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명환의 씨네칵테일> - 장고

해암도 2013. 3. 29. 05:46

 

 ‘장고…’에 가득한 ‘악동’ 타란티노의 만화적 상상력

  • '장고-분노의 추적자'에서 함께 길을 가는 장고(제이미 폭스)와 정의의 헌터 닥터 킹 슐츠(크리스토프 왈츠). '말 탄 흑인 건맨'은 기존 서부극의 틀에 대한 타란티노식 뒤집기다.

    스크린에 노출되는 혈액의 양으로만 보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분노의 추적자(Django Unchained)는 사실 유혈참극 수준입니다. 데뷔 초기부터 ’헤모글로빈(혈액의 성분)의 시인‘이라는 엽기적 별명을 가졌던 감독은 중년의 나이에도 변함없이 붉은 빛을 좋아하는 듯합니다.

     

    전통적 웨스턴 무비를 비틀어댄 이 영화에서도  총격에 맞은 인물들 몸에선 셀 수도 없이 많은 핏물들이 튑니다. 수십 명이 뒤엉켜 서로 총을 난사해 대며 유혈 난장판을 벌여 건물 바닥이 붉은 빛이 됩니다. 사람이 개에 물어뜯겨 죽는 대목도 있습니다  끔찍한 것 싫어하는 관객이라면 눈을 가리고 싶은 대목이 꽤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장고…’는 잔혹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잔혹성의 수위가 타란티노 감독의 전작 ’킬빌‘같은 작품보다 아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공포에 질리게 만들려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이 영화의 독보적 상상력은 많은 대목에서 사람을 놀라게 하기 보다는 낄낄 웃게 만듭니다.
     
    타란티노는 미국 영화의 전통적 장르인 서부극을 기발하게 비틀어댑니다.백인 농장에 노예로 붙잡혀 고통받고 있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총을 뽑아든 흑인 노예 출신 장고(제이미 폭스)의 복수극입니다. 악당을 응징하는 정의의 총잡이라는 서부극 틀에 ‘탐욕스런 백인‘에 맞서는 흑인 노예의 역사적 투쟁의 구도를 절묘하게 밀어넣은 재치만으로 영화가 범상치 않은 흡인력을 보입니다. 

     

    정통 서부극에서야 여성 캐릭터의 존재는 한 필의 말 만도 못했지만 이 영화에선 다릅니다. 주인공 장고는 한 여자를 구해내기 위해 갖은 고난을 무릅쓰는 백마 탄 왕자 같은 로맨티시스트입니다. 장고는 운 좋게도 ‘정의의 현상금 사냥꾼’ 킹 슐츠(크리스토프 왈츠)를 만나 도움 받아가면서,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제왕처럼 군림하는 캘빈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농장에 진입합니다. 거친 대결들이 스크린을 가득 메웁니다. 백인보다 더 악랄하게 흑인들을 짓밟는 흑인 집사(사무엘 잭슨)의 모습엔 지배자의 앞잡이가 된 변절자들에 관한 인간사의 진실도 녹아 있습니다.

    '장고-분노의 추적자'에서 흑인 노예들 위에 군림하는 백인 농장주 캘빈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의 충실한 심복인 흑인 집사 스티븐(사무엘 잭슨).
    ‘장고…’를 보는 가장 큰 재미는 타란티노식 재기발랄함을 만나는 데 있습니다. 웨스턴 무비의 황량한 공간 한복판에 21세기 랩을 기막히게 어울리게 밀어넣은 음악적 센스도 사람을 즐겁게 하지만, 끝도 없는 재치와 만화적 상상력이 167분이라는 짧지 않은 상영시간을 빼곡하게 채웁니다. 
     
    만화적인 상상력의 구체적인 특징은 유치하고 비현실적이며 과장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이 영화에 난무하는 유혈 장면부터가 실은 만화적입니다. 사람이 총에 맞자마자 핏물과 살점이 튀어나오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게 어디 있을까요. 리얼리티의 잣대를 들이대면 빵점이죠.
     
    타란티노 감독이 이런 사실을 모를리는 없겠죠. 악동같은 타란티노가 일부러 만화처럼 묘사한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의 총격보다는 대중들이 머릿 속에서 멋대로 생각해 온  총격 모습, 만화책에나 나올 법한 과장된 장면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는 편이 더 재밌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속 유혈극들이 우리 관객에게 거부감을 안길 수는 있지만, 그나마 만화적 비현실성이 완충 장치의 역할을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곳곳에서 맛깔나게 양념을 치고 있는 타란티노의 유머들 역시 만화처럼 유치합니다. 이를테면 흑인들에 대한 테러를 하러 나선 초창기 KKK단들끼리 ‘흰 두건’을 놓고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자신들의 상징으로 눈·코·입만 구멍을 뚫은 자루를 두건처럼 뒤집어 썼는데, 몇 사람이 “눈 구멍의 위치를 잘 못 뚫는 바람에 앞도 잘 안 보이고 숨도 못 쉬겠다”고 불만을 터뜨리면서 소란이 벌어집니다. “누가 이걸 만들었어?”라고 따지고 “오늘은 그냥 벗고 활동할까?” “그래도 우리 상징인데 써야지”라고 갈팡질팡 갑론을박 하는 분위기 자체가 계속 웃음보를 터뜨립니다.
    '장고-분노의 추적자'에서 장고(제이미 폭스)와 그의 여인인 브룸힐다(케리 워싱턴). 영화는 노예신세로 고통받는 브룸힐다를 구하러 나선 장고의 이야기다.
    ’흰 두건 소동‘의 분위기는 바로 타란티노 감독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속 ‘코드 네임 소동’대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뒷골목 보스는 건달들을 데리고 은행털이를 모의하면서 보안 유지를 내세워 부하들에게 이름 대신 색채명을 이용한 코드네임을 부여하는데 ‘핑크’를 부여받은 인물이 반발합니다. “난 핑크 싫어. 여자 같잖아.” 그러자 다른 인물이 “왜 핑크가 어때서? 나랑 바꿀까?”라고 끼여듭니다.

     

    보스가 자못 엄숙하게 경고합니다.“안돼! 너희들 맘대로 바꾸지도 마.” 뒷골목 3류 건달들밖에 안되는 주제에 거대 마피아의 비밀작전을 흉내내 코드명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패러디적인 우스꽝스러움을 안기면서 관객의 웃음샘을 묘하게 건드렸습니다. 이번 ’장고‘에도 오래 기억날 세련된 대사의 하이 클래스 유머가 아니라 완전히 촌스런 B급 유머들이 난무합니다. 어딘가 허접한데 그 허접함 때문에 더 웃기는 유머입니다.

     
    이런 B급 유머와 짝을 이루는 것은  풍부한 잡학(雜學) 지식들이 나열되는 실없는 대화입니다. 타란티노 영화에 꼭 빠지지 않는 요소이기도 하죠. 장고의 아내 이름 ’브룸힐다‘때문에 독일 브룸힐다의 전설이 등장하고, ‘흑인은 애초부터 두개골 상이 백인과 달라 복종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식 해부학 이론도 나옵니다.
     
    다채로운 재미를 버무려 관객들을 묘한 별천지로 잠시 빠뜨리게 하는 게 타란티노 영화의 개성이라고 봅니다. 그의 영화가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을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넘어야할 벽이 있기 때문이죠. “당신 영화는 왜 항상 잔혹하냐”는 항변에 타란티노는 “처참한 현실을 기록한 영화가 아니라 재밌자고 꾸며낸 영화 잖아요”라는 취지로 답했다고 합니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이런 영화관(映畵觀)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갈채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  김명환 기자  : 2013.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