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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 빠진 외국인들, 종로서 '신의 한 수' 찾는다

해암도 2026. 8. 13. 10:43

바둑 세계화 중심지 된 한국

 
 
지난 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프랑스 출신 유학생 이곤(왼쪽에서 첫 번째) 등 외국인 청년들이 바둑을 두고 있다. 한국에 머무는 외국인 유학생과 관광객들이 자체적으로 결성한 ‘서울 CES 고 클럽’ 회원들이다. 이들처럼 바둑에 관심이 큰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바둑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장경식 기자

 

 

“라이프 앤드 데스(Life and Death).”

 

지난 9일 오후 찾은 서울 종로의 한 카페. 히잡을 두른 말레이시아 여성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삶과 죽음’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심각한 일이 벌어졌나 싶었는데, 그는 가로세로 9줄짜리 미니 바둑판에 바둑돌을 놓고 ‘사활(死活)’ 퀴즈를 풀고 있었다. 바둑 용어인 ‘사활’을 곧이곧대로 영어로 바꾼 말이었다.

 

그 옆에선 프랑스 출신 유학생 이곤(28)이 갓 대국을 끝내고 환하게 웃었다. “상대 진영의 귀를 헤집고 들어가 두 집을 만들어 살았어요. 다시 생각해도 짜릿하네요.” 8년 전 우연히 바둑을 접했다는 그는 “돌을 번갈아 둬 집을 더 크게 만들면 된다는 단순한 규칙 속에서 무궁무진한 전략을 펼칠 수 있는 게 바둑의 매력”이라고 했다.

 

매주 일요일에 만난다는 ‘서울 CES 고 클럽’ 정기 모임. 이날도 프랑스, 러시아, 말레이시아 등 다양한 국적의 20~30대 10여 명이 짝을 이뤄 바둑을 두고 있었다. 클럽의 주축 회원은 서울로 유학을 온 외국인들인데 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한 청년들도 적지 않다. 일요일 모임에 보통 10명 정도가 참석하는데, 자체 대회를 열거나 야외 소풍 같은 행사에는 30명 정도로 인원이 늘어난다고 했다.

 

클럽은 2023년 프랑스에서 온 샤를(38)이 처음 만든 동호회가 확장해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어릴 적 종이에다 바둑판을 그려서 검은 돌, 흰 돌을 놓는 것으로 바둑을 접했다는 샤를은 “정해진 방식으로만 말을 움직이는 체스와 달리 바둑은 이러한 제약이 없어, 생각하는 즐거움이 훨씬 더 크다”고 말했다.

 

샤를이 처음부터 바둑 클럽을 만들려 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동네 기원을 찾아가 봤지만, 남자 어르신 중심이라 교류에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온라인 대국은 고수에게 깊이 있게 배우거나, 친밀한 네트워크를 쌓기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자체적으로 바둑 클럽을 만든 게 지금은 한국에서 바둑을 배우고 즐기려는 외국인들의 사랑방으로 커진 것이다. 클럽 활동이 소문이 나면서 한국기원에서 바둑판과 바둑돌을 지원받기도 했다.

 

서구권에서는 바둑을 ‘고(Go)’라고 부른다. 일본어로 바둑(碁)을 가리키는 ‘고’를 영어로 옮긴 것이다. 10년 전 이세돌과 맞붙은 바둑 AI(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의 이름도 여기서 딴 것이다. 이날 카페에 모인 클럽 회원들은 단수(單手)를 ‘아타리(atari)’, 선수(先手)는 ‘센테(sente)’라고 일본식으로 불렀다. 하지만 ‘날 일(日) 자’ 행마는 체스의 기사(knight) 움직임에 빗대어 ‘나이트 무브(move)’라고 했다.

 

바둑 클럽 회원 100여 명이 모인 단체 대화방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모임 공지는 ‘밋업’ 등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이뤄지고, 신입들도 주로 SNS를 통해 유입된다고 한다. 국적 불문, 성별 불문, 연령 불문, 실력 불문이다. 러시아 출신 아르템(32)은 BTS 팬인 아내를 따라 한국에 관광을 왔다가 이날 바둑 클럽을 방문했다. 그는 “바둑을 둘 줄 몰랐을 때는 바둑판으로 공예 작품을 만들곤 했다”며 “실제로 바둑을 둬보니 골치가 아플 때도 있지만 대국에서 이겼을 때 즐거움도 크다”고 했다.

 

자기 나라에서 수담(手談)을 나눌 친구를 찾기 어려웠던 클럽 회원들은 “전 세계 어디서도 한국만큼 쉽게 바둑을 둘 수 있는 곳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에선 다이소 같은 소매점이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단돈 몇천 원이면 바둑판·바둑알 세트를 살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기원에 가거나 온라인에서 바둑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 바둑 선생님이 클럽 활동에 참가하기도 한다.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으로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오치민(39)씨는 “유럽에서 바둑에 관심 있는 이들이 바둑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가장 먼저 꼽는 선택지가 한국”이라고 했다. 바둑이 중국에서 시작되고, 일본에서 기틀을 마련했다면, 글로벌화는 한국이 중심지가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