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일 만에 버터 맥주 100만캔 판 가수 박용인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된 인천 동구 만석동. 그곳에 하고 싶은 것 많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던 한 소년이 살았다. 젓갈 장사 하던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감칠맛에 중독됐고, 서예 하는 어머니 미감을 물려받아 사진을 전공했다. 자수성가로 일어선 아버지를 보며 사업가의 꿈도 꿨다. 가장 좋아하고 위안을 받은 건 음악. 그룹 ‘어반자카파’의 멤버이자, 10년간 6개의 식당을 운영한 요식업자이며, ‘블랑제리뵈르’라는 브랜드로 출시 43일 만에 맥주 100만 캔을 판 사업가 박용인(35) 이야기다.
일명 버터 맥주로 알려진 ‘뵈르 맥주’는 1캔에 6500원이라는 고가에도 GS25에서 ‘테라’를 이기고 ‘카스’에 이어 판매량 2위를 차지했다. 이 기세를 모아 소주·막걸리·커피·콜라·소시지·롤케이크·아이스크림·캐러멜 등도 출시했다. 지난 1일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에 정식 매장을 열었고, 조만간 일본으로도 진출한다. 그야말로 ‘버터 전성시대’를 연 이 남자를 서울 성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버터 전성시대를 만든 남자
-어떻게 ‘블랑제리뵈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나.
“시작은 2019년 출시한 의류 브랜드 ‘마니에’였다. 프렌치 감성을 좋아하다 보니, 모자·티셔츠 같은 아이템에 버터·밀푀유 같은 프랑스어 문구와 그림을 그려 팔았다. 꽤 인기가 있었는데, 이듬해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힘들어졌다. 당시 패션 브랜드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카페 등 F&B(음식·주류) 사업을 하는 게 트렌드였다. 나도 처음엔 ‘카페나 할까’ 하다가 조금 독특한 걸 하고 싶어서 포털에 ‘마니에’를 검색해 봤다. 그랬더니 가장 많은 연관 검색어가 ‘뵈르(Beurre·버터)’더라. 그래서 ‘버터를 만들어 보자’ 생각했다.”
-생버터를 만들었다는 건가?
“처음엔 그랬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갓 짜낸 국산 들기름과 통들깨를 넣은 버터. 서울시스터즈와 협업해 김치버터도 구상했다. 전용 작업장에서 9개월 동안 버터 기계만 10번을 바꿔가며 개발했고,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왔다. 지난해 3월 한남동에서 열린 첫 팝업스토어에서 이틀 동안 모두 매진됐다.”
-그런데 왜 지금은 판매하지 않나.
“현실적인 벽이 너무 컸다. 구매 문의는 많아지는데 수제이다 보니 물량 맞추기가 어려웠다. 공장 생산으로 바꾸자니 해썹(HACCP) 인증을 받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현실적인 부분들을 맞추다 보면, 기존 버터들과의 경쟁력도 약해지겠더라. 그래서 과감히 접고, 버터를 활용한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자고 결심했다.”
-버터 맥주는 ‘해리포터’ 책에서나 봤지, 낯선 개념이다.
“내가 술을 진짜 좋아한다. 그런데 갑자기 버터 맥주를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아 부루구루 맥주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무슨 소리야? 기름(버터)이랑 술이랑 어떻게 섞이냐?’고 하더라. 전화기를 붙잡고 ‘재미있지 않으냐’며 30분 동안 설득했다. 결국 그 친구가 양조장 수석 연구원들과 머리를 싸매고 첫 샘플을 만들었다. 딱 마셔보자마자 ‘이거 무조건 출시해야겠다’ 싶었다.”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나.
“난 이왕이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 종류인 ‘라거’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라거는 청량함이 특징이라, 다른 향들과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맥주는 라거가 버터·헤이즐넛·바닐라 등의 향과 잘 어울리더라. 내가 원하던 맥주였다.”
-출시 후 반응이 놀라웠다.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팝업스토어에서는 사람들이 오픈 전부터 줄을 서서 사가는 바람에 하루 만에 품절이 됐다. 한 달에 20만캔, 43일 만에 100만캔 판매는 수제 맥주 시장에서 나올 수 없는 수치였다.”
-비싼데 많이 팔린 것이 의외였다.
“제조사와 캔 디자인과 브랜드 폰트까지 직접 다 개발했다. 버터 맥주라는 것은 해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버터 맥주라는 개념이 나오다 보니 테마파크에서 팔긴 하지만, 그건 술이 아닌 음료수다. 우린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 독특함이 브랜드 이미지를 정착시켰다고 생각한다. 인스타그램에서 다 마신 맥주캔이나 소주병을 꽃병 등으로 활용하는 것도 우리 디자인, 브랜드 철학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섯 번의 성공과 실패
“베이비 베이비 그대는/ 카페라테 향보다/ 포근했던 그 느낌/ 기억하고 있나요.”
2009년 발표된 어반자카파의 데뷔곡 ‘커피를 마시고’다. 이별 후의 슬픔을 포근한 커피 향에 빗대어 표현한 곡. 서울 가로수길에 카페거리가 생기고, 싸이월드가 전성기를 누리며 배경음악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가수라는 든든한 배경으로 승승장구한 외식 사업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지난 10년간 성공과 실패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요식업의 쓴맛 단맛을 다 본 맷집 강한 사업가라고 말한다. 그 시작은 2014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문을 연 이탈리안 레스토랑 ‘1988일미오삐아또’였다.
-왜 식당을 열었나.
“원래 음식에 관심이 많았다. 할머니가 젓갈 장사를 해 냉장고에는 늘 창란젓, 명란젓이 가득했다. 지금 와이프인 당시 여자 친구가 유럽 유학 중이라 왔다 갔다 하며 이탈리아 요리에 푹 빠졌다. 젓갈의 짠맛이 비슷하다고도 느꼈다. 그런데 당시 국내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생크림으로 만든 소스가 흥건한 파스타가 주류였다. 정통 방식으로 만들면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만든 생면에, 계란과 후추만으로 맛을 낸 까르보나라, 셀러리를 가득 넣어 푹 끓인 볼로네제 등 내가 좋아하는 메뉴들로 구성했다.”
-성공했나?
“2년 만에 쫄딱 망했다. 5년 동안 가수해서 번 돈을 다 날렸다. 시장 조사와 사업 운영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낯설어하는데, 인건비는 너무 높았다. 손님이 와도, 안 와도, 수익이 남지 않는 구조였다.”
-그 후 일본 음식점 ‘달아래’를 열었다.
“단골손님이 옆 건물 주인이었다. 내게 옥상에 남는 공간이 있는데 장사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월세도 100만원 깎아주며 ‘너를 믿는다’고 했다. 그래서 인테리어부터 주방까지 직접 공사해 비용을 줄여가며 두 번째 식당 ‘달아래’를 열었다. 옥상의 절반을 잔디밭으로 꾸민 가게에서 내가 이탈리아 요리만큼 좋아하는 일본 요리를 팔았다. 일본 오사카만 1년에 10번 이상 왔다갔다하며 소소한 메뉴를 개발했다. 단골도 많이 생기고, 15평짜리 가게에서 한 달 매출만 9000만원을 찍을 때도 있었다. 그 기세를 이어 서울 성수동에 ‘달아래 면’이라는 탄탄면 전문점도 열었다.”
-그런데 왜 문을 닫았나.
“잘되다 보니 조금 더 멋진 걸 하고 싶더라. 제대로 된 가이세키(일본 연회용 요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잘하는 셰프도 모셔오고, 어울리는 그릇만 3000만원어치 샀다. 그렇게 1인당 12만5000원짜리 코스를 판매하는 식당으로 재오픈을 했는데, 매출은 3분의 1로 떨어졌다.”
-이유가 뭘까.
“고객들이 가이세키 요리를 낯설어하기도 했고, 장소는 그대로인데 음식 가격만 높아진 것도 문제였다. 이번에도 수익 구조가 맞지 않았던 거다. 결국 성수동 ‘달아래면’만 남기고 식당을 접었다.”
-이후 성수동에서 ‘안주밥집’ ‘넛츠버거’ ‘쏘심플’ 등 공격적으로 식당을 열었다가 접었다.
“당시만 해도 성수동은 안정된 상권이 아니었다. 과거 실패를 경험 삼아 ‘안주 밥집’은 철저하게 고객의 니즈(요구)를 맞추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닌 ,잘 팔릴 것 같은 음식을 파니 재미가 없었다. ‘결국 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블랑제리뵈르’에 집중하기 위해 요식업은 접었다.”
◇아버지처럼, 쓰러져도 다시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게 만들어주는 힘은 뭘까.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력으로 조그만 공장을 운영하셨는데, 뭔가 일이 풀리려고 할 때 IMF가 터지면서 공장이 망했다. 아버지와 몇 년을 생이별하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공장을 일으켜 세우시더라. 그런 아버지를 보며 실패라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실패하면 다시 털고 일어나면 되니까.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게 많기도 했다. 5분을 가만히 못 있어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판정도 받았다. 그렇게 끊임없이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게 내게는 헝그리 정신이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어반자카파가 곡 ‘널 사랑하지 않아’로 골든디스크 본상을 받았을 때.”
-아들이 태어났을 때라고 답할 줄 알았는데.
“아차! 지금이라도 답변 바꿔도 되나? 하하!”
-어떻게 가수로 데뷔하게 됐나.
“중학교 때부터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가수 데뷔는 쉽지 않더라. 기획사 아이돌 연습생으로도 있었지만, 데뷔가 미뤄지기만 했다. 그때 ‘난 유명인이 아니라 가수가 목표인데, 그냥 데뷔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인 권순일, 음악학원 친구인 조현아와 함께 ‘어반자카파’를 결성하고, 각자 써둔 곡으로 돈을 모아 음반을 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나.
“내가 하고 싶은 거, 재미있는 거, 다 해보고 죽는 것이 목표다. 그러기 위해 내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잘 조율하려고도 노력한다. 그룹 활동과 개인 사업, 가족과 일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목표다. 그러다 보니 해야 할 일도 많고, 힘든 순간도 많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있기에 아직은 재미있다.”
이혜운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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