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병마와 싸우면서 90세 회고록 낸 한미연합사 창설의 주역 유병현](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311/14/2013111402544_0.jpg)
한국군의 대표적인 작전통(作戰通) 장군으로 꼽히는 유병현(柳炳賢) 전 합참의장이 병마(病魔)와 싸우면서 직접 쓴 회고록 원고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여기 참군인이 있었구나” 하는 감회였다.
유 장군은 5·16 후 군정(軍政) 시절 39세에 잠시 농림부 장관을 지낸 적이 있지만 1948년부터 1981년까지 33년간 줄곧 군(軍)의 요직을 거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관장교 시절엔 육군본부 작전국 교육과장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교육체계를 잡았다. 1966년엔 수도사단장으로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수도사단은 맹호부대로 불렸다. 귀국한 뒤엔 북한군의 대남(對南)도발 극성기에 합참 전략기획국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지내면서 예비군 창설과 대(對)간첩 작전을 주도했다.
1974년엔 5군단장으로서 6사단 지역에서 북한군이 파 들어오고 있던 땅굴을 지하에서 요격하는 작전을 지휘하였다. 철원의 제2땅굴이다. 회고록엔 이 ‘지하(地下)전쟁’ 이야기가 마치 추리소설처럼 전개된다. 이미 파놓은 땅굴을 발견한 적은 전후(前後) 세 차례 있었지만 파고 있는 땅굴의 방향과 깊이를 예측하여 미사일을 격추하듯이 대응 땅굴을 파서 요격에 성공한 예는 한국은 물론 세계전사상(戰史上) 처음일 것이다.
유 장군은 1974년 말 합참본부장 겸 대간첩대책본부장으로 옮겨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한미연합사령부’ 창설을 주도한다. 한미연합사 창설은, 그때까지 미군에 종속적이던 한국군의 위치를 대등한 동맹군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전시(戰時)에 미군의 대규모 지원을 제도화한 것이다. 그 뒤 한반도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북한의 핵(核)개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대응 핵개발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한미연합사의 안전판 역할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한미연합사 창설은 한미 양국의 국가 지도부가 동의함으로써 만들어졌지만 시종일관 이 협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사람은 한국 측 대표 유병현 장군이었다. 유 장군은 ‘연합사는 내 작품’이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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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연합사령부(CFC) 창설식에서 브라운 미 국방장관이 미 대통령의 축사를 전달했다. 맨 왼쪽은 박정희 대통령(1978.11)
유 장군은 1979년 10·26사건 때는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었다. 위컴 사령관이 미국에 가 있었으므로 유 장군이 연합사를 대표하여 미국과 협의, 위기를 관리하였다.
12·12사건 직후 합동참모의장이 된 그는 1980년 5월의 광주사태 때 미군과 공조, 북한군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신경을 썼다. 최근 《조갑제닷컴》은, 광주사태 때 북한군 1개 대대가 들어왔다는 탈북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유병현 장군 인터뷰를 실었다. 대국(大局)을 보는 전략가의 한마디 한마디가 북한군 개입설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무력화(無力化)시켰다. 필자는 ‘졸병은 졸병의 시각으로, 대장은 대장의 시각으로 이야기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합참의장 시절이던 1980년 말, 그는 방미(訪美) 길에 오르면서, 레이건 신임 대통령(당시는 당선자 시절)과 정상(頂上)회담을 성사시켜달라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밀명(密命)을 받는다. 오랫동안 미군 고위층과 좋은 관계를 가지면서 안보협력을 해왔던 유병현 장군의 진가(眞價)가 외교전선에서도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전 유엔군사령관 베시 대장 등의 도움으로 레이건 당선자의 측근인 리처드 알렌(뒤에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만나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金大中)씨의 감형(減刑)을 조건으로 전두환-레이건 정상회담에 합의하였다. 당시의 비밀접촉 과정과 기록이 이 책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내가 김대중을 살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유 장군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은 이 자료로 입증된다.
1981년 6월에 전역(轉役)한 그는 주미(駐美)대사를 거쳐 1986년에 공직(公職)에서 물러났다. 필자가 유병현 장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 무렵이다. 박정희, 하나회, 5·16, 10·26, 12·12 사건 등의 비화(祕話)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났다. 유 장군은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하고 군정의 농림부 장관으로 근무하였음에도 정치엔 관심이 적었다.
1952년 육군본부 작전국에서 과장으로 근무할 때 작전국장 이용문(李龍文), 차장 박정희(朴正熙) 대령이 미군과 교감하면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제거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던 사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고 한다. 유병현 장군은 군내외의 정치적 격변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국군의 발전과 동맹국인 미군과의 협조에 진력했다. 유 장군은 너무 모범적 답변만 하여, 군내(軍內)의 권력투쟁 등 기삿거리를 좇는 기자로서는 좀 심심한 취재원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서 전시작전권 환수라는 선동적 용어를 앞세워 한미연합사 해체를 추진하자 80대 노병(老兵) 유병현 장군은 투병(鬪病) 중임에도 더 바빠졌다. 자신이 산파 역할을 한 한미연합사가 좌파 선동에 의하여 위태롭게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연합사 해체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책을 펴내고 인터뷰와 기고문을 통하여 반미친북(反美親北) 세력과 싸웠다.
필자가 유병현 회고록 원고를 제대로 읽은 것은, 지난여름 파리로 가는 대한항공 점보기 안에서였다. 12시간이 걸리는 비행시간을 활용하려고 원고를 갖고 탔다. 유 장군의 90평생을 압축적으로 읽었다.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명작을 읽는 것처럼 감동적이었다. 언론과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참호와 밀림과 상황실에서 오로지 군대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준비하고, 싸우고, 고심(苦心)하였던 일꾼이 있었다. 그런 일꾼형 군인들에 대하여 필자가 너무 무관심하였다는 미안함도 우러나왔다.
유병현 장군은 이 회고록을 투병 중에 썼다. 그런 점에서 그의 마지막 전투였던 셈이다. 유 장군은 <여러모로 부족한 나에게 40년이나 공직에서 봉사할 기회를 준 나라에 보은(報恩)하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
그는, 86세에 급성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을 왕래한 후유증으로 하루 한 끼는 액체영양식을 직접 위에 투입해야 한다.
<한 발은 기동성을 잃고, 한 눈은 실명(失明)하여 3급 장애자가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死境)을 헤매다 보니 새삼 필자가 걸어온 길이 특이하고 남다른 점이 많았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관(副官)과 보좌관들을, ‘군사학파 문하생’이라고 부르는데, 15명의 부관 중 12명이 장성으로 진급하였다. 유 장군을 따르던 이들이 강력하게 권하여 5년간 투병 중 집필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대필(代筆)하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군사편찬연구소 양영조(梁寧祚) 박사가 회고록을 읽고 출판을 권했고, 유병현 장군이 필자와 의논한 것은 2012년 여름이었다.
유병현 장군은 머리글에서 <심한 병마와 싸우며 아흔인 내가 이 글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천운(天運)이었다>고 썼다. 대한민국이 유병현 장군 같은 인물을 가진 것도 천운이란 생각을 했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조선 : 2013.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