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접이식 소형 자전거의 대명사 '브롬턴'

해암도 2014. 12. 27. 05:07

청개구리式 거꾸로 경영… 접는 미니 자전거 神話를 만들었다

접이식 소형 자전거의 대명사 '브롬턴'

Reporter's Letter

최원석 기자입니다. 영화 '트루 로맨스'의 여자 주인공 앨라배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겠죠. 하지만 잊지 마세요. 다른 길도 있답니다.(That's the way it goes, but don't forget, it goes the other way too.)" 사랑도 삶도 기업 경영도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건 아닙니다.

최근에 다녀온 영국의 자전거 업체 브롬턴이란 회사도 그랬습니다. 200만원짜리 고가 자전거를 만드는 이 회사는 업계의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청개구리 정신을 가진 회사더군요. 특히 글로벌 시장 진출 전략을 고민하는 중소 제조업체에 일독을 권합니다.

"자전거 좀 접어 봤네" 하는 사람들 사이에 3대 폴딩 미니 바이크(Folding Mini Bike·접이식 소형 자전거)로 통하는 브랜드가 있다. 브롬턴(Brompton), 버디(Birdy), 오리(ORi)다. 4~5년 전부터 고급 자전거 바람이 불기 시작한 한국 시장에서도 자전거 마니아들 사이에 소문이 이미 날 만큼 났지만, 높은 인기만큼 가격(100만~200만원)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그 가운데 브롬턴은 '세상에서 가장 작게 접히는 자전거'라는 단 한 문장으로 마니아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2단계의 단순한 과정을 통해 10~20초 만에 접을 수 있으며, 접으면 지하철역 코인 로커에도 들어간다. 거의 완벽한 직사각형 형태로 접히는 우아함은 기계 장치나 바퀴 달린 것에 열광하는 이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런데 이 브롬턴을 소비자가 아닌 '업자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인다. 해외로 진출하기에는 힘이 모자라고 어떻게든 한국 땅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수많은 중소 제조업체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브롬턴은 상식을 파괴하는 것이 상식처럼 돼 버린 회사다. 케임브리지 공대 출신의 영국인 엔지니어 앤드루 리치(Ritchie)가 1976년 설립한 이 회사는 오늘날 자전거 산업에서 상식이 된 것들을 하나도 따르지 않았지만, 요즘 업계에서 가장 핫(hot)한 주자로 꼽힌다.

브롬턴은 런던 본사 옆에 붙은 유일한 공장에서 모든 제품을 만들고, 그 가운데 75%를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 40개국에 수출한다. 부품의 70%는 영국산을 고집한다. 자전거는 단순 조립품이기 때문에 설계·디자인은 선진국 업체가 하더라도 생산은 임금이 싼 중국·동남아에서 해야 한다는 업계 상식을 완전히 깬 것이다.

판매 지역의 소비자 취향에 맞춰 다양한 제품을 제공하는 현지 다변화 전략도 철저히 무시한다. 수십 가지 제품을 갖추고 그것도 모자라 매년 연식 변경 모델까지 내놓는 경쟁사들과 달리, 브롬턴은 지난 30년간 오직 한 가지 그것도 단일 사이즈 제품만 생산해 왔다.

사용 부품의 80%는 브롬턴에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부품인데, 이 역시 전 세계 고급 자전거 업체 대부분이 품질·원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브랜드는 달라도 공용 부품을 폭넓게 쓰는 것과 정반대다.

그런데도 본격 생산을 시작한 1988년 이후 매출은 줄곧 성장세다. 지난 5년간 연평균 성장률 20%, 영업이익률 10%를 유지하고 있다. 또 브롬턴 직원 190여명은 1주일에 나흘만 일하고도 런던 서부 지역의 제조업체 가운데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다.

김수욱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브롬턴이 '집중적 초토화 전략'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각화 글로벌화 전략, 즉 전 세계에 흩어진 니즈에 맞추는 게 아니라 가장 핵심이 되는 아주 좁은 시장, 좁은 고객만 확실하게 차별화된 제품으로 집중 공략하면,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가 저절로 고객을 끌어온다는 논리다.

즉 회사가 직접 전 세계에 나가 영업 활동을 할 필요도 없이, 자신들이 공략하는 한정된 고객의 힘, 즉 '입소문'에 의해 자연스럽게 판매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에르메스가 한 땀 한 땀 프랑스 장인의 손길로 바느질한 최고의 가죽 제품이라는 콘셉트로 범용 제품과 완전히 차별화하듯 브롬턴은 자신들 제품을 일반 자전거와 완벽하게 차별화함으로써 런던에서 비싸게 만들더라도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기자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 29일 런던 브렌트퍼드(Brentford)에 위치한 이 자전거 업계 '스몰 챔피언'을 방문했다.

거꾸로 경영 1

영국에서 만들어 중국까지 판다

지난달 29일 찾은 브롬턴 본사와 그 옆에 위치한 브롬턴 유일의 공장은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갈색 벽돌로 지어진 지상 2000㎡ 면적의 2층짜리 건물이 전부. 1층엔 공장과 안내 데스크, AS 접수처, 2층에는 판매·마케팅·디자인 직원들이 일하는 사무실과 회의실이 있었다.

공장 한쪽에서 만난 브롬턴 창업자 앤드루 리치씨는 "런던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브롬턴의 제품 단가에서 임금 비중은 30% 수준입니다. 웨일스에서 만들면 노동 비용이 20% 줄어드니, 제품 단가의 6%를 절약할 수 있겠지요. 물론 아주 큰 돈입니다. 동남아로 공장을 옮기면 훨씬 더 줄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런던도 그렇고 서울·도쿄도 그렇지만, 나라의 중심이며 오랜 역사를 지닌 대도시라는 지역적 특성이 얼마나 중요한 판매 포인트가 될 수 있는지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습니다."

거꾸로 경영 2

단일 제품 단일 사이즈만 만든다


브롬턴은 각 지역 소비자 취향에 맞춰 다양한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현지화 전략'을 철저히 무시한다. 브롬턴은 지난 30년간 오직 한 가지 제품만 만들어 유럽에도 팔고 미주에도 팔고 아시아에도 판다. 1970년대 말 창업자 리치가 처음 개발한 원형이나 2013년형 모델이나 기본 형태에 큰 차이가 없다.

이 회사의 윌 버틀러-애덤스(Butler-Adams) CEO는 "다른 업체들은 수십 가지 다른 형태를 만들기 때문에 설계나 생산의 변경이 잦고, 이에 따른 비용을 줄이기 위해 중국이나 동남아 등 더 저렴한 생산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브롬턴은 극단적인 단순화를 통해 얻어지는 비용 절감이나 품질 향상 효과를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관리해야 할 부품이 적기 때문에 부품 재고 관리에 드는 비용도 아주 적다. 따라서 런던에서 100%로 생산해 수출하면서도 채산성을 맞출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소비자에게 한 가지 모델만 제공하는 단조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핸들 형태를 4가지 형태로 제공한다든지, 자전거에 들어가는 각종 액세서리를 바꾸는 식으로 수천 가지의 다른 조합을 만들어 소비자 취향에 맞춰 나갔다.

브롬턴이 접히는 두 단계 과정

거꾸로 경영 3

부품 공용화? 우리는 전용부품만 쓴다

원가 절감을 위해 업계에서 통용되는 범용 부품을 써야 한다는 글로벌 제조업의 기본 논리는 이들과 전혀 상관없다. 부품의 80%는 브롬턴 제품에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부품인데, 부품 70%는 영국산이며, 나머지 부품도 대부분 유럽산이다.

로스 호킨스 판매 책임자는 전용 부품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범용 부품을 쓰면 브롬턴처럼 접었을 때에 직사각형에 가깝게 완벽하게 접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용 부품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업체들이 같은 시장에 진입하는 데 큰 장벽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애초에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브롬턴이 표준 부품을 사용해 만들었다면 아마 경쟁자가 쉽게 따라올 수 있었겠지만, 브롬턴이 자사 접이식 자전거에 최적화된 부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경쟁자들이 이 같은 정밀하고 섬세한 부품을 고품질로 만들어낼 설비를 투자해 따라온다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위험 요인도 물론 존재한다. 브롬턴이 공급받는 1000여개의 전용 부품 가운데 한 곳에서만 문제가 생겨도 전체 생산이 중단되는 리스크가 항상 존재한다. 브롬턴은 본격 생산을 시작한 1988년 이후 매년 매출이 늘었는데 2002년 단 한 해만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당시 브롬턴에 허브기어(뒷바퀴 축에 내장된 변속기)를 단독 공급해 주던 영국 자전거 부품사 스터미아처사가 파산하면서 부품 공급망이 몇 달간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거꾸로 경영 4

특허는 되도록 안 낸다


브롬턴은 특허도 내지 않는다. 특허를 내기 위해서는 특정 기술들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 쉽게 카피 모델이 나올 수 있고, 특허 방어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 수 있다.

브롬턴은 1990년대 대만에서 현지 기업과 합작해서 브롬턴 자전거를 만들려고 시도했다가 업체를 통해 제조 노하우가 유출되고 대만에서 저급한 품질의 카피 모델이 나오면서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있다. 결국 합작 관계를 청산하고 유럽에서 이들이 판매를 못하게 법적 조치를 취하는 선에서 마무리됐지만, 무려 10년을 끈 이 골치 아픈 싸움은 브롬턴사에 큰 교훈을 남겼다.

    브렌트퍼드(런던)=최원석 기자  입력 : 2013.05.10 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