담을 뒤엎었다. 특별훈령 중 “억류 중인 우리 외교관에 대한 구제책을 다른 방법으로 강구할 수 있는 전망이 있다”는 대목이 바로 아이젠버그를 이용한 방안이었다.
김재규 부장은 이종찬(李鍾贊·국가정보원장 역임) 국제정보국 과장에게 아이젠버그를 통한 억류 외교관 3명의 송환을 일임한다. 김 부장이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는 비밀 임무였다. 순조롭게 송환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1979년 10월 26일 아침, 태국 주재 한국 대사가 외무부로 급전(急電)을 보냈다.
“ESCAP 총회 도중 구엔 코 탁 베트남 외교담당 국무상을 만났는데 그가 억류 공관원 송환에 대해 ‘아이젠버그를 통해 연락해 주겠다. 시간문제이니 최대한 보안에 유의해 달라’고 했다”는 전문(電文)이었다. 이는 즉시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됐지만 그날 밤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서거했고 김 부장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2012년 5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10·26사태 후 중정(中情)이 추진하던 기존의 사업들은 사실상 마비됐다. 나는 구출 공작건(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2·12사태 후 사태가 안정을 찾기를 기다려 12월 말, 나는 보안사로 찾아가 전(全) 사령관 면담을 신청했다. 전 사령관은 17년 만에 만나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간의 억류 외교관 구출 공작에 대해 설명하고, 그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김재규를 만나 관련 서류를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사령관은 김재규와의 만남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연금(軟禁) 중이던 김재규의 비서실장 김갑수 장군이 보관하고 있던 관련 서류를 입수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경무관은 5년여의 수감생활 끝에 석방되어, 1980년 4월 12일 아이젠버그의 개인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스웨덴 외무부 차관 라이프란드와 외무부 비서실장 넬슨이 이(李) 공사 일행을 인수하였고, 아이젠버그의 하노이 지사장 그윌크맨이 구출 공작의 실무를 맡았다고 한다.
“통일혁명당은 없었다”는 신영복
북한의 강력한 희망을 한국 측이 받아들였다면 여생을 북한에서 보낼 수도 있었던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아 복역한 지 20년 만인 1988년 8월 14일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통혁당 사건의 주범 중 한 사람인 김질락은 처형되기 전 《어느 지식인의 죽음(원제: 주암산)》이라는 옥중 수기를 남겼는데, 여기에 신영복을 어떻게 포섭했고 신영복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자세히 썼다.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우리 집으로 끌어들였다. 육군 중위 신영복은 이미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교양하면서 여러 가지로 그들의 인품과 사고의 특수성을 간파하는 데 상당히 신경을 썼다. 적어도 이들 두 사람은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사회주의에 대한 ABC를 알고 있었고, 자진해서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왔다. (중략) 나는 그들의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종태 삼촌으로부터 불온문서를 받아 신영복에게는 〈청춘의 노래〉, 이진영에게는 〈제야의 종소리〉를 주며 읽어보라 했다.〉
〈신영복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기독교 학생단체인 CCC 내의 경제복지회와 서울상과대학 내의 경우회에 관련하고 있었고, 구성원의 대개가 이화여대 학생으로 이루어진 여학생 서클을 하나 지도하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기존 서클에 당원을 침투시킨다는 지하당 조직방법은 신영복에게 있어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신영복을 향해 조직을 함에 있어서 너무 덤벼서는 안 된다고 수차에 걸쳐 당부했다.〉
출소 이후 신영복은 각종 인터뷰에서 통일혁명당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1989년 1월 김정수 신부와 가진 인터뷰에서 “(학생운동) 과정에서 여러 선후배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는데, 대학 선배이고 또 《청맥》이라는 잡지사를 경영하고 있던 김질락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발표되면서 다른 사람들 이름도 알게 되고 제가 관여하고 있던 학생 서클이라든가 학생운동 전체가 통혁당의 이름 밑에 전부 망라되어서 커다란 피라미드의 하부를 이루는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저도 그 피라미드의 메커니즘 속에 일정한 자리를 찾아 도표에 올라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앞으로 좀 더 확실한 자료로서 다시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문제 제기를 시작한다.
이후 1992년 10~11월 정운영씨와의 대담에서는 “《청맥》지 편집을 맡고 있던 김질락과의 인연으로 집필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학생 서클 운동에 열심이었던 때라 기관지나 교재 편집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청맥》의 편집에 관여해 서클의 교재로 이용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맥》에 글을 쓴 적은 없지만 김질락 선배와 잡지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 논의를 많이 했고 이 과정에서 법률적 용어로 포섭당하게 된 셈”이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발전한다. 포섭 자체가 공안당국의 누명이라는 뉘앙스다. “통일혁명당은 조선노동당과는 무관한 조직”이라는 발언도 덧붙인다.
사상 전향 부인
《인물과 사상》 2007년 11월 호에 실린 인터뷰에서는 더 대담해진다. 아예 통일혁명당이 만들어졌고 주요 간부라는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제가 학생 서클 운동의 1세대입니다. 사실, 당시엔 통일혁명당이란 게 없었어요. 감옥에 들어간 후에 만들어졌다는 걸 들었죠. 아무튼 감옥에 가게 되고 무기징역까지 받을 줄 전혀 몰랐죠. (중략) 정확하진 않지만, 당시 서울대 학생 서클 간부 하나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해요.”
이런 신씨의 주장은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좌파 진영 내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2015년 5월 9일 자 《한겨레》에 게재된 인터뷰에서는 기자가 이렇게 단정해 쓰고 있다.
〈스물일곱의 신영복은 육군 중위로,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1968년 8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후, 그는 ‘간첩’이 되었다. 대학의 독서회와 연합 서클 세미나를 지도한 이력이 ‘반국가단체구성죄’로 ‘구성’되었다.〉
1970년 9월 안양교도소에서 신영복이 전향서를 쓴 것에 대해서는 이런 면죄부를 준다.
“교도소 당국은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미 다 전향을 했다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고, 가족들도 통혁당 사건의 다른 관련자들도 전향서에 날인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강력히 권하였다. 그래서 인적사항을 적고, 북한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간단한 내용으로 ‘전향의 변’ 난을 메워 전향서를 작성했다.”(한홍구, 《신영복의 60년을 돌아본다》 중)
신영복씨는 1998년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물론 사상을 바꾼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고 밖에서 사회활동을 하는 가족들이 그게 좋겠다고 권해서 한 겁니다. 전향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라고 사상 전향을 부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
문재인 대통령은 2월 10일 신영복 교수의 글씨와 민중미술가 이철수씨의 판화 앞에서 김여정을 맞았다. 배경 왼쪽의 ‘通(통)’이라고 쓴 글씨가 신 교수가 쓴 것이다. 사진=뉴시스 |
신영복씨는 옥중에서 쓴 서신 모음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일약 ‘스타 교수’ 반열에 올랐고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를 쓴 사람으로 이름났지만 근래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사상가로 더 유명하다. 문 대통령이 2월 9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을 앞두고 열린 리셉션 행사에서 한 발언은 신씨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인용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초 북한의 김영남, 김여정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신영복 교수의 서화(書畵)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고, 각 비서관실에 신영복 교수가 쓴 춘풍추상 액자를 선물해 걸도록 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사람이 먼저다’ 슬로건은 신영복 글씨체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관저에 걸려 있다고 알려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 족자도 신영복씨의 친필이다.
문재인 대통령(당시 민주당 전 대표)은 2017년 1월 신영복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신 선생은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라는 당명(黨名)을 주고 가셨다. 선생의 ‘더불어숲’에서 온 말이다. 여럿이 더불어 함께하면 강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많은 촛불이 모이니 세상을 바꾸는 도도한 힘이 됐다. 촛불과 함께 더불어 정권을 교체하고 내년 2주기 추도식 때는 선생이 강조하신 더불어숲이 이뤄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영복을 사상가로 존경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사상은 이처럼 구체적 행동이나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영복의 사상이 김일성주의라는 점은 확정된 재판으로, 그리고 그를 이대용 공사와 맞바꿔 데려가려고 그토록 집착하였던 김일성 정권의 행태로 뒷받침된다. 좌파 정권 시절에도 신영복은 재심 신청을 하지 않았고 과거사 조사 항목에서도 통혁당 사건은 빠졌다. 평양엔 통일혁명당의 주범으로 사형된 김종태의 이름을 딴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이 있다. 남북한 정권의 수뇌부가 통일혁명당의 핵심 인물들을 같이 존경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초 북한의 김영남, 김여정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신영복 교수의 서화(書畵)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고, 각 비서관실에 신영복 교수가 쓴 춘풍추상 액자를 선물해 걸도록 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사람이 먼저다’ 슬로건은 신영복 글씨체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관저에 걸려 있다고 알려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 족자도 신영복씨의 친필이다.
문재인 대통령(당시 민주당 전 대표)은 2017년 1월 신영복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신 선생은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라는 당명(黨名)을 주고 가셨다. 선생의 ‘더불어숲’에서 온 말이다. 여럿이 더불어 함께하면 강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많은 촛불이 모이니 세상을 바꾸는 도도한 힘이 됐다. 촛불과 함께 더불어 정권을 교체하고 내년 2주기 추도식 때는 선생이 강조하신 더불어숲이 이뤄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영복을 사상가로 존경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사상은 이처럼 구체적 행동이나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영복의 사상이 김일성주의라는 점은 확정된 재판으로, 그리고 그를 이대용 공사와 맞바꿔 데려가려고 그토록 집착하였던 김일성 정권의 행태로 뒷받침된다. 좌파 정권 시절에도 신영복은 재심 신청을 하지 않았고 과거사 조사 항목에서도 통혁당 사건은 빠졌다. 평양엔 통일혁명당의 주범으로 사형된 김종태의 이름을 딴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이 있다. 남북한 정권의 수뇌부가 통일혁명당의 핵심 인물들을 같이 존경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