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매일 50㎞씩 달리는 93세 자전거맨… "페달이 보약이여"

해암도 2014. 12. 23. 13:50

비공식 국내 최고령 라이더 이완순 할아버지
"성남에서 강화까지 딱 두번 쉬고 갑니다
나이트클럽도 발 끊었소 술먹고 타다 넘어질까봐
당뇨? 콜레스테롤? 성인병 징후도 없답디다
건강비결? 다 알면서…"

93세 노인이 자전거를 탄다. 중절모 쓰고 바짓단 양말에 밀어 넣고 슬렁슬렁 타는 게 아니다. 몸에 착 붙는 자전거복 입고 헬멧에 고글까지 갖췄다. 700만원을 호가하는 카본 로드바이크를 탄다. 비공식 국내 최고령 라이더 이완순씨다. 주민등록상 1922년생이지만 실제 생년은 3·1운동 나던 1919년이란다. 그는 매일같이 평균 50㎞씩 사이클을 탄다. 멀리는 강화, 춘천, 원주까지 왕복하고 보통 집이 있는 경기 성남에서 팔당까지 자전거로 왕복한다. 지난 3일 성남시 양지동 자택에서 만난 이씨는 "최고령, 최고령 하는 게 좀 기분 나쁘다"며 "성남에서 강화까지 자전거로 딱 두 번 쉬고 가는데, 그런 얘기는 안 하고 최고령 소리만 하니까"라고 파안(破顔)하며 웃었다.

자전거 지기(知己)이자 조카뻘인 조경동(71)씨와 함께 사는 방 두 개짜리 집은 자전거와 자전거용품으로 가득했다. 현관 옆에 자전거가 3대, 식탁과 벽에는 온통 자전거 동호회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다. 이씨의 방 한쪽 벽은 자전거용 재킷 십여벌과 헬멧, 각종용품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전국어르신생활체육대회'에서 받은 '최고령 참가상' 상패 2개가 장식장 위에 있었다.

"자전거는 열세 살 때 처음 탔어요. 아버지 친구가 일제 자전거를 타고 놀러 오시면 그걸 몰래 타고 돌아다녔거든. 한참 젊었을 때 빼고는 늘 자전거를 탔지." 취미이자 운동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이다. "채소 장사를 그만두니까 심심해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지요. 눈·비 오는 날만 빼고 매일 자전거 타러 나가요." 처음엔 23만원짜리 '철TB(쇠로 만든 생활자전거의 은어)'를 탔는데 몇 차례의 업그레이드 끝에 지금의 사이클을 장만했다.

93세에 이렇게 멋진 헬멧과 자전거복을 입고 사이클을 타는 사람이 전 세계에 몇 명이나 있을까.‘ 국내 최고령 사이클리스트’이완순씨가 자전거복과 헬멧이 가득 걸린 자신의 방 안에서 헬멧을 써보고 있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93세에 이렇게 멋진 헬멧과 자전거복을 입고 사이클을 타는 사람이 전 세계에 몇 명이나 있을까.‘ 국내 최고령 사이클리스트’이완순씨가 자전거복과 헬멧이 가득 걸린 자신의 방 안에서 헬멧을 써보고 있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그가 비타민과 영양제가 그득한 약(藥) 상자를 보여줬다. "자식들이 먹으라고 갖다 준건데, 나는 약 안 먹어요. 자전거가 보약이라니까." 작년에 자전거 타다 넘어져 병원에 들러보니 당뇨, 혈압, 콜레스테롤 그 어떤 성인병 징후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평지에서 시속 37~38㎞까지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가볍고 성능 좋은 카본 사이클이라 해도, 그 속도면 20대 젊은이도 버거운 수준이다. "아침 9시쯤에 나가서 자전거 타다가 오후 5시쯤 집에 와요. 하루라도 이걸 빼먹으면 몸이 착 까부러지면서 잠만 오고… 늙는 게 보인다니까. 무조건 나가야 돼요."

서울 을지로4가에서 태어난 이씨의 학력은 초등학교 중퇴다. 그는 "젊었을 때 건달 놀음을 좋아했다"며 부스스 웃었다. 광복 후 미군 물건을 받아다가 명동 입구에서 보따리장사를 하던 그는 어느 날 영문 모르고 어딘가로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곳에서 의송(義松) 김두한을 만났다. 알고 보니 그곳은 김두한이 감찰부장으로 있었던 대한민청(대한민주청년동맹) 사무실이었다. "김두한씨가 우미관(일제시대 종로에 있던 영화관) 기도(경비원) 출신이거든. 나도 우미관에 들락거리며 김두한씨와 안면이 있었어요. 김두한씨가 나를 알아보고는 구해주더라고." 이후 그는 김두한이 국회의원을 그만둘 때까지 그 밑에서 일했다. 그는 "처음 한 일이 대한민청의 동원 담당이었다"며 "철도 파업 나고 데모 일어나면 경찰 대신 데모 막을 사람들 불러모으는 일"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조씨가 "주먹잽이였지 뭐"하고 거들었다.

이씨는 6·25전쟁 이전 미군의 지원으로 조직된 '켈로(KLO)부대' 출신이다. 이 부대에서 무반동총 사격훈련 중 왼쪽 고막이 파열됐다고 한다. 이후 오른쪽 귀로만 들어왔는데, 그마저 청력이 쇠약해져 인터뷰 내내 고함을 질러야 했다. 북한 침투 직전에 부대가 해산돼 북파(北派) 경험은 없다.

사진을 찍는데 함박눈이 내렸다. 93세 이완순씨와 71세 조경동씨(오른쪽)는“눈이 얼지만 않으면 자전거를 탈 수 있다”고 말했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사진을 찍는데 함박눈이 내렸다. 93세 이완순씨와 71세 조경동씨(오른쪽)는“눈이 얼지만 않으면 자전거를 탈 수 있다”고 말했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30세에 결혼한 그는 58세에 부인과 사별(死別)했다. 장식장 한쪽에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인 영정과 60대 후반에 찍은 이씨의 사진이 나란히 있었다. 이씨는 "내가 재혼해서 다른 사람과 살아보우. 처가에서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볼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쭉 혼자 살아요."

'룸메이트'이자 이씨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조경동씨와는 1970년대 말 우연히 알게 됐다. "내가 채소장사를 시작할 때였어요. 할아버지 혼자 찬거리를 사러 오셨기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집에 가보니 쪽방에서 혼자 사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왕래하며 지내다가 80년대 중반부터는 아예 같이 살고 있어요." 조씨의 말이다. 조씨의 아내는 이들과 가까운데 살면서 반찬도 해주고 살림도 봐준다. 덕분에 두 노인이 매일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셈이다.

이씨는 지금도 매일 담배를 두 갑씩 피운다. "열네 살 때 횟배(회충앓이)때문에 할아버지한테 배운 담배"라고 했다. "약주도 하시냐"고 물으니 "4년 전만 해도 나이트클럽에 다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새벽 3시까지 술을 먹었어. 근데 끊었어요. 술 먹고 자전거 타다가 넘어질까 봐."

여든살이 넘어 자전거 동호인이 된 그가 말했다. "자전거 안 타는 사람한테 권하지는 않아요. 괜히 사고 나면 원망들을 테니까. 그런데 타는 사람한테는 열심히 타라고 하지요. 이게 건강에 최고거든. 다들 나에게 건강의 비결을 묻는데, 이것 말고 다른 게 없어요."

마침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진을 좀 찍자"고 했더니 선뜻 자전거를 끌고 눈 오는 거리로 나섰다. 93세 사이클리스트가 하늘을 원망했다. "날이 좋았으면 탄천 자전거길 가서 멋지게 찍는 건데…."


    한현우 기자 hwhan@chosun.com    입력 : 2012.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