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빨간 색연필로 휘갈겨 쓴 점수 옆에 부모님 싸인을 받아오라고 하던 기억이 납니다.
점수가 신통찮을 때는 엄마 몰래 어른 글씨를 흉내내어 위조싸인을 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런 건 다 옛시절의 풍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습니다.
엄마가 교과과정을 아이보다 더 훤히 꿰고 있고, 아이가 잘 틀리는 문제유형까지 파악하고 있습니다.
모든 준비와 관리는 엄마가 대신하고, 아이는 엄마를 대신해 시험을 보러 들어가는 형국입니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아이 대신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는 아내를, 며느리를, 딸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현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안녕하십니까? 홍여사님.
저는 서울에 거주하는 사십대 남성입니다.
제 아들 녀석이 현재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직장인 뺨치게 바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방과 후에 영어 학원 가는 날이 있고, 수학 학원 가는 날이 있지요.
학교 숙제에 학원 숙제까지 하루하루를 수습하기도 바쁜 생활이더군요.
물론 그 모든 것들은 아내가 고민하고 결정한 사항들입니다.
여섯 살 때 영어 유치원을 넣은 것을 시작으로 아이의 공부에 관한 모든 것을 아내가 매니지먼트 해왔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학원 다니기 싫다고 해서 걱정이라는데, 어찌된 게 우리 아이는 엄마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합니다.
그리고 어느 것이나 평균 이상은 해내다 보니, 엄마의 얄팍한 자부심과 열의에 점점 더 부채질을 하는 격이지요.
잘 따라오는데 무슨 고민이냐고 하시겠지만,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가 대신 공부해주다시피 해서 나오는 1등 성적이 무슨 소용인지요?
아들과 아내의 밀착정도가 너무 심하고, 아내의 머리는 온통 아들의 학교 성적과 학원 레벨테스트 결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많은 것들을 외면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은 아들의 기말고사 시즌입니다.
초등학생 기말고사라는 것이 전날 밤에 책 한 번 훑어보고 평소실력으로 임하는 건 줄 알았던 저로서는 적응이 쉽지 않은 현실이 펼쳐지더군요.
기말고사는 실상 엄마와 아이가 함께 뛰는 이인삼각 경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최소 3주 전부터 마주앉아 문제를 풀고 채점을 하는 건 기본이고,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기말고사를 향한 긴 여정의 일부입니다.
평일엔 학원 때문에 시간이 안 나니 주말이 중요하다 해서, 지난 주말에 저는 조용히 집을 빠져나와 동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점심 식사도 혼자 해결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보니 아내와 아들은 파김치가 되어 있더군요.
그러나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협조를 하지요.
문제는 시험공부 때문에 자식의 인성교육까지 포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필이면 저희 어머니 생신이 기말고사 시즌입니다.
자식들이 모이기 위해, 부모님 생신을 토요일이나 일요일로 앞당기곤 하는데, 그게 항상 시험 치기 직전 주말이 되더군요. 당연히 아내의 공부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요.
그러나 초등 1학년 때까지만 해도 못 가겠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
궁시렁거리면서도 따라났지요.
가서는 또 싹싹하게 잘 하니까 어른들도 아무 눈치를 못채시고요.
그런데 2학년 때부터는 슬슬 불만이 새어나오더군요.
우리 모자는 좀 빼주면 안 되냐고요.
다른 형제들은 학교 다니는 아이가 없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맏며느리인데 제 아내만 행사에 빠진다는 게 쉬운 일인가요?
제가 설득을 하고, 나무라기도 해서 간신히 데려갔지요.
그런데 이번 기말고사에는 아내가 미리 선언을 하네요. 못 간다고요.
지난번 중간고사 때 성적이 많이 올랐답니다. 아이가 감을 잡은 김에 조금만 더 쏟아부으면 일등이랍니다.
초등 사학년이란 시기는 일등의 맛을 보고 성취동기를 고취시켜야 하는 시점이기에 여기서 주춤거릴 수는 없답니다.
죄송하지만 어머님도 이해해주실 거랍니다. 그 대신 시험 끝나고 부모님 초대해서 따로 대접도 하겠답니다.
저는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 년에 몇 번이나 뵙는 부모님이라고, 초등생 기말 고사 때문에 생신에 참석 안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내의 설득을 듣다보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어머님, 수월하게 이해하고 넘어가 주실 분이 절대 아니지요.
한 까탈 하는 동생들 보기에 제 입장도 말이 아니고요.
이런 저런 거 다 알면서 막무가내로 나오는 아내가 원망스럽습니다.
아내는 처갓집을 예로 들며 저를 압박합니다.
장모님 생신이 중간고사 2주 전쯤인데, 외며느리인 처남댁이 이미 몇 년 째 불참입니다.
그래도 아무도 불만이 없고, 오히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거지요.
하나뿐인 우리 친손자 백점만 맞을 수 있다면 내 생일 같은 건 없애버려도 상관없다고 하신답니다.
앞으로는 우리도 당신 생일에 올 필요 없다고 하신답니다.
그런 게 바로 손자 사랑 아니냐고 하니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 제 어머니는 손자 사랑이 부족하다는 결론인가요?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아내의 생각이 틀렸다고 외치고 싶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말도 안 나옵니다.
어머니한테 죄송한 마음도 들면서 동시에 왜 좀 융통성 있게 넘어가주시는 성격이 못 되시는지 답답하기도 됩니다.
아들놈 교육에 관해 주도권도 원칙도 다 빼앗기고 사는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아들 노릇조차 내려놓아야 하는 게 요즘 우리네 현실인지 묻고 싶네요.
조선 2014-07-09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손수레에 아우디 긁힌 차주, 오히려 "죄송하다" 사과…"인성이 부럽다" (0) | 2014.07.17 |
|---|---|
| 밥 값 한 번 낼 생각이 없는 자식들, 서글퍼지네요 (0) | 2014.07.17 |
| 은퇴한 아빠의 실상부터 알려라 (0) | 2014.07.04 |
| 부부 싸움의 기술 (0) | 2014.06.24 |
| 성형수술 ........진짜 좋은 사례 ..... (0) | 2014.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