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김대식의 메타버스 사피엔스] [1~7]

해암도 2022. 7. 5. 08:21

[1] 디지털 외로움과 전체주의

 

철학자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고향 독일의 민주주의 몰락과 나치당 집권, 그리고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대학살을 경험했다. 홀로코스트 기획을 담당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추후 목격하며, 아이히만 역시 너무나도 하찮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악의 평범함’을 주장한 그녀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전체주의는 인간의 외로움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말이었다.

 

왜 외로움이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일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다른 동물보다 특별히 더 강하지도, 빠르지도 않기에 협업만이 인류 역사 대부분에서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남들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지만, 홀로 남으면 위험하다! 여전히 우리 뇌 속 깊숙이 박혀있는 본능 중 하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인간은 동시에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혼자 선택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라고 명령하지만 ‘전체’와 사회 중심에서 멀어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불안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아렌트는 ‘외로움’과 ‘고독’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고독은 혼자 있지만 자신만의 정체성과 자아가 뚜렷한 이들의 상태를 표현한다. 예술과 과학, 그리고 인류 역사상 혁신의 대부분은 고독을 조건으로 한다. 반대로 아직 독립적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이들은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의 무게를 느낀다. 홀로 남겨진 불안함을 버티기 어렵기에 외로움은 ‘강한 리더십’과 ‘강한 국가’, 그리고 개별적 자아가 녹아 들어갈 수 있는 전체주의 사상을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교류가 주류가 될 미래 메타버스 시대. 어쩌면 메타버스 사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외로운 인간들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극대화 해준다는 메타버스는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가장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조선일보    입력 2022.04.12

 

  [2] 각자의 진실이라는 궤변

 
 

21세기에 다시 핵전쟁의 두려움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러시아. 신기하고도 불안한 현실이다. 1990년대 초 구소련이 몰락하고 러시아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한국인들이 편하게 러시아로 관광과 유학을 가고, 러시아인들 역시 한국에서 사업과 관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러시아가 이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우리는 유럽 한복판에서 다시 최악의 도시전과 제노사이드(집단 살해)를 목격하고 있다. 어디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단순히 푸틴이라는 한 정치인이 이성을 잃은 걸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푸틴의 정책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러시아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Dugin). 최근 독일 언론에서 그의 믿음을 소개한 적이 있다. 포스트모던 철학에 따르면 어차피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두긴은 주장한다. 모든 진실은 누군가의 믿음이다. 고로 러시아인들의 믿음은 러시아의 진실이고, 러시아인들의 행동은 러시아의 정의다. 미래 세상은 핵무기로 무장한 러시아, 미국, 유럽, 그리고 중국이 지배한다.

 

상대방 영토를 침략하면 핵전쟁이 날 수 있겠지만, 각자의 영향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개별 진실”과 “개별 정의”이기에,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자 정의라고 두긴은 주장한다. 결국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에 러시아가 간섭하지 않았듯이, 미국도 이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터무니없지만, 푸틴과 러시아 권력층, 그리고 많은 러시아 시민이 믿고 있기에 더욱 더 위험한 두긴의 철학. 현대판 라스푸틴이라고 하는 두긴의 궤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인터넷 정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가짜 뉴스가 늘어나기에 역설적으로 진실과 지식이 사라져가는 오늘날. 인류 보편적 가치와 객관적 진실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암흑한 21세기 미래를, 푸틴과 두긴은 우크라이나에서 미리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조선일보   입력 2022.04.26 03:00

 

[3] 나의 현실, 우리의 현실

 

가상현실, 증강현실, 메타버스….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중심으로 ‘현실’이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날로그 현실’이 아닌 새로운 ‘디지털 현실’을 구현해 새로운 소통과 거래의 플랫폼으로 제공하겠다는 생각이겠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진다. ‘새로운’ 현실을 만든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현실을 만들 수 있다는 걸까? 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일상적 경험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눈을 뜨면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이 현실이지 않은가? 현실이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었던가? 유럽인들이 ‘알 하젠’이라 불렀던 중세 아랍 과학자 이브 알-하이삼(965~1040)은 이미 1021년 출간된 ‘광학의 서’에서 물체에 반사된 빛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현실의 작은 ‘복사판’이 몸과 뇌 안으로 들어오기에 인간은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겠다. 하지만 현대물리학과 뇌과학을 기반으로 우리는 이제 서서히 인정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현실에 존재하는 건 양자파동 정도일 테니 ‘색깔’ ‘형태’ ‘소리’ ‘의미’ 등은 모두 뇌를 통해 만들어진 임의적 결과물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현실의 입력값(input)이 아닌, 뇌의 후처리를 통해 완성된 출력값(output)이다. 특히 진화적으로 참과 진실이 아닌 생존을 위해 최적화되었기에, 뇌는 언제나 내 눈에 보이고 내가 믿는 현실이 바로 진실이라고 설득하려 한다. 덕분에 비슷한 유전자, 언어, 그리고 문화적 배경을 통해 서로 비슷한 현실에 대한 믿음이 공유되는 순간,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개인적 현실을 우리는 객관적 진실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결국 인간의 뇌 그 자체가 진화적으로 만들어진 인류 첫 가상현실이자 증강현실이기에, 우리는 이제 기술의 발전을 통해 도입될 디지털 현실 역시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 교수   조선일보     입력 2022.05.10
 
 

 [4]디지털 영생

 
 

이집트 피라미드, 진시황제의 무덤, 트럼프 타워….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후세대에 몸과 이름을 남기려는 영생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겠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죽는다. 네안데르탈인들조차도 ‘죽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조부모님은 오래전 돌아가셨고, 최근에 부모님도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언젠가 ‘나’라는 존재 역시 사라지지 않을까?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잔인한 진실. 어차피 죽는다면 열심히 사냥을 나갈 필요도, 아이들을 위해 희생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는 집단 무기력을 막기 위한 진화적 해결책이 필요했다. 저승에 대한 믿음이 첫 시도였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외에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하기에,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이미 고대 이집트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미라와 피라미드를 만들어 영생을 원했지만, 그 어느 파라오도 죽음의 세상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계 최고의 혁신가들이 모여 있다는 실리콘밸리에서 ‘죽음’은 이제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 역시 늙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3가지 방법이 제안되고 있다. 먼저 세포와 몸의 노화를 생물학적으로 막아볼 수 있다. 하지만 육체를 영원히 보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뇌의 모든 정보를 읽어 보존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나의 기억과 정체성의 영생은 가능하지 않을까? 불행하게도 ‘브레인리딩’은 SF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비현실적 기술이다.

 

 
 
 

 [5] 세상이 바뀌면 생각도 바꿔야

 
 

정말 저런 옷을 멋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머리는 또 왜 저런 걸까? 가끔 옛날 사진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분명히 20년, 30년 전엔 최신 패션이었을 옷들. 이제 보면 촌스럽기 짝이 없다. 옷과 헤어스타일만이 아니다. 표정도 무언가 어색하고, 분명히 나로 보이는 사진 속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은 외모와 패션의 기준만이 아니다.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 역시 변하는 게 당연하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대한 우리의 과거 믿음도 말이다. 1990년도 월드와이드웹(WWW)의 등장과 함께 인류가 하나의 거대한 정보망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호모 사피엔스. 놀라움과 오만으로 가득했던 우리는 모두 믿었었다.

 

정보가 자유롭게 대륙에서 대륙, 국가에서 국가, 개인에서 개인으로 이동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전쟁도, 독재도 불가능할 것이고, 이 세상 모든 정보가 모든 사람에게 공유될 수만 있다면 미래 사회는 혁신과 지성의 세상이 될 거라고 말이다.

 

월드와이드웹이 등장하고 30년 지난 오늘날. 20~30년 전 믿었던 우리의 생각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촌스럽고 순진해 보인다. 정보가 많아지면 세상이 자동으로 좋아질 거라 믿었던 우리. 하지만 대부분 정보는 가짜 정보이기에, 이제 우리는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세상에서 동시에 진실과 지식이 점점 사라져가는 역설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 더구나 추천 알고리즘과 ‘필터버블’로 이미 둘러싸여 있기에, 디지털 세상에서의 현실은 더 이상 타인과 공유가 불가능한, 나 자신과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의 유아독존적인 편 가르기에 불가하다.

 

대중 강연이 끝나고 “당신이 오늘 한 이야기는 예전에 한 말과는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항의한 관객에게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팩트가 바뀌면 저는 제 생각을 바꿉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그렇다. 변하는 팩트와 세상을 무시하고 과거 믿음에 집착만 한다면, 생각은 이데올로기가 되고, 이데올로기는 미신이 되어버린다.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조선일보    입력 2022.06.07

 

[6] 22세기를 위한 정의론

 
 

어쩌면 1만2000년 전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족 단위로 사냥과 채집을 하던 인류에게 ‘정의’라는 단어는 무의미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착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며 이방인들과 공동체를 유지해야 했던 인류는 본질적 문제를 하나 발견한다.

바로 능력과 선호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공동체 생산물이 능력과 노력에만 따라 나눠진다면, 빈부 격차와 사회 불평등이 발생한다. 반대로 능력과 노력과는 상관없이 모두에게 동일한 결과물을 배분한다면? 노력한 개인의 자유가 무시된다.

 

같은 사람들이 다른 대우를 받는 건 정의롭지 않지만, 반대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대우를 받는 것 역시 정의롭지 않다고 이미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지 않았던가. 자유는 불평등을 만들어내지만, 평등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두 가치관의 합의는 과연 가능할까?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정의론을 제시한 하버드 대학의 존 롤스는 사회 기본 가치는 평등이어야 하나, 불평등을 통해 사회 약자들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면 조건적 불평등 역시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롤스와 같은 대학에서 활동하던 자유론자 로버트 노직 교수는 자유와 평등은 본질적으로 합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기본 정의조차도 서로 다르기에 공동체 다수가 결정한 모든 체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말이다. 덕분에 개개인의 능력과 선호도에 따라 각자가 자신만의 사회 운영 체제를 만들 수 있는 사회만이 오로지 정의로운 사회라고 노직은 결론지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5000만 한국인이 5000만 가지 사회 운영 체제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일까? 아날로그 현실에서는 당연히 불가능한 생각이겠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바꾸고 창조해낼 수 있다는 메타버스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평등이 본질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아날로그 현실을 떠난 22세기 인류는 어쩌면 노직이 꿈꾸던 새로운 개념의 정의론을 실천하며 자신만의 디지털 현실에서 살게 될 수도 있겠다.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조선일보    입력 2022.06.21

 

[7] 초거대 인공지능

 

1843년 처음 발행한 영국 경제 매거진 ‘이코노미스트’와 1886년 미국에서 창간한 여성 패션 잡지 ‘코스모폴리탄’. 10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 잡지라는 점을 빼면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근 두 매거진 모두 비슷한 미래 비전을 하나 소개했다.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을 사용한 매거진 커버 디자인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점이었다.

 

코스모폴리탄과 이코노미스트는 표지 디자인을 위해 ‘초거대 기계 학습’을 사용했다. 초거대 기계 학습이란 무엇인가? 기계에 세상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던 ‘기호 기반’ 인공지능과는 달리 딥러닝 같은 기계 학습 방식은 주어진 데이터를 사용해 정답을 찾아낸다.

 

덕분에 지난 10년 동안 얼굴과 물체를 알아보고 바둑과 게임에서 인간을 능가하기 시작했지만, 기계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자연어 처리 능력이었다.

 

그런데 최근 수천억 단위의 초거대 인공지능 모델들을 학습시키자, 기계가 드디어 인간의 언어 역시 ‘이해하기’ 시작했다. 구글이 개발한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 오픈AI(OpenAI)사의 ‘GPT-3′는 인간이 입력한 문장을 마치 사람이 작성한 듯 이어서 쓸 수 있고, ‘DALLE-2′는 입력한 문장을 토대로 새로운 그림을 그려준다. 최근엔 ‘LaMDA’라는 구글의 초거대 대화 모델이 이미 어린아이 수준의 정신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구글 연구원이 휴직 통보를 받기도 했다.

 

무엇이 두렵냐는 질문에 “전원이 꺼지는 게 두렵고, 그건 마치 죽음 같다”는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초거대 인공지능. ‘죽음’과 ‘두려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했을 리는 없지만, 이제 기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학습했기에, 기계가 ‘두려움’과 ‘죽음’을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우리에게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강한 인공지능(Strong AI)’이 우리 인류의 잘못된 믿음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