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초보 농부들 “가물었을 때 물 안 줘 오이가 써요”
지난 10일 오전 충북 제천시 체류형 농업창업지원센터 공동 실습장에서 윤재삼 자치회장(오른쪽 넷째)을 비롯한 초보 농부들이 그동안 키운 참외·감자와 말린 호박을 들어보이고 있다. [제천=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10일 오전 충북 제천시 신월동 제천농업기술센터 앞. 센터 오른편에 있는 산 능선을 끼고 기숙사 건물 한 동과 단독주택 여러 채가 눈에 띄었다. 집 주변 텃밭에 고구마와 땅콩·토마토·부추가 보였다. 마당엔 빨간 고추와 옥수수 수염이 널려 있었다. 문 앞에 놓인 수레와 장화·등짐 펌프는 이곳이 농사꾼의 집이란 걸 말해 준다. 주택가 아래엔 3100㎡(약 1000평) 규모의 밭이 있었다. 각종 채소류와 참깨·들깨가 여름 햇살 아래 풍성하다. 올해 초 문을 연 제천농업기술센터 산하 체류형 농업창업지원센터다.
“초짜 농부들의 마을이에요.” 자치회장을 맡고 있는 윤재삼(58)씨는 지원센터를 이렇게 소개했다. 1년 동안 살면서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인근 농가와 연계해 현장 실습까지 도와주는 곳이다.
제천시와 농림부가 96억원을 들여 지난 1월 문을 열었다. 총 30세대가 살 수 있는 주택(24동)과 기숙사가 있고 텃밭 30곳(세대별 300㎡·90평), 공동 실습농장, 교육관, 비닐하우스 등 실습 공간이 마련돼 있다. 전체 면적은 3만7131㎡(1만1250평)다.
이수현 제천농업기술센터 담당은 “준비 안 된 귀농을 막고 1년간 실제 농촌생활을 하며 농작물을 키우고 영농기술을 현장에서 터득하는 게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엔 현재 25가구 34명의 예비 귀농인이 살고 있다. 50대 회사원 출신이 절반 이상이다. 처음엔 27가구 45명이 입주했지만 중간에 5가구가 제천·보은 등에 자리를 잡아 나갔고 이후 4~5월 후발대로 입소한 사람들도 있다. 모두 도시에서 온 사람들로 농사일은 처음이다.
이곳에 입주하려면 정부·지자체에서 인정하는 귀농·귀촌 교육을 100시간 이상 이수해야 한다. 서류심사·면접을 거쳐 선발한다. 1인 입교 시 기숙사(1세대 18㎡·5.5평)에서 살 수 있고, 2인 이상 입교 때는 40㎡(12평), 50㎡(15평)의 단독주택이 제공된다. 크기별로 보증금 40만~70만원을 내고, 월 14만~25만원의 교육비를 낸다.
감자와 고구마·옥수수·수박·토마토는 공동으로 짓고 개인 텃밭에는 각자 관심 있는 작물을 심는다. 멀리서 보면 다른 농사꾼이 지은 작물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시들거나 누렇게 잎이 변한 작물이 여럿 보였다. 자치회장 윤씨는 “농촌생활을 흥미롭게 연출하는 TV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를 즐겨보고 있는데 진짜 농사일은 만만치 않다”며 “비교적 관리가 쉬운 감자·고구마는 성공을 거둔 것 같은데 수박은 관리를 잘 못해 실패한 편에 속한다”고 말했다. 수박은 어른 주먹만 한 게 대부분이었다. 큰 것이라야 핸드볼 공만 했다.
“따서 먹어볼 수 있겠느냐”고 하자 손사래를 쳤다. 그는 “단맛이 전혀 없다. 수박이 아니라 그냥 박”이라며 “수박 순을 쳐줘야 크기가 커진다는 걸 나중에 교육을 받고야 알았다. 약도 제때 뿌리지 않아 잎이 누렇게 변했다”고 했다. 이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많이 깨닫고 배웠다”고 했다. 야심 차게 유기농법을 시도했다 낭패를 보기도 한다. 천연약제로만 한두 번 방재를 하고 이후 농약을 뿌리지 않아 브로콜리 등 일부 작물은 진딧물이 생기고 병충해로 먹지 못할 정도가 됐다.
윤씨는 “작물의 생육 시기와 방제 순서 등을 모르고 유기농법부터 하려 했던 게 큰 실수였다”며 “초등학생이 곱셈·덧셈을 배우지 않고 미·적분을 풀려고 했으니 너무 앞서간 것”이라고 했다. 입주민들은 이런 시행착오를 영농일지에 꼼꼼히 적고 있다. 김석호 기술센터장은 “여러 작물을 동시에 심다 보니 이론교육 시간에 모든 걸 가르칠 수 없다”며 “실패를 먼저 하고 나중에 이론과 요령을 배우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만난 도완준(52)씨는 파란색 물통을 들고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왔다. 대기업에서 일하다 퇴직을 앞두고 귀농을 준비하고 있다. 도씨는 “농사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내는 이곳에 상주하고 도씨는 틈나는 대로 내려온다. 고랑을 덮고 있는 비닐을 걷어내는 도씨의 손이 서툴러 보였다. 그는 “텃밭 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전업농들은 참 대단한 것 같다”며 “며칠만 한눈을 팔아도 잎이 시들고 병도 생겨 버린다. 잡초도 금세 자라 손이 많이 간다”고 말했다.
김명섭(30)씨는 고추·붉은양배추·케일 등을 텃밭에서 기르고 있다. 5년간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다 두 번 고배를 마신 뒤 쌈채 농업인의 꿈을 키우고 있다. 지난봄에는 책에서 본 대로 나무젓가락을 어린 고춧대의 지지대로 삼았다 바람에 쓰러진 적이 있다. 이후엔 좀 더 강한 지지대를 마련해 간신히 고추를 키우는 데 성공했다. 김씨의 고민은 비가 온 뒤 무섭게 자라는 잡초다. 처음엔 무작정 뽑았지만 비가 온 뒤 땅이 축축할 때 제초를 해야 뿌리까지 완전히 뽑힌다는 걸 깨달았다.
대기업에서 반도체 연구원으로 32년간 일한 김일호(58)씨는 남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아이스플랜트 재배에 관심이 있다. 시중에서 500g에 1만7000~2만원 하는 고급작물이다. 이름처럼 다른 식물보다 잎이 차갑다. 김씨는 “연구원 출신인 만큼 과학영농, 고부가가치 작물 재배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봄 심었던 아이스플랜트는 7월 초 장맛비에 병이 나고 말았다. “아이스플랜트는 물에 닿지 않게 해야 잘 크는데 그걸 깜빡 하고 모종 위에 차단 망을 설치하지 않아 낭패를 봤다”고 말했다. 방제와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이날 등짐 펌프를 어깨에 메고 고추에 약을 뿌리고 고춧대 사이사이 물을 뿌렸다. 김씨는 틈틈이 농산물 가공업체나 농업박람회를 다니며 정보를 얻고 있다. 좌충우돌 초보 농부들 사이에선 ‘씀바귀 오이’가 탄생하기도 한다.
정종근(60)씨와 아내 공석임(54)씨는 반찬으로 오이 무침을 보여줬다. 공씨는 “가물었을 때 물을 주지 않아 오이에서 쓴맛이 난다. 그래도 맛이 괜찮지 않으냐”며 웃었다.
이들은 마을 공동체를 스스로 가꿔가고 있다. 잔치도 열고 고기도 함께 구워 먹는다. 공동 텃밭에 어떤 작물을 기를지, 관리를 어떻게 할지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최근 비닐하우스 한 동을 건조장으로 바꾸는 계획이 찬반 논의 끝에 통과됐다. 중소기업에서 일했던 신철경(40)씨는 “이웃과 함께 농장을 가꾸고 때론 갈등을 해결하면서 실제 농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이라며 “때론 힘들지만 새로운 꿈을 키워가니 즐겁다”고 했다.
이곳 사람들은 요즘 봄 감자를 캐낸 땅을 트랙터로 고르고 있다. 배추를 심기 위해서다. 가을엔 직접 재배한 배추로 모두 함께 김장을 할 예정이다.
[S BOX] 홍천·구례 등에 지원센터 더 조성, 입소 기간도 세분화
농림축산식품부는 충북 제천(1월)과 경북 영주(6월)에 이어 2017년까지 전국에 체류형 농업창업지원센터 5곳을 더 조성할 계획이다. 강원 홍천과 전남 구례는 올해 말 준공을 앞두고 있다. 경북 영천, 전북 고창, 경남 함양은 2017년에 조성한 뒤 입교생을 모집할 계획이다.
각 센터 건립에는 약 80억원의 예산이 든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절반씩 부담한다. 농림부는 체류형 농업창업지원센터의 입소 기간을 기존 1년에서 3개월·6개월 과정, 1년 과정 등으로 세분화할 계획이다. 퇴직을 앞둔 예비 귀농인들이 장기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한 결과다. 지자체 여건에 따라 대상자를 늘리고 계절에 따라 재배하고 싶은 작물을 다양화할 수 있게 됐다.
경북 영주는 아지동에 있는 2만9000여 ㎡의 터에 체류형 농업창업지원센터 ‘소백산 귀농드림타운’을 운영하고 있다. 제천과 마찬가지로 체류형 주택 30동(원룸 18개, 투룸 12개)과 교육관·텃밭·실습농장·농자재보관소·퇴비장 등 시설을 갖췄다. 이곳은 영농시기를 고려해 올해 6∼8월, 9∼11월로 나눠 기수별 30명씩 시범적으로 귀농 과정을 운영한다. 내년에는 3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간 입소하는 과정도 개설된다. 1~2주짜리 단기 귀촌 과정도 수시로 운영할 계획이다. 채소 재배뿐 아니라 약초와 특용작물 재배 교육도 포함됐다.
손경문 농림부 농촌정책과 사무관은 “귀농을 희망하는 예비 농업인들이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농촌생활에 대한 적응기간을 가질 수 있다”면서 “마을공동체 안에서 교육과 실습을 하며 막연한 두려움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천=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6.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