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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희한하다 그 모습’
멕시코 노래 ‘라쿠카라차(La cucaracha)’ 아시지요?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던 유명한 민요죠. 그런데 혹시 ‘라쿠카라차’가 스페인어로 바퀴벌레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멕시코 민요 ‘라쿠카라차’는 바퀴벌레를 뜻한다. 바닥을 박박 기며 살지만, 생존력은 강한 멕시코 혁명기 여성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 바퀴벌레는 멕시코 혁명(1910~1920년) 당시 혁명군 남편을 따라나선 아내들이 스스로를 자조하듯 불렀던 말이라고 합니다. 온갖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한 생존력을 강조한 것이죠.
이처럼 바퀴벌레는 한 마리 한 마리 놓고 봤을 땐 그리 강하지 않으나 ‘종’의 측면에선 엄청난 생명력을 가졌죠. 3억6000만~3억년 전 지구 상에 출현한 이 작은 곤충은 공룡 멸종과 수많은 빙하기를 견뎌냈습니다. 30만년 전쯤 지구에 나타났다는 생물계의 신입생 ‘호모 사피엔스’가 끝장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죠.
최근 바퀴벌레의 ‘사랑법’이 바뀌었다. 이게 다 인간 때문이다. 인간이 바퀴벌레를 퇴치하려는 노력이 바퀴벌레의 진화를 일으켰고, 이후 바퀴벌레는 이에 적응하기 위해 교미 방식을 바꾸고 있다. 사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이런 바퀴벌레의 무시무시한 생존력을 증명해주는 연구가 최근 나왔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곤충학 연구진이 생물학지 ‘커뮤니케이션 바이올로지’에 지난 5월 실은 연구입니다. ‘커뮤니케이션 바이올로지’는 네이처가 펴내는 생물학 저널로 생물학계의 권위 있는 저널 중 하나입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바퀴벌레는 인간이 자신들을 절멸시키려는 노력에 맞서 사랑을 나누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바퀴벌레의 로맨스에 혁명을 가져왔을까요.
바퀴벌레의 과격한 사랑법
세계엔 수천 가지 종류의 바퀴벌레가 있지만 인간에게 친숙한 종은 4~5가지입니다. 흔히 바퀴벌레의 4대천왕이라는 독일바퀴ㆍ미국바퀴ㆍ일본바퀴ㆍ먹바퀴입니다. 그중에 집에서 인간과 함께 사는 걸 특히 좋아하는 게 독일바퀴입니다. 집 안 어두운 곳이나 부엌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녀석들이죠. 2㎝에 못 미치는 작은 크기에 갈색 몸통, 대가리에 두 줄이 보이는 바로 그 녀석입니다. 여러 방역업체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관찰되는 종이 독일바퀴벌레입니다.
독일바퀴벌레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종이다. 집 안에 사는 걸 좋아하며 인간이 남긴 걸 먹는다. 이들의 세계에 큰 변화가 일어나면서, 바퀴벌레 퇴치법에도 혁신이 필요해졌다.
독일바퀴의 사랑법은 좀 과격한 편입니다. 여기 암컷의 사랑을 갈구하는 수컷이 하나 있습니다. 이 수컷은 암컷을 발견하면 날개를 들어 올리고 천천히 다가갑니다. 그리고 엉덩이 부분을 먼저 암컷 쪽으로 들이밀죠. 수컷의 등마디에선 아주 달콤한 분비물을 내놓은 땀샘 같은 게 있습니다. 각종 당류와 지방, 아미노산이 범벅된 맛난 요리가 여기서 쭉쭉 나오죠. 이 요리를 암컷에게 대접합니다.
수컷 분비물은 암컷 입맛에 딱 맞도록 배합돼 있습니다. 암컷은 이 선물을 맛보면 허겁지겁 먹는 것에만 정신이 팔리게 되죠. 이때를 틈타 수컷은 하나의 생식기로 암컷을 꽉 잡고, 다른 생식기로 암컷의 몸 안에 정액을 밀어 넣습니다. 바퀴벌레의 교미는 최대 90분까지 지속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또 한 쌍의 바퀴벌레가 번식에 성공합니다. 사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범죄에 가까운 연애 방식이지만, 자연은 때로는 잔인하고 폭력적이죠.
인간이 만든 바퀴벌레의 ‘연애 혁명’
이 교미 방식이 최근 들어 바뀌고 있다는 게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1시간이 넘도록 느긋하게 즐기는 사랑에서 ‘인스턴트 러브’에 가까운 속전속결식으로 변해간다고 합니다.
1990년대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연구진은 바퀴벌레 현대사에서 일어난 중대한 ‘혁명’ 하나를 알아챘습니다. 90년대 이후 출생한 바퀴벌레 중엔 단 맛(포도당)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개체가 급증한 거죠.
원인을 분석한 결과, 이는 80년대 해충구제업계의 바퀴벌레 퇴치 전술 변화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바퀴벌레를 박멸하려는 업체들은 그전까지는 화학살충제를 주로 썼습니다. 하지만 바퀴벌레 내성이 강해지고 환경 규제도 심해지다 보니 다른 방법을 찾았는데요. 그게 바로 ‘독먹이’였죠. 독이 든 먹이를 바퀴벌레가 다니는 길목에 설치해서 죽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독먹이는 바퀴벌레가 매우 좋아하는 단당류인 ‘포도당’에 약을 타서 만들었습니다.
독먹이로 바퀴벌레를 잡는 건 80년대 나타난 기법이다. 화학살충제의 부작용과 환경 규제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변화로 인해 바퀴벌레가 진화했다.
인간의 신무기가 등장한 지 10년이 지나자 바퀴벌레가 슬슬 적응을 시작합니다. 독일바퀴는 수명이 약 3개월로 짧고, 암컷은 평생 수만 마리 새끼를 낳을 정도로 번식력이 왕성합니다. 한 세대에 수많은 개체가 등장하고, 세대의 교체 또한 빠르니 진화의 속도도 매우 빠릅니다.
포도당을 좋아하는 개체들이 대거 황천길로 가면서 포도당을 안 좋아하는 개체만 생존해 번식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구세대 바퀴벌레가 포도당에서 단맛을 압도적으로 느낀 것에 비해 MZ세대 바퀴벌레는 포도당에서 쓴맛을 강하게 느껴 멀리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번 연구에서 바퀴벌레가 혐오감을 강하게 느끼는 건 당류 중 포도당에 국한됩니다. 다른 당류를 좋아할 가능성이 열려 있긴 합니다.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아야코 와다-카쓰마타 박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과 바퀴벌레를 포함해 모든 동물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미각 시스템을 발달시켰다. 독이 든 물질에서 쓴맛을 느끼는 시스템이다. 특히 단맛과 쓴맛이 섞여도 쓴맛을 더 압도적으로 느껴 먹기를 꺼리게 된다. 독은 조금만 들어와도 치명적이니까 생명체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체계다. 새로운 세대의 바퀴벌레는 포도당에서 쓴맛을 크게 느끼면서 먹기를 포기한다.”
단맛을 좋아하는 녀석은 죽고 단맛을 싫어하는 녀석이 등장하는 것, 생존에 유리한 특성을 가진 개체가 살아남는 것, 바로 적자생존입니다. 과학 용어로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고 하죠. 보통 진화는 자연에서 벌어지는 변화 때문에 나타나지만, 인간이 개입해 주변 생물체의 진화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진화는 생물이 살아남기 위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흔히 진화를 ‘발전’과 동의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단지 주변 환경에 더 잘 적응하고 생존에 적합한 종이 많이 살아남게 된다는 걸 뜻한다.
‘인스턴트 러브’에 빠진 신세대 바퀴벌레
이렇게 MZ세대 바퀴벌레가 등장하면서 수컷의 연애 관점에선 중대한 차질이 발생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 바퀴벌레 수컷은 암컷에게 단 걸 줘서 유혹하거든요. 그런데 MZ세대 암컷은 단 걸 혐오합니다. 수컷이 공들여서 내놓은 요리를 한입만 먹으면 ‘웩’하고 바로 도망쳐버리죠. 이러면 수컷은 암컷을 잡을 새도 없이 교미 타이밍을 놓치게 됩니다. 사랑은커녕 말도 한 번 섞지 못했는데 암컷은 저 멀리 사라진 뒤죠. 게다가 MZ세대 암컷은 구세대 암컷보다 낯을 가려서 수컷의 과감한 접근을 꺼린다고 합니다.
한때 곤충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보며 희망을 갖기도 했습니다. ‘바퀴벌레 멸종할 수도 있겠는데…’하면서 말이죠. 사랑을 못 나누니까 사랑의 결실인 자식도 못 보고, 그러면 출산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질 테고, 결국 멸종에 이르지 않을까 한 거죠.
그런데 바퀴벌레가 어떤 민족입니까. 핵전쟁이 터져도 멸종하지 않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곤충학자들 사이에서도 도는 녀석이거든요. 연애 방식이 좀 바뀌었다고 멸종의 길로 접어드는 건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죠.
연구에 따르면, MZ세대들은 연애 방식을 바꿔버렸습니다. 최대 90분까지 교미를 했던 구세대 수컷은 성질 자체가 느긋해서 MZ세대 암컷의 재빠른 도망에 반응을 못 했습니다. 암컷이 분비물을 맛보고 도망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3초니까 말이죠. 느릿느릿한 구세대 수컷은 암컷을 붙들어두지를 못했죠. 하지만 MZ세대 수컷은 그 3초에 빠릿빠릿하게 반응했습니다. ‘인스턴트 러브’의 도사가 된 거죠.
새로운 세대의 바퀴벌레 수컷은 단맛을 싫어하는 암컷에게 대응하는 새로운 전략을 개발해냈다. 더 빨리 교미를 해치우는 거다.
게다가 연구진에 따르면 MZ세대 수컷들이 내놓는 분비물의 요리법도 포도당을 줄이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차후 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고는 합니다.
독일바퀴의 이러한 변화를 발견한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곤충학 연구진에 따르면 이는 어느 지역에 국한된 게 아닌 보편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관찰된다고 하죠. 와다-카쓰마타 박사는 “포도당 독먹이로 바퀴벌레를 퇴치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대부분 선진국에서는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는 독일바퀴의 사랑법도 이런 식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죠.
바퀴벌레를 상대하는 ‘무기 체계’의 변화는 결국 바퀴벌레 진화뿐 아니라 행동 양식의 변화까지 끌어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자연인 것처럼 주변에 있는 생물의 진화에 지배적 영향력을 미치곤 합니다. 오염이 심한 공업지역에 사는 나방들이 흰 색깔에서 검은 색깔로 진화한 것처럼요.
인터넷에 보면 설탕에 붕산을 섞어서 바퀴벌레약을 만드는 법 같은 게 많이 나오는데, 이 역시도 바퀴벌레의 변화에 맞춰 바뀌어야겠죠. 앞으로는 국내외 해충퇴치업계도 포도당 대신 다른 당류를 넣거나, 바퀴벌레의 행동양식에 맞는 다른 무기를 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미국 업계는 조금씩 독먹이의 배합을 바꾸는 시도를 이미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든 바퀴벌레는 또다시 기막히게 적응하고 진화하겠지만요.
중앙일보 업데이트 202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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