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모시적삼 하얗게 입은 사람을 보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그 옷의 사각거림은 달라붙지 않아 좋고, 환풍이 되어 좋다. 여름밤은 붙지 않는 모시적삼처럼 건넛방에 잠자리를 잡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우리네 삶에선 적당한 거리 두기보다는 서로를 바라봐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 온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것은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 왔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 삶의 고단함을 덜어내고 잊으려고 한다. 누군가 말했다. 마흔엔 자존심을 세우다 쉰에 철이 들며 예순이 되면 그제야 ‘후회’를 한다고. 인도의 수행자들은 쉰 살이 되면 자연스럽게 산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세상사를 관조하는 나이가 되어 몸소 실천하려 택하는 수행법이다.
선배 교무님은 세상을 떠나시며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삶의 교훈을 남겨주었다. 선배는 나이 예순에 건강을 챙긴다며 인라인스케이트를 탔고, 친구를 만나면 산 속 바위에 앉아 명상을 했다. 법문을 하러 떠나면 항상 모시적삼을 입고 법회를 보셨다. 그런 분이 간다 온다 말씀도 없이 저녁 맛있게 드시고 잠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큰 도인의 모습은 죽음에서 밝혀진다”며 호상이라고 했다.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떠나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남기겠다고, 또 그 일을 꼭 해야겠다며 열정을 불태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누군가 그 일을 이어 할 수 있으며 또 더 잘 할 수도 있다.
선배 어른이 열반을 하신지 어언 10년이 흘렀다. 그분 삶의 맑고 애틋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 선배가 법설을 하시러 서울에 가셔서 49재에 생사의 법문을 하시고 여비를 받아 지방에 내려오시면 역에서 내릴 즈음에 꼭 옷이 타지고 찟겨지곤 했단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서울에 다녀오신 밤이면 어머니는 아버지 옷을 꿰메는 것이 일상사였다”는 얘기도 전했다. 모시적삼 옷에 여비 봉투를 받아넣으면 용케도 소매치기가 그걸 알고 돈을 가져갔기 때문이란다. 아들은 “그 사람이 부자면 내 돈을 훔치겠냐? 가난해서 그런거다, 괜찮다”며 태연하셨다는 아버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아들도 목욕탕에서 새 털신을 잃어버리고는 주인의 걱정 앞에서 “아이고, 괜찮아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겠지요” 하고 헌 신발을 신고 집에 왔단다. 일주일 후 목욕탕에서 전화가 왔다. “어떤 할아버지가 자기 신발인 줄 알고 신고 갔는데, 오늘 가져 왔어요.” 결국 털신이 되돌아 왔다는 이야기도 했다.
사람은 필요에 의해 선택하고 쓸모없음에 버릴 줄 안다. 그러나 필요함에도 사지 않고 쓸모없음에도 간직하는 사람도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말했다. “세상에 쓸모없는 물건이 없으며 쓸모없는 사람도 없다. 다들 제자리를 찾지 못해서 그러하니 기다리고 참아주고 또 쓸모 있는 사람에게 갖다 주고, 하며 사는 것이다.”
이 여름에 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떠난다. 시인 푸시킨은 이런 글을 남겼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삶은 인연이다. 헤어짐도 만남도 또 함께하는 일도 모두 그렇다.
정은광 교무 dmsehf4438@hanmail.net
[중앙일보] 입력 2015.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