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러,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왜 넘겼나
- 흐루쇼프와 첫째 아내 니키타 흐루쇼프(왼쪽)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첫째 아내 예프로시냐 파사레바. /위키피디아
러시아군이 무혈입성한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半島)는 양국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곳이다. 러시아 영토였던 크림 반도는 1954년
우크라이나로 편입됐다. 니키타 흐루쇼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뜻이었다. 흑해 함대가 주둔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왜
넘겨줬을까.
Q. 편입은 흐루쇼프의 단독 의사 결정이었나.
A. 그렇다. 당시 소련 헌법에
따르면 영토 문제는 최고 소비에트 회의의 동의와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1953년 서기장에 취임한 흐루쇼프는 절차를 생략하고 이듬해
편입을 일방적으로 지시했다. 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에 주는 '흐루쇼프의 선물'이라 불릴 정도였다.
Q. 크림 반도를 왜
우크라이나에 줬나.
A. 흐루쇼프를 소련 최고 지도자로 키워준 건 8할이 우크라이나였다. 애정과 정치적 야심이 배경이
됐다. 흐루쇼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 마을 칼리노프카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가족이 우크라이나 도네츠로 이사한 뒤, 광산을
전전하며 잡일을 했다. 1916년 결혼한 첫째 아내 예프로시냐는 우크라이나 현지 광산 엘리베이터 작동공의 딸이었다. 결혼 3년 만에 대기근으로
아내가 사망하자 우크라이나계 소작농 딸 니나 페트로브나와 재혼했다.
정치적으로도 우크라이나 계파에 힘입어 성장했다. 1918년
공산당(볼셰비키)에 가입한 후, 라자르 카가노비치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장의 눈에 들어 중앙 무대에 진출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치기도 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식량 문제를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 194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원이 됐다. 스탈린 사후 정적을
제거하고, 우크라이나 출신을 요직에 배치시켜 권력을 잡았다. 크림 반도 할양도 지지 세력 강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Q.
흐루쇼프 자신도 우크라이나인이었나?
A. 흐루쇼프 집안은 러시아계였다. 흐루쇼프는 자신도 "나는 러시아 사람"이라고
밝혔다.
Q. 영토 편입은 어떻게 이뤄졌나.
A. 흐루쇼프는 할양 10년 전부터 해당 안을 구상했다.
스탈린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에 협력한 크림 반도 타타르족 30만명에 대해 추방 명령을 내렸다. 흐루쇼프는 그때부터 전쟁 여파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농민을 크림 반도로 이주시킬 계획을 짰다. 1954년 이뤄진 편입의 공식 명분은 제정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병합 300주년
기념이었다. 당시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가 지정학적으로 가깝고, 경제적·문화적으로도 연관돼있다"는 병합 근거를
댔다.
Q. 당시 러시아나 크림 반도의 반발은.
A. 소련이 건재했던 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한 나라와 다름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 러시아에 민족주의 바람이 불면서 반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흐루쇼프·흐루시초프
흐루쇼프는 예전에는 국내 언론들이 ‘흐루시초프’로 표기했으나, 현재는 개정된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현지 발음에 가까운 ‘흐루쇼프’로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