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드러내는 내레이션 없어 "철저히 관찰자 시각으로 촬영"
이홍기 감독의 다큐멘터리 '순천'(順天)은 전라남도 한 지역의 지명이자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하늘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과 자연을 담았다. 촬영도 딱 그렇게 했다. 카메라는 집요하긴 해도 기교를 부리지 않고, 투박한 등장인물들 사이엔 갈등이 없다.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지도 않고 내레이션도 없다. '순천'과 이곳 사람들, 그리고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게 뭔지를 영상에만 의지해서 보여준다. 대본 없는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극(劇) 영화보다 관객을 더 울리고 웃길 수 있는지 '순천'을 보면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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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우숙씨는 스무 살에 순천에 시집을 오면서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어부가 됐다. 고기를 잡을 때 윤씨는 말이 없고, 그를 태우는 낡은 목선만 삐걱거리며 고단한 세월의 소리를 낸다. /리키필름 제공
이 감독은 현각
스님을 다룬 다큐멘터리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1997)를 연출했다. 인물에 천착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그는 "한 사람에 밀착해 그의
슬픔과 기쁨, 희망을 담아내면 거기에서 시대가 보인다"고 했다. 순천에서 촬영을 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뒤로 그는 50㎞ 순천만의 끝과 끝을
6개월 동안 매일같이 걸어다니며 '인물'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찾아낸 인물이 고기잡이를 하며 6남매를 키워낸 할머니 윤우숙씨다. 그는 남편 대신
장정들도 하기 힘든 노동을 50년간 해놓고 "바다 덕분에 먹고살았다"고, "남편을 예뻐한다"고 한다. 그의 성품은 순천을
빼닮았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삶이 뭘까? 삶의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됐어요. 순천이란 곳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만한 곳일 것 같았죠. 육지와 바다를 모두 품은 순천에는 생명이 넘쳐요, 어머니의 품처럼."
촬영을 하기
싫다는 윤씨를 설득한 뒤로 이 감독과 윤씨는 모자(母子)처럼 지냈다. 이 감독이 찾아가면 윤씨는 회를 뜨고 찌개를 끓이며 그를 반겼다. 이
감독이 다큐멘터리의 대상을 대하는 방식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그는 "나는 그들과 거리감을 갖고 철저히 관찰자가 돼야 했다. 이 영화는
'인간극장'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했다. 카메라는 윤씨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기보다는 묵묵히 바라보는 쪽에 더 가깝다.
영화 엔드
크레딧에는 '순천'이 이름을 올렸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순천의 경관을 아침부터 밤까지, 봄부터 겨울까지 바뀌는 색깔과 소리를
담아낸다. 낮에 펄에서 짱뚱어가 진흙을 요란하게 튕기며 뛰놀면, 밤에 바다에서는 파도가 윤우숙씨의 고깃배를 철썩철썩 때린다. 화면에서 불어오는
순천의 바닷바람에 전남과 순천의 말(言) 냄새도 배어 있다. 특히 윤씨는 차마 기사에 쓸 수 없는 비속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말에 리듬을
실어주는 구두점 같은 구실을 한다.
세상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자연 다큐멘터리이지만, 무엇보다 '순천'은 기이한
러브스토리이다. 윤우숙씨는 남편 때문에 50년간 호강은커녕 고생만 했다. 그는 "몸이 전국구로 아파" 하고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회를 뜨면 남편
몫은 한 움큼 덜어놓는다. 영화 초반에 김종선 계장은 윤우숙씨에게 "영감 죽으면 울 거이가"라고 묻자 윤씨는 피식 웃으면서 "옛날 말 맹키롬
쿠라쿠라 그러겠제"라고 대답한다. '조쿠라(좋구나)'라서 '쿠라쿠라'다. 남편의 장례 때도 그는 "나가 절 한자리 해(내가 절 한번 할게)"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그래 놓고서 결국은 남편의 영정에 술을 올리다 엉엉 울며 이렇게 노래 부른다.
"나의 간장 다 녹이고 허망하게
가버린 사람/ 뒤도 돌아다보지 말고 잘 가소/ 장에만 갔다 늦게 와도 뭐 하다가 이제 오냐고 하더니만/ 나를 어찌 잊고
가는가."
25일 개봉. 전체관람가.
변희원 기자 조선 입력 : 201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