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사채의 세계
◇글 싣는 순서
①불법사채 해결사가 된 전직 보이스피싱 총책
②"섬에 애들 팔아버리겠다" 벼랑 끝에 몰린 불법 사채 이용자들
③"마른오징어도 짜면 나온다" 사채업자의 세계
④이용자는 극단 선택, 업자들은 호화 생활…수사관들이 전하는 실태
⑤불법사채 악순환 막으려면?
"사채업자 선 넘었다" 불법 사채 '해결사' 이기동 소장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소년원 출신 20대 여성 A씨를 좀 도와달라"
지난해 4월, 이기동(41)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은 평소 잘 아는 소년원 관계자의 부탁 전화를 받았다. 이 소장도 소년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 일 같지 않았다. 부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A씨는 사연을 털어놓는 내내 흐느꼈다고 한다. 생활비가 부족했던 A씨는 사채업자에게 20만원을 빌렸다. 1주일 뒤 40만원을 갚는 조건(연이율 5214%)이었다. 매주 30만원씩 갚았지만, 빚은 두 달 만에 300만원으로 불어났다.
이 과정에서 사채업자들이 낀 7000만원대 전세대금 명의대여 사기에도 휘말려 버렸다. 이 소장은 앉은 자리에서 사채업자 8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1시간여 갖은 욕설과 고성이 오간 끝에 악성 채무가 정리됐다. 금액대가 큰 명의대여 사기 건은 전화만으로 해결이 어려웠다. 업자들과 서울에서 만나 담판을 짓기로 했다.
한때 조직폭력에 가담하기도 했던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연구센터 소장이 지난 2월 21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인터뷰를 했다. 우상조 기자
약속 장소인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는 불법 사채 업자 다섯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1대5의 상황이었지만 이 소장은 이들에게 불법 행위를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처음에는 기세등등하던 이들 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업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잘못이 있으니 일부 진행비만 돌려받는 선에서 끝내겠다.”
힘겨운 협상 끝에 사채 문제가 해결됐다. 한 업자가 "조직 생활하는 사람이냐"라고 이 소장에게 물었다. 이 소장은 "알 거 없지 않냐"라고 쏘아붙이고 자리를 떴다.
불법 사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소장의 젊은 시절 경험이 한몫했다. 그는 청춘을 '어둠의 세계'에서 보냈다. 20대 시절 8년간 보이스피싱 조직의 대포통장 모집 총책으로 활동했다. 범죄의 대가로 2년 6개월간 감옥생활도 했다. 10대 땐 폭력 사건 등으로 소년원을 두 번 다녀오기도 했다.
한때 조직폭력에 가담하기도 했던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연구센터 소장이 지난 2월 21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인터뷰를 했다. 우상조 기자
이 소장이 금융 사기 범죄자의 수법과 그들의 생리를 꿰고 있는 것도 이런 젊은 시절 경험 때문이었다. 사채업자의 핵심 영업수단은 대포폰과 대포통장이다. 이 소장에 따르면 불법 사채 업자나 보이스피싱 조직 등 금융범죄 집단에서 이용하는 대포폰은 80만원, 대포통장은 400만원대에 시세가 형성돼 있다고 한다. 명의도용 신고가 접수되면 대포폰 이용이 정지되고 대포통장 거래가 막힐 수 있다. 이 소장은 “금융범죄자는 굳이 무리하지 않는다. 분쟁이 커지면 수사망에 오르는 등 손해 보는 쪽은 범죄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소장은 A씨의 사연을 지난 5월 자신의 유튜브 채널 '총책 이기동'에 올렸다. A씨가 출연한 당시 영상이 주목받으며 불법 사채 피해 제보가 쇄도했다. 이후 이 소장은 불법 사채 이용자들의 사연을 듣고 실시간으로 이들의 악성 부채를 정리하는 생생한 과정을 보여주는 유튜브 방송을 매주 진행해 왔다. 원금과 법정 이자를 변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불법 사채 이용자들을 도왔다. 이 소장은 불법 사채 이용자들을 대신해 매번 방송에서 수십명의 사채업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한다.
그동안 이 소장이 해결한 악성 채무자만 150명이 넘고, 그 과정에서 접촉한 불법 사채업자들은 800여명이나 된다. 최근에는 업자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 "이 소장님, 팬입니다"라며 예상과 달리 '훈훈하게' 채무를 정리해주는 업자도 있다고 한다. 시청자 입장에선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지난 1월, 이기동(41)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이 제보자를 대신해 사채업자와 접촉해 빚을 정리해주는 모습. 유튜브 채널 '총책 이기동' 캡쳐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방송을 본 이 소장 부모와 주변 지인들은 이런 활동을 하는 그의 신변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장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제보한 피해자를 방관할 순 없지 않으냐”고 했다. 이 소장에게 제보를 해오는 피해자들은 수사 기관, 지원 기관에서 구제를 받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해당 기관들이 채무는 민사 문제라는 이유로 해결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불법 사채 이용자 협박 해결도
지난해 12월 경남에서 자영업을 하는 오모(39)씨는 아내가 몰래 총 46곳에서 8000만원대 사채를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내는 결혼 전 저축은행에서 대출한 2000만원의 이자를 갚기 위해 사채에 손을 댔다고 했다. 원금 이상을 변제했지만, 독촉은 계속됐다. 일부 사채업자는 딸이 다니는 유치원을 찾아가겠다고 협박했다.
불법 사채업자의 협박·독촉 문자. 오모(39)씨 제공
오씨는 협박 피해를 신고하기 위해 관할 경찰서를 방문해 사채업체 46곳의 입금내역을 파일로 정리해 경찰에 제출했다. 하지만 경찰에선 "업자들이 대포폰과 통장을 사용해 수사해도 잡기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경찰서를 나오며 그가 손에 쥔 건 "돕기 어렵다"고 말한 경찰관의 명함뿐이었다.
지난 2월, 불법 사채 피해자 오모(39)씨가 총 46곳의 채무 내역을 정리한 엑셀 파일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영근 기자
오씨는 이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소장을 알게 됐다. 이 소장의 도움으로 빚이 하나둘 정리되기 시작했다. "정말 해결이 될까"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업자들의 협박성 전화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오씨는 "한때 이혼을 결심했지만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며 이혼을 막아준 것도 이 소장이다. 그는 내 평생의 은인이다"라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총책에서 '범죄 예방 전도사'로
이기동(41)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의 소년원 수감 당시 모습과 이 소장 아버지가 쓴 편지. 이기동 소장 제공
이 소장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한때 범죄에 가담했던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그가 어둠의 생활을 청산하게 된 계기는 피해자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는 보이스피싱 총책으로 붙잡혀 수사를 받던 중 한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내가 칼만 안 들었지 사람을 죽였구나"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컸다. 부끄러운 아들로 살아온 자신은 부모님 앞에서 얼굴도 들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 손문지(65)씨는 "아들은 내가 아니라 법무부가 키운 자식"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농담처럼 할 수 있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이 소장의 모친은 "아들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수없이 기도했다"고 했다.
2014년 출소한 이 소장은 금융범죄 예방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그해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보이스피싱과 대포통장의 정체』라는 책을 썼다.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수법 등 내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았다. 2015년 금융당국이 보이스피싱 예방 대책으로 내놓은 '30분 지연 인출제도'(100만원 이상)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2017년에는 소년원 출원생을 멘토로 돕는 법무부의 '푸르미 서포터즈'로 위촉됐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이력이다.
보이스피싱과 대포통장의 정체(상, 하). 이기동 저
"채무자, 돈 무서운 줄 알아야"
이 소장은 "사회가 채무자를 실질적으로 돕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채무자는 1시간이 급한데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하면 일주일 넘게 걸려 수사에 착수하고 적극적인 수사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 불법 사채는 간혹 조직범죄와 연결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수사 기관이 단순 채무 문제로만 접근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때 조직폭력과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하기도 했던 이기동(41) 한국금융범죄연구센터 소장이 지난 2월 21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불법 사채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쓴소리도 했다. "피해자 대부분이 감당하지 못할 돈을 빌리고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인데, 누구나 한번은 실수할 수 있지만 돈을 무서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나는 한때 그들보다 더 못난 사람이었다"면서 "사회가 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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