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국제영화제] 임권택 감독 102번째 영화 '화장'

해암도 2014. 10. 6. 04:24

끝없이 달라붙는 욕망, 그것과 싸우는 게 인생


이상문학상 김훈의 단편 원작… 삶의 어둠·밝음 끊임없이 대비
오래되어 의무가 된 사랑도 아름답다는 평범한 사실 담아


남자(안성기)는 화장품 회사의 임원이었다. 아내(김호정)는 2년 동안 세 번 수술을 받았다. 뇌종양이었다. 독한 약물을 먹었고, 수시로 위액을 게워냈다. 정신이 혼미해져 대소변을 못 가렸다. 남자는 자주 병원에 들러 메마른 아내의 몸을 닦아내고 기저귀를 갈았다. 상태가 조금 나아질 땐 함께 별장에 갔다. 남자는 비아그라를 먹고, 침대에서도 삭발한 머리에 쓴 모자를 벗지 않는 아내를 안았다. 그런데 아내를 안을 때조차 남자의 머릿속엔 젊은 여자의 환상이 맴돌았다. 고단한 삶과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젊고 아름다운 신입사원(김규리)이다.

임권택(80) 감독이 5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102번째 연출작 '화장'의 첫 시사를 열었다. 2004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김훈의 단편 '화장'이 원작이다. 제목 '화장'은 죽은 사람을 불태우는 화장(火葬)이기도, 산 사람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이기도 하다. 영화는 생에 대한 의지, 성(性)적 본능, 삶의 어둠과 밝음, 죽음의 두려움과 생의 절실함 등 충돌하는 의미들을 화면에 대비시킨다. 올해 팔순을 맞은 노감독은 이날 기자들을 만나 "그동안 어떤 세월을 살아낸 얘기를 영화로 삼아 거기에 한국적 정서를 심어내려 꽤나 애써왔는데, 이번엔 해오던 틀로부터 훌훌 빠져나왔다"고 했다.


	임권택 감독의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화장’의 한 장면.
임권택 감독의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화장’의 한 장면. 화장실에서 남편의 도움을 받던 병든 아내는 자기 몸조차 통제할 수 없는 고통과 미안함에 울음을 터뜨린다.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는 무엇보다 재미있다. 윽박지르지 않는데도 자연스레 따라가게 만드는 이야기의 뚝심도 있다. 임 감독은 "김훈 작가의 서늘한 문장, 그 엄청난 힘을 영상으로 드러낸다는 게 사실은 원래 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들의 명연이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았다.

영화 속에서 남자의 딸은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적 없었다"며 몰아붙인다. 처제는 "언니를 화장(火葬)시키는 건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쏘아붙인다. 하지만 남자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젊은 신입 여사원이 불쑥불쑥 머릿속에 밀고 들어오지만, 흔들리는 남자는 더 굳게 입을 다문다. 안성기는 요즘 문학과 영화에서 늘 부재(不在)하거나 무너진 존재였던 '남편·아버지·남자'를 속 깊고 단단한 존재로 드러낸다.

영화는 또한 풍화되어 의무가 된 듯 보이는 사랑도 똑같은 사랑이며,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사랑만큼이나 아름답다는 평범한 진실을 일깨운다. 특히 병든 아내 역의 김호정은 놀라운 감정의 폭발력을 보여준다. 화장실에서 남편에게 기대어 대소변을 보다, 서러움과 부끄러움에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임 감독은 "나이 들어 살아보니까 끝도 없이 달라붙는 욕망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런 거와 싸워가면서 사는 것이 인생 아닌가, 우리가 그걸 이겨내는 것은 절제의 힘, 이성과 인격의 힘이 아닌가 싶어요. 인생이란 게 그렇게 돼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 것을 찍어낸 것이고요."
부산=이태훈 기자   조선  입력 : 2014.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