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예배당에 난 ‘오솔길’ 하나, 엄숙한 교회 풍경을 바꾸다

해암도 2022. 4. 24. 07:11

김병종·이이남 작품 설치
미술관이 된 ‘사랑의 교회’

봄이 되면 소나무는 공기주머니 달린 꽃가루를 대량으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 곤충을 이용한 꽃과 달리 소나무는 바람을 이용해 수분(受粉)하기 때문이다.

화가 김병종(69·가천대 석좌교수)은 “이렇게 작은 생명에도 놀라운 창조의 신비가 담겨 있어, 짝을 찾기 위해 최대한 멀리 날아가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김병종이 이 송홧가루를 보며 생명의 창조와 신비를 노래한 작품 ‘바람이 임의로 불매-송화 분분’이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 사랑의 교회(담임목사 오정현) 지하 4층에 걸렸다. 그림은 세로 90cm, 가로 5520cm의 대작. 가로 240cm의 화판 23개를 이어붙였다.

화가 김병종이 자신이 그린 ‘송화 분분’ 앞에 섰다. 그는 “그림이 발산하지 않고 잔잔하게 스며들기를, 그리하여 조용히 걷고 홀로 묵상하는 길이 되기를 가장 바랐다”고 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 개신교회 예배당에 성화가 아닌 일반 회화 작품이 걸린 것은 이례적이다. 그간 한국 교회 예배당에는 시각 예술이 극히 제한되고, 허용된다 해도 성화 계열의 그림만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김 교수는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 방스(Vence)에는 앙리 마티스의 예술혼이 집약된 로자리오 예배당이, 미국 휴스턴에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으로 이뤄진 로스코 예배당이 있어 종교가 없는 이들도 마음의 쉼을 얻고 간다. 서울 서초동 차가운 법조타운에 자리한 사랑의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랐다”고 했다.

 

◇예배당에 오솔길 하나

 

김병종 교수가 사랑의 교회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은 건 8년 전이다. ‘바보 예수’와 ‘생명의 노래’ 연작 등을 그린 김병종의 작품은 대영박물관·로열 온타리오 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국내에선 그가 자신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400여 점을 기증해 건립 토대를 닦은 ‘남원 시립 김병종 미술관’에서 상설전이 열린다.

 

김 교수는 “‘예수' ‘생명’을 주제로 그림 그린 화가라는 게 알려지면서 종종 대형 교회로부터 작품 제작 의뢰를 받았지만 그때마다 선뜻 응하지 못했다”며 “대개 교회에선 유럽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이탈리아 성화 계열의 그림을 기대하는데, 그 스타일을 따르는 건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도 와서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다 송홧가루를 만났다. 그 작은 송홧가루가 지능을 가지고 날아가는 사실을 보며,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복음 3장 8절)’는 성경 말씀이 작품 위로 걸어 들어왔다. 바람을 만지거나 본 사람은 없지만 바람은 실재하는 것이며 창조주의 성령도 그러하다는 성경 말씀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성경 말씀에서 영감을 얻되, 그 어디에도 십자가를 비롯해 종교적 색채는 드러나지 않는 ‘송화 분분’이 탄생한 배경이다.

김병종의 '송화 분분'. /사랑의 교회

 

김 교수는 “작품을 그리며 가장 신경 쓴 것이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림, 조용히 걷게 하는 그림이었다”고 했다. “주일이면 차에서 내려 우르르 예배당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설교 끝나면 서둘러 나와버리는 도시인의 예배 모습을 보고 ‘오솔길’ 하나 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우리 어릴 적 어머니 손잡고 꽃 피던 들길 걸어 교회에 다녔던 추억처럼, 도시인들도 홀로 조용히 걷거나 묵상하는 여유를 갖게 하고 싶었다.”

 

작품 옆에는 생전 이 작품을 본 이어령 선생의 평이 함께 붙었다. “그는 바람을 그리려 하고 시간을 붙잡으려 한다. 그의 눈은 바람이 불어오고 시간이 시작되는 지점을 응시한다. 그곳은 창조가 시작되는 곳이다.”

 

◇공공미술관이 된 교회

 

김 교수의 작품뿐 아니다. 지난 18일 사랑의 교회 건물 지하 2·3층 예배당 앞 약 70m 길이의 복도에는 그림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부활절을 맞아 미술인 선교회에서 헌정한 ‘Bible Road’전이다. 지하 5층에는 운보 김기창이 1952년 6·25전쟁 당시 이 땅에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오기를 기원하며 그린 ‘예수의 생애’ 성화연작 30점(판화)이 전시돼 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독일 베를린 독일역사박물관에 초대되기도 했던 바로 그 작품이다.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예수님 등 성화를 조선시대 풍속화처럼 표현해 친근함이 느껴진다. 신앙심 깊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녔던 김기창은 주일학교에서 예수 그림 카드를 받고 감동해 언젠가는 이런 성화를 그리겠노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운보 김기창이 그린 ‘예수의 생애(판화)’. /사랑의 교회

 

교회 건물 1층부터 지하 5층까지 외벽에는 ‘차세대 백남준’으로 불리는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53) 작가의 ‘은혜의 폭포’가 흘러내린다. 지난해 부활절을 기념해 이이남 작가가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 배경을 결합해 만든 가로 5m, 세로 27m의 거대한 LED 조형물이다.

 

시시각각 변모하는 박연폭포의 다채로운 모습이 실제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강렬한 소리와 함께 약 17분 동안 이어진다. 설치 당시 이이남 작가는 “한량없는 주의 은혜를 쏟아지는 폭포로 시각화한 작품”이라며 “말씀의 폭포를 통해 주께 받은 구원의 은혜와 감사가 각 사람에게 비추길 바란다”고 했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이 설치한 ‘은혜의 폭포’. /사랑의 교회

 

사랑의 교회 내 미술 설치를 담당하는 안장원 이음 파트너스 대표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언제든 작품을 보러 올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신경 썼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공 공간에 약 134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고, 내부 공간 영역까지 합하면 약 300점의 작품이 교회에 있어 웬만한 갤러리 규모를 압도한다”며 “또한 공모를 통해 신인 작가들을 발굴해 이들에게 전시할 기회를 주고,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지하철 2호선 서초역에 연결된 지하 1층 입구 초입에는 키네틱 아트(움직이는 예술)로 유명한 재미 조각가 안형남이 만든 ‘은혜의 비’가 내린다. 작품의 빛이 바닥으로 그대로 반사돼 실제 비를 맞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했다. 안형남은 작가의 말에서 “교회 문턱에서 하나님이 쏟아 부으시는 은혜의 비가 당신의 영혼과 가슴에 흠뻑 젖기를 바란다”고 썼다. 2013년 12월 교회 외부에 설치된 안형남의 대형 조각 ‘영원한 사랑’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안형남이 “조건 없는 사랑 밖에는 치료약이 없다”는 자폐증 환자를 둔 형님의 말을 듣고 시작한 ‘조건 없는 사랑’ 시리즈 중 하나다.

'키네틱 아트' 선구자인 안형남의 ‘은혜의 비’. /사랑의 교회

 

지상 7층에는 장대현 작가의 ‘제네시스(GENESIS·천지 창조)’가 펼쳐져 있다. 폴리우레탄과 유화용 오일이 어우러진 덩어리와 백색의 조각들이 부풀어 올라 마치 천지가 막 움트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표현한 장대현의 ‘제네시스’.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는 “교회가 단지 목사의 메시지뿐 아니라 수준 높은 시각 예술로 이 거리를 향해 열려지기를 소망했다”며 “메마르고 지친 마음들이 활짝 열린 교회 미술관에서 계곡의 샘터 같은 쉼과 힐링을 얻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남정미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