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인간에게만 없는 유전체 1만개… 인간을 특별하게 만든 비밀이었다

해암도 2023. 5. 9. 08:50

[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전 세계 과학자 150여 명 모여 8년간 포유류 240종 DNA 분석
원숭이는 있고 인간은 없는 뉴런 성장 억제 게놈, 뇌 발달에 차이
인간에게 누락된 유전체 발견… ‘더하기 아닌 빼기’가 비밀의 열쇠

 

1796년 영국 리치필드의 의사 이래즈머스 다윈이 의학 서적을 썼다. 책에는 ‘동물’과 ‘준거법’이라는 고대 그리스어를 조합한 ‘주노미아(Zoonomia)’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제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법칙’이었다.

 

사람의 감각, 수면, 질병 분류 같은 의학 지식이 망라된 이 책이 유명해진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주장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구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인류 역사가 시작되기 수백만 년 전의 긴 시간 동안, 모든 동물이 살아있는 한 유기체에서 발생했다”는 구절이다. 그의 손자 찰스 다윈은 의대를 중퇴하고 비글호에 올라 전 세계를 여행한 뒤 1859년 ‘종(種)의 기원’을 발표했다. 오늘날 ‘진화’라 부르는 자연법칙에 대한 할아버지의 생각이 옳았음을 손자가 밝혀냈다.

 

2015년 스웨덴 웁살라대 커스틴 린드블라드-토 교수가 “인간이 다른 동물과 어떻게 다른지 밝혀보자”고 전 세계 과학계에 제안했다. ‘주노미아 프로젝트’로 명명한 계획 아래 MIT-하버드 브로드연구소, 예일대, 샌디에이고 동물원 등 50기관 150여 연구자가 모였다. 생명의 근원을 향한 이래즈머스 다윈의 꿈이 219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북극 빙원에서 야영하면서 유니콘 같은 뿔을 가진 일각고래의 유전자(DNA)를 채취했다. 동남아 동굴에서 박쥐를 잡았고, 도미니카 동물원에서 독을 가진 솔레노돈의 피를 뽑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알래스카 썰매개였던 ‘발토’의 DNA는 클리블랜드 박물관에 전시된 발토 박제에서 추출했다.

/일러스트=이철원
 

몸무게 2g에 불과한 뒤영벌박쥐부터 100t이 넘는 북태평양 참고래에 이르기까지 포유류 240종의 DNA를 해독하고 비교하는 지난한 연구가 이어졌다. 240종은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 전체의 4%에 불과하지만, 종의 상위 분류 체계 ‘과(科)’로는 전체의 80%를 포함한다. 지구상 포유류 대부분의 대략적 DNA를 비교했다는 뜻이다. 주노미아 과학자들은 지난달 27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8년 여정을 담은 논문 11편을 발표했다. 진화의 증거와 생명의 신비로 가득 찬 논문들이다. ‘기념비적 보물 지도’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분석 결과 인간을 비롯한 포유류 대부분에서 똑같은 게놈(유전체)이 4552개 발견됐다. 건강한 동물로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배아 발달과 연관이 있는 부분이다. 뛰어난 동물의 재능을 만든 가속 진화 DNA들도 규명됐다. 낮은 체온으로 동면하는 살찐꼬리난쟁이 여우원숭이와 큰쥐귀박쥐에게서 발견된 온도 저항 DNA는 노화를 막는 역할도 했다. 냄새를 가장 잘 맡는 동물은 설치류 아구티였다. 반면 고래는 지상 동물보다 현저히 적은 후각 수용체 DNA를 갖고 있었는데, 물속에서 후각을 버리는 대신 다른 소통 방식을 찾아 진화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특별한 것은 다른 동물에게 없는 게놈이 진화 과정에서 생겼기 때문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 대부분의 포유류에 공통적으로 있는 게놈 1만개가 인간에게 누락돼 있다는 것이 발견됐다. 연구팀은 이를 “isn’t라는 말에서 n’t가 삭제되면 is라는 새 단어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했다. 실제로 인간과 같은 영장류인 원숭이와 보노보에게 있는 특정 게놈은 어린 시절 뉴런(신경 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데 인간은 없었다. 인간의 뇌가 유인원보다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다. 더하기 아닌 빼기가 만물의 영장을 만들었다.

 

주노미아는 시작이다. 포유류뿐 아니라 파충류·어류·조류·양서류 7만1000종의 DNA를 분석하는 척추동물 게놈 프로젝트(VGP)도 진행되고 있다. 언젠가 무척추동물과 식물까지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DNA 지도가 그려지면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답하게 될 것이다. 생명체를 마음대로 조작하거나 사라지게 하는 것도 가능해질 수 있다. 이래즈머스 다윈의 주장을 계승한 손자가 하나 더 있다.

 

그의 외손자이자 찰스 다윈의 사촌 프랜시스 골턴은 진화에 근거해 인간을 개량할 수 있다는 ‘우생학(優生學)’의 창시자였다. 히틀러의 대량 학살과 일본 제국주의 생체 실험의 근거가 된 학문이다. 같은 연구도 누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만들어진다. 신의 섭리로 여기던 생명의 진실을 좇는 과학자들의 여정 끝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질병 정복과 멸종 위기 극복 같은 선(善)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