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떠났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의 집엔 아홉 살 소년과 두 형, 남동생만 남았다. 친척 아주머니가 가끔 들러 이들을 돌봤다.
'정신 재무장 교육'을 위해 당 간부들을 산간벽지로 보내 거친 노동을 하도록 하는 '하방(下放)'은 문화대혁명 시기, 1960년대 말 중국에선
흔한 일이었다.
부모는 3년이 다 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밖에서 말썽 피우지 말고 그림이나 그리렴." 어머니의 말을 떠올린 소년은 부모가 그리울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신문 만화도 베끼고 전쟁 장면도 그렸다.
"나는 정말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마치 한번 들어가면 헤어나지 못하는 늪에 빠진 것처럼."
지난달 24일 대구미술관.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장샤오강(張曉剛·56)은 나직하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그림 그렸던 유년기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는 '가장 비싼 중국 현대미술 작가 중 한 명'이다.
2011년 소더비 홍콩 경매에서 그의 세 폭짜리 유화 '영원한 사랑'(1988)이 7906만 홍콩달러(약 110억원)에 팔리며 중국 현대미술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쩡판즈(曾梵志·50)의 '최후의 만찬'(2001)이 1억8044만 홍콩달러(약 250억원)에 팔리기 전까지 그는 '가장 비싼 중국 현대미술 작가'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다.
부모는 3년이 다 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밖에서 말썽 피우지 말고 그림이나 그리렴." 어머니의 말을 떠올린 소년은 부모가 그리울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신문 만화도 베끼고 전쟁 장면도 그렸다.
"나는 정말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마치 한번 들어가면 헤어나지 못하는 늪에 빠진 것처럼."
지난달 24일 대구미술관.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장샤오강(張曉剛·56)은 나직하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그림 그렸던 유년기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는 '가장 비싼 중국 현대미술 작가 중 한 명'이다.
2011년 소더비 홍콩 경매에서 그의 세 폭짜리 유화 '영원한 사랑'(1988)이 7906만 홍콩달러(약 110억원)에 팔리며 중국 현대미술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쩡판즈(曾梵志·50)의 '최후의 만찬'(2001)이 1억8044만 홍콩달러(약 250억원)에 팔리기 전까지 그는 '가장 비싼 중국 현대미술 작가'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다.
- 장샤오강이 대구미술관에서 가장 큰 전시장인 ‘어미홀’에 섰다. 높이 18m, 넓이 750㎡(약 227평)의 이 공간에서 그는 올 6월 개인전을 갖는다. 그는 “나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많은 돈을 벌게 됐으니까”라고 했다. /대구=남강호 기자
아침엔 쉬고 주로 밤에 작업한다는 이 화가는 새벽에 베이징 집을 나서 오전 열한 시에 대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끊임없는 회의(會議). 기자를 만난 오후 다섯 시에는 꽤나 지쳐 보였다. 청바지와 후드티, 예술가답게 간편한 차림. 미술 이론에도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이 작가는 명성대로 달변이었다.
◇"돈 많이 버는 행운이 찾아온 건,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에 '가격'을 매기는 걸 싫어한다. 작품성만으로 평가받고 싶기 때문이다. 작품값 이야기만 나오면 안색이 변하는 예술가도 있다. 장샤오강은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당신은 '가장 비싼 중국 현대미술 작가'라 불린다. 작품 자체보다 110억원이란 작품가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런 얘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돈 때문에 예술가의 길을 간 건 아니다. 명예와 이익을 좇은 것도 아니다. 화가의 길에 들어선 첫 10년 동안 작품값과 상관없이 작품 활동을 계속해 왔다."
―처음부터 잘 팔리는 작가였나.
"서른 살 무렵 처음으로 그림이 팔렸다. 한 점에 200위안(약 3만5000원) 정도 됐을까. 얼마 안 되는 돈이었지만 만족했다. 미술품 시장과 예술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돈이 중요하긴 할 것 같은데.
"나는 정말 행운아다. 좋아해서 그림을 그렸고 그걸 계속하다 보니 우연히 행운을 만나 돈을 많이 벌게 됐다. 하지만 나에겐 돈보다는 예술이 중요하다."
- 장샤오강(張曉剛)의 대표작 ‘혈연: 대가족’ 연작. 1994년작 ‘혈연:대가족 no.1’, 가로 179㎝·세로 150㎝, 경매가 약 91억원(장샤오강 역대 경매가 2위),
"(웃으며)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행운아라고. 그 행운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 내가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못 그렸다면 그런 행운이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지. 그래서 예술가는 돈을 중요시하면 안 된다는 거다. 역량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레 행운이 찾아온다. 내 작품은 6년 전부터 아주 비싸게 팔리기 시작했고 지난해 값이 더 올랐다. 그래서 나는 심리적으로도 안정돼 있다."
2008 베이징올림픽 몇 년 전부터 중국에선 장샤오강·쩡판즈·웨민쥔·왕광이 등 소위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의 작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경제는 호황이었고 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사회는 들떠 있었다.
서진수 미술시장연구소장은 "당시 40대였던 이 작가들의 연배가 중국 신흥 컬렉터들과 비슷했다. 이들은 자신과 동시대를 그리는 작가들을 아꼈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장샤오강의 명성은 극소수 컬렉터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미술 시장' 안에서 드높았을 뿐 대중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에서 장샤오강 등 중국 현대미술 작가들이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진 건 2011년 부산저축은행 불법 대출 사건 때문이었다. 장샤오강의 대표작 '혈연: 대가족'도 불법 대출 담보로 이용돼 연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당시 작품가는 14억원으로 알려졌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이 계기가 돼 한국의 보통 사람들도 '중국 현대미술은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돈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대중이 오해할 수도 있는 사건 같다. 예술가가 돈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면 좋은 작품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예술가가 '돈맛'을 알기 전에 그린 구작(舊作)이 비싼 거 아닌가. 당신 작품도 구작이 비싸다.
"내 옛날 작품이 요즘 그림보다 더 가치 있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마다 상황이 다르다. 어떤 작가들은 초기작에 더 많은 열정과 정성을 들인다.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리는 작가도, 진짜 '예술'을 위해 그리는 작가도 있다. 나무에 나이테가 있듯 예술가에게도 등급이 있다. 무조건 예술과 돈을 결부해서 이야기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선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한 기세로 말을 이었다.
"2006년 내 그림이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약 100만달러에 팔렸단 소식을 들었을 때 믿기지 않았다. 100달러에 팔렸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100달러 벌면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야지'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런데 100만달러라니…."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전등이 꺼졌다. 어둠이 인터뷰의 맥을 끊을까 걱정했는데 그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중국에서 미술 시장은 짧은 시간 내에 형성됐다. 그림이 그렇게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시장이 갑자기 커지는 건 예술가에겐 어떻게 보면 '시련'이다."
'시련'이란 단어와 함께 다시 불이 들어왔다. 암전(暗轉)이 끝난 무대에 선 배우가 관객을 대하듯 진지한 눈빛의 사내가 조용히 기자를 응시했다.
―'시련'이라니?
"예술가라고 해서 돈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자기가 생각할 땐 1만달러 정도의 값어치인 작품이 갑자기 100만달러가 돼 버릴 때…. 그 엄청난 차이가 예술가에겐 '자극적인 도전'이 돼 버린다. 돈에 연연하기 시작하면 예술을 돈으로 보게 된다."
- 장샤오강(張曉剛)의 대표작 ‘혈연: 대가족’ 연작. 1995년작 ‘혈연-대가족’, 가로 229㎝·세로 179㎝, 경매가 약 79억원(3위)
장샤오강은 중국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쓰촨(四川)미술학원 출신이다. 공무원인 아버지는 아들의 미대 진학을 반대했다.
―부모 반대에도 화가를 고집한 이유는.
"간단하다. 미술을 좋아하니까. 그래도 대학 입시를 치를 땐 고민을 했다. 1970년대 중국에선 이공계 관련 학과에 진학해야만 '대학생' 대접을 받고 주류에 편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예술을 한다고 하면 업신여겼다."
―졸업 후 취직이 안 돼 고생했다는데 후회는 안 했나.
"후회는 대학 입학 직후에 많이 했다. 쓰촨미술학원이 내 고향 윈난성에 배당한 입학 정원은 딱 한 명이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터라 의기양양했는데 입학해 보니 우리 과 18명 중 내 입학 성적이 가장 낮았다. '아, 나는 모자라는구나' 하면서 자퇴할까 고민도 많이 했다."
대학 시절 그는 '이단아'였다. 마오쩌둥 시대에 유행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즉 혁명적 발전을 위해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화풍(畵風)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 '남다름'이 곧 재능이었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1982년 쓰촨 지역의 소수민족을 반(半)추상에 가까운 터치로 표현한 '폭우강림'(1981)이 유명 평론가 리셴팅(栗憲庭)의 극찬과 함께 권위 있는 잡지 '미술'에 소개되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 비범한 화가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일자리는 없었다. 실의에 빠져 고향에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취직되기 전엔 짐도 풀지 말라"고 했다. 간신히 가무단 미술 담당으로 취직되었지만 삶은 여전히 쓰라렸다. 낮에는 싸구려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미대 친구들과 모여 마음속 격랑을 화폭에 쏟아넣었다. 술독에 빠져 사는 생활이 2년 넘게 계속됐고 결국 위출혈로 병원 신세를 졌다.
두 달 입원해 있는 동안 그는 오히려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그는 환자들을, 임종을, 시체를 스케치했다. 실존주의에 심취했던 이 시기, 그는 존재의 허무와 죽음을 주제로 한 '유령 연작'을 그렸다. 그렇게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극복한 '85 미술 신조류 운동'의 선구자로 중국 현대미술사에 이름을 남겼다. 모교 쓰촨미술학원의 강사 자리도 구했다. 1988년의 일이다.
- 장샤오강(張曉剛)의 대표작 ‘혈연: 대가족’ 연작. 1993년작 ‘혈연-대가족:가족 no.2’, 경매가 약 73억원(5위), 가로 130㎝·세로 110㎝.
장샤오강의 대표작 '혈연: 대가족' 연작은 1990년대 초반 탄생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의 경직된 사회주의 문화를 비판하는 이 작품은 사회사적 의미와 함께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키며 미술품 수집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장샤오강의 역대 경매가 10위 작품 중 8점이 이 연작에 속한다.
―'혈연: 대가족' 연작의 탄생 배경은?
"1992년 석 달을 유럽에서 지냈다. 미술관과 화랑을 많이도 돌아다녔다. 당시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한 상태였다. '내 예술은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문제로 혼란스러웠다. 1989년의 톈안먼(天安門) 사태는 중국에 변화의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그 변화와 내 감각은 어떻게 결부돼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인가.
"나는 대학에서 그리스 석고상을 보며 드로잉 연습을 했다. 서양 화법으로 그림 그렸다. 그러나 '중국인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공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유럽에서 서구 예술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동양에서 자랐지만 서양의 예술을 했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 괴리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컸다."
―고민의 결론은?
"작가는 반드시 작품 속에 자신의 이야기와 역사적 배경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은 쉽지만 그걸 표현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1992년 내내 나는 작품 안 하고 놀았다. 이듬해에야 '뭘 그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첫째는 내 주변 사람들, 둘째는 톈안먼 같은 중국 공공 건물, 셋째는 과거의 사물들…. 이 세 가지 중 뭐가 옳은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앞으로 가 보자'고 생각했다."
―서양에 가서야 비로소 서양의 영향에서 벗어나다니 역설적이다.
"어떻게 보면 예술에 대해 절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절망이라니?
"미술관에서 수많은 작품을 보고 나자 '너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냐' '너는 앞으로 뭘 해야 하느냐' 여러 가지 화두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절망이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해바라기'를 보고 미술관 문을 나서면서 '대체 나는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자칫하다간 결국 반 고흐를 좋아하는 학생에 불과하겠군' 생각했다. 학교에서 배운 반 고흐는 그냥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유럽에서 만난 그는 '위대한 서양 예술가'였던 거다. 그 때문에 귀국 후에 '중국인의 진정한 모습'을 연구하게 되었다."
- 대구미술관 벽에 장샤오강이 이번 전시에 출품할 ‘연인’(1999)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장샤오강은 “1960년대 중국 소시민의 사진을 소재로 한 가정의 성장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대구=남강호 기자
"고향집에 갔다가 부모님의 옛날 사진을 보게 되었다. '우리 엄마가 젊었을 때 참 미인이었구나' 하고 느꼈다. 획일화된 포즈, 집단의 일원이라는 걸 강조하듯 찍힌 문혁 시기의 그 사진을 보면서 '사회가 상당히 가정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구나' 하고 깨닫게 된 거다. 나는 옛날 사진을 통해 보통 가정, 보통 개인이 그 시대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가족사진을 소재로 나의 인생, 운명, 그런 복잡한 관계를 그림에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작품 '대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보수적인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
유럽에 가기 직전인 1980년대 후반 장샤오강은 중국 전통 회화에 심취했다. 중국 인물화의 최고봉인 동진(東晉)의 고개지(顧愷之), 서정적 산수화로 유명한 남송(南宋)의 마원(馬遠) 등이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유럽 체류는 그에게 중국 전통과 서양을 결합할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다.
―2006년 서울 '아트사이드' 전시 이후 한국 첫 개인전이다. 왜 대구미술관인가?
"'인연'이다. 김선희 대구미술관장의 대만 친구가 내 친구다."
―이번 전시에서는 뭘 보여줄 건가?
"일종의 '회고전'이 될 거다. 회화 외에 조각 등도 나온다. 나라는 작가의 성장과정을 한국 관람객에게 보여주고 싶다."
―당신은 어떤 예술가가 되고 싶은가?
"성심성의를 다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나는 순수 관념적인 예술가는 못 될 것 같다. 그리고 예술의 언어를 연구하는 예술가도 못 될 것 같다. 나는 인간의 내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아주 전위적인 예술가'였다고는 기억되고 싶지 않다. '아주 보수적인 예술가였다'고 기억되고 싶다. 이유는 없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의 속성이라 예술가는 대개 시대의 전복(顚覆)을 꿈꾸는 법이다. 그럼에도 '보수성'을 귀히 여기는 이 작가는 자신의 '아방가르드'가 이미 중국 미술에선 '역사'가 됐음을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 110억원 경매價 ‘영원한 사랑’ 장샤오강의 1988년작 ‘영원한 사랑’. 2011년 소더비 홍콩 경매에서 7906만 홍콩달러(약 110억원)에 팔리며 당시 중국 현대작가 작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블룸버그
장샤오강의 작품 누가 사나
장샤오강은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참여로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렸지만 1997년까지만 해도 정작 중국 본토에서는 전시회를 열 수 없었다.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그의 작품이 정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그의 전시회는 대부분 유럽에서 열렸다.
서구 진출의 교두보는 홍콩이었다. 윤재갑 상하이 하우(昊)미술관 디렉터는 "홍콩 화랑 한아트 디렉터 장송런(張頌仁)이 미국 유학파로 인맥이 좋았다. 장샤오강 또래의 중국 작가들이 대부분 그를 통해 홍콩에서 데뷔했다"고 말했다.
이 시기 중국 미술에 관심이 많은 서구 컬렉터들이 장샤오강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스위스의 울리 지그(Sigg)가 대표적인 예. 2011년 당시 중국 현대미술 경매가 최고가를 기록한 장샤오강의 '영원한 사랑'(1988)도 벨기에 컬렉터 기 울렌(Ullens)의 소장품이었다.
1997년의 홍콩 중국 반환이 컬렉터층에 변화를 가져왔다. 홍콩에 부동산을 사기 시작한 중국 부호들이 미술품에도 눈을 돌렸다. 미술품이 매력적인 '로비 수단'이라는 것도 구입 열풍에 한몫했다. 중국 밖 화교(華僑)들도 가세했다. '중국 작가 작품이 피카소보다 쌀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신(新)중화주의가 이런 분위기를 부추겼다.
프랑스의 미술시장 분석업체 아트프라이스에 따르면 2010년 중국은 미술품 경매 총액에서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 33%로 미국(29.9%)을 앞지르며 1위를 차지했고, 2011년과 2012년에도 그 기세를 이어 나갔다.
중국 미술시장 성장세를 전 세계가 주목하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 장샤오강은 '전 세계적으로 팔리는 작가'가 됐다. 장샤오강은 현재 미국 메이저 화랑 페이스 갤러리 전속 작가다. 최윤석 서울옥션 이사는 "홍콩 경매를 통해 중국인들이 일단 '가격'을 만들어 주고 나니 서구 컬렉터들이 관심을 보인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