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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 얘기 같지 않은 '아프간 망국 백서'

해암도 2026. 2. 13. 10:33

탈레반 재장악한 아프간

마지막 미국 보고서 보니
분열과 부패로 자멸했다
지금 우리는 괜찮은가?

 
 

유엔 193 회원국 중 알파벳 순서로 첫 번째인 아프가니스탄은 ‘유령 정부’ 상태다. 2021년 8월 15일 이슬람 무장 단체 탈레반에 기존 정부는 축출됐다. 그런데도 옛 국기와 함께 회원국으로 등재돼 있다. 폭정을 일삼는 탈레반 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의지다. 그렇다고 망한 나라가 살아날 리는 없다. 최근 해산한 미국 정부 기관 아프가니스탄재건특별감사관실(SIGAR)의 마지막 보고서는 그래서 눈길을 끈다.

지난해 7월 발간된 아프가니스탄재건특별감사관실 분기 보고서 표지. 탈레반 치하에서 다시 부르카를 쓴 여성들의 뒷모습을 담았다. /SIGAR

 

 

SIGAR는 미국이 2001년 ‘테러와의 전쟁’으로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고 친미 아프간 정부를 세운 뒤 재건 사업을 위해 설립돼 분기마다 보고서를 발간해 왔다. 그러나 재건은 실패했고, 최근 나온 137쪽짜리 최종 보고서는 ‘아프간 망국 백서’가 됐다. 재건에 참여한 군·정부 인사, 아프간 전 관료 등의 인터뷰를 곁들여 미국이 세운 정부가 왜 무너졌는지 신랄하게 분석했다.

 

보고서는 미국에 협력한 아프간 고위 인사 상당수가 탈레반 못지않은 악당임을 보여준다. 정적을 탈레반이라 모함해 미군 병력으로 소탕한 칸다하르 주지사 굴 아가 셰르자이, 미군 위세를 업고 살인과 고문을 일삼은 경찰 간부 압둘 라지크 등이 그들이다. 2010년 카불은행이 군·경 봉급에 쓸 미국 지원금을 대통령·부통령 가족이 저지른 사기 대출 피해를 메우는 데 쓴 사건은 수많은 부패 사례 중 하나다.

 

미국의 과오도 지적됐다. 성인 남성들이 소년들을 성 노리개로 삼는 오랜 악습이 성행했지만 미군은 현지 세력과의 관계를 고려해 묵인했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는 구상은 2019년 대통령 선거 같은 썩은 권력 다툼에 악용됐다. 비방전과 부정 의혹으로 선거 뒤 다섯 달 만에 아슈라프 가니의 승리가 선언되자 경쟁 상대 압둘라 압둘라가 불복해 둘이 동시에 취임식을 여는 등 후폭풍이 이어졌다.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 국무장관은 “가니가 다른 후보보다 뇌물을 더 많이 먹인 게 진실”이라고 했다. 다섯 달 뒤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 입성할 때 대통령 가니는 헬기로 탈출했다.

아프가니스탄재건특별감사관실이 해산 직전 펴낸 최종보고서. 아프가니스탄 친서방정부의 붕괴 과정을 분석했다. /SIGAR
 

재건 사업이 20년째이던 그해에도 국민의 3분의 1인 1220만명은 굶주리고 있었다. 부정·부패·빈곤으로 무너지는 나라를 집어삼키려 탈레반이 무섭게 진격해 왔지만, 미국 지도자의 인식은 현실과 괴리돼 있었다. 카불 함락 한 달 전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 30만 병력이 7만5000 탈레반에 맞서고 있다”고 낙관했고, 함락 엿새 전 존 커비 국방부 언론보좌관은 “아프간군엔 탈레반에 없는 이점이 있다”고 했다.

 

나라를 잃고 미국에서 우버 기사가 된 칼리드 파옌다 전 아프간 재무장관은 “우린 30만 병력을 가진 적이 없다. 기껏 4만~5만”이라고 털어놨다. 미국이 쏟아부은 141억달러(약 20조6636억원)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보고서의 결론은 이랬다. “아프간에 민주주의와 안정 어느 것도 가져오지 못했고, 야망과 현실 사이 간극은 거대했다.”

 

이 비극을 보며 70여 년 전 한국을 떠올려본다. 전쟁 직후 상황은 아프간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킨 이승만, 미국 원조로 경제의 초석을 다진 박정희 같은 지도자의 혜안, 오일쇼크나 IMF 환란 등 위기 때마다 뭉친 국민 결기가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미국의 전후 재건 참여국 중 가장 빛나는 성공 사례다.

 

그러나 이젠 뿌듯함보다 불안함이 앞선다. 안보 불안, 경제 위기, 정치 분열과 부패, 사회 시스템 고장 등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린다. 한미 관계는 ‘철통 동맹’이라는 말조차 무색할 만큼 삐걱대고 있다. 냉정하게 자문해야 할 때다. 우리는 괜찮은가? 혹시 아프간의 길로 퇴행하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