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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사라졌다

해암도 2015. 6. 9. 06:16

출장간 사이 집 나간 아내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는 '착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 사이 틈이 생긴 걸까…


그녀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미술사가이자 신학자인 딜렌버거는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졌다. 절망의 나락에서 벗어나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러 갔다. '현대판 종교화'라는 로스코의 그림은 치유의 힘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로스코의 최근작인 듯한 그림 앞에서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화염이 몰아치듯 온통 시뻘겋게 그린 그림. 그건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뉴욕의 신문들은 20세기 위대한 화가의 자살을 톱기사로 알렸다. 1970년 2월 25일, 마크 로스코는 자기 작업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내가 사라졌다. 해외 출장을 다녀온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간 집은 무덤처럼 서늘하고 괴기스러웠다. 마트에 갔으려니 했다. 잠깐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시계가 밤 열한 시를 넘어선다.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라면을 한 개 끓여 먹고 다시 건다. 이젠 아예 꺼져 있다. 그러고 보니 베란다에 빨래 한 장 널려 있지 않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출장 가던 날 작은 말다툼이 있었다. "나도 따라가면 안 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쳐다보니 말끝을 흐린다. "외로워서. 혼자 있으면 무서워서." 묵혀둔 짜증이 일었다. "그러게 왜 애는 지방대로 보내가지고. 어떻게든 '인(in) 서울' 시켰어야지." 아내의 목덜미가 붉어진다. 아차, 싶었지만 늦었다. "됐어. 잘 갔다 와요."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나왔지만 아내는 말이 없다. 손을 흔들었으나 그녀의 눈은 허공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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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 엄마 거기 안 갔어?" 날이 새기를 기다려 처제에게 전화를 건다. 아내에겐 친구가 없다. 한 번도 친구 만나러 가는 걸 본 적이 없다. 장모는 당신 큰딸에게 집귀신이 붙었다며 혀를 찼다. 딸이 대학 간 뒤로는 베란다에서 허브 키우고 성경 필사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듯했다. "점심때 고급 식당에 가면 죄다 여자라잖아. 남자들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으로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고. 난 당신이 그런 여자가 아니라서 좋아." 그때 아내가 기묘한 대답을 했었다. "살고 싶은 의지가 있어야 남들이랑 밥도 먹고 수다도 떨 수 있는 거야."

"언니 안 왔는데요. 무슨 일 있어요?" "아, 뭐 좀 물어보려는데 휴대폰을 안 받아서. 다시 해볼게." 전화를 끊으려는데 처제가 불러 세운다. "형부, '빈 둥지 증후군'이라고 들어보셨죠? 암도, 우울증도 착한 여자들만 얕보고 찾아간다잖아요. 신경 좀 쓰세요." 말본새 하고는. 저러니 여태 시집을 못 가지. 딸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 나 엠티. 나중에 전화할게." 아내는 어디로 간 걸까.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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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를 남겼나 싶어 집 안을 살폈다. 전람회 티켓이 발견된 건 화장대 서랍이었다. '마크 로스코―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 잡스가 그림도 좋아했어? 도로 집어넣으려는데 티켓 위에 휘갈겨 쓴 글씨가 보인다. '레드, 피로 그린 그림.'

연애 시절에도 가본 적이 없는 미술관을 나이 오십에 갔다. 그것도 혼자서. 거대한 색 덩어리들, 달랑 '무제'라고 적힌 사각의 그림들 앞에서 뻘쭘해진다. 대체 뭘 느끼라는 건지. 떠밀리듯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간다. 해넘이 바다를 그린 양 온통 붉다. 화가가 동맥을 끊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란다. 자세히 보니 다 같은 빨강이 아니다. 크고 작은 색면(色面)이 서로를 밀쳐내듯 둥둥 떠다닌다. 레드, 아내가 좋아했던 색깔. 온몸 던져 불사를 만한 무엇이 나타나면 죽어도 좋다며 농담처럼 말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균열이 생긴 건 언제부터일까. 팔짱을 끼어오는 아내의 손길이 싫어진 건 언제부터일까. 내 청을 거절한 적 없는 여자였다. 사업하는 형 위해 적금을 털 때도, 형 대신 어머니를 모시자 했을 때도,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았을 때도…. "당신이 날 싫어할까 봐 두려워." 아내의 말은 진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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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담벼락에 기대서 1년 전 끊은 담배를 피워 문다. 아내 없는 집에 들어가기 무서워 서성인다. 멀리서 누군가 걸어온다. 달달달. 짐 가방을 끌고 뒤뚱뒤뚱 다가온다. "당신, 여기서 뭐해?" 어둠 속 휘둥그레진 두 눈이 묻는다. 아내다. 기가 차 말문이 막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텅 빈 아파트에 있기 싫어 강원도로 귀농한 친구 집에 다녀온단다. "문자 못 봤어?" 잠결, 로밍폰이 휘파람 소릴 낸 것도 같다. 전화는 왜 안 받았느냐고 묻자 첩첩산중이었다고 한다. "은퇴하면 우리도 거기 가서 농사짓고 살자. 천국이 따로 없어."

코흘리개 아이처럼 아내를 졸졸 따라가며 묻는다. "로스콘지 로코코는 뭔데?" "아~ 그 사람? 옆집 여자가 표 한 장 남는다며 주길래…. 무지 유명한 화가라는데 난 뭔 소린지 도통 모르겠더라고." 이 여자를 그냥! 긴장과 두려움, 불안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강원도 된장으로 찌개 맛있게 끓여줄게." 거실에 불이 켜지고, 가스레인지에 드르륵 불꽃이 인다. 집 안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기 시작한다. 아내가 돌아왔다. 사랑하는 나의 그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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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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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