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철 조각가가 7년간 파낸 100m 길이의 토굴 안에는 조각 작품들이 가득하다. 첫 번째 굴 ‘오온을 통해 나를 바라보기’. 천장엔 연꽃 모양의 조명을, 벽면에는 이리저리 꼬인 뿌리 형태와 해골 등을 조각했다. 인간이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 ‘나’를 찾아가는 구도의 여정을 표현했다. 강대철 조각가 제공
경악! 바로 그 자체다. 거대한 땅굴, 7년간 매일같이 그것도 혼자서 굴을 팠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돈벌이로 한 것도 아니다. 굴을 다 파놓고도 자랑은커녕 문을 닫아걸었다. 전남 장흥의 사자산 자락. 평범한 시골이지만 굴은 예사스럽지 않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갖가지의 조형물이 가득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거대한 지하 조각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면적 1650m²(약 500평) 규모에 굴 길이만 합쳐도 100m 정도는 될 것 같다. 굴 속 각종 이미지는 부조 중심으로 50가지 정도다. 한 작가의 구도자적 수행 공간으로 시작한 특이한 지하 현장이다.
주인공은 조각가 강대철이다. 한때 미술계의 혜성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는 1978년 중앙미술대전에서 ‘생명질’로 대상을 받았다. 고루한 구상 조각계에 신선한 새바람이었다. 그가 키운 ‘K 씨 농장의 호박’은 호박 가운데를 군홧발로 짓이겨 시대 상황을 상징하기도 했다. 경기도 이천의 조각공원을 조성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고, 개인전 등 작품 발표도 활발하게 했다. 1998년 페루 리마 국제 조각심포지엄에서 최고작가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선불교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작업은 수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예 수행 목적의 건물도 지어 도반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했다. 그런 결과였는지 해인사 백련암의 성철 스님 동상을 만들었고, 이는 경남 산청의 성철 스님 기념관 조형물로 이어졌다(2015년). 수행은 미술계를 떠나게 했고, 은둔 생활로 이어졌다. 강대철의 잠적. 은둔 생활은 작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지리산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옮긴 살림터가 현재의 사자산 자락 아늑한 곳이다. 이곳에 ‘차 마시는 방’이라도 하나 만들려고 땅을 팠다. 토질이 특이했다. 압착된 마사토와 황토는 그 나름대로 점력이 있고 견고했다. 양질의 흙을 만나는 바람에 높이 5m의 10여 평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명상의 방’으로 훌륭했다. 하지만 흙벽은 조각가의 삽질을 불렀다.
게다가 성철 스님 기념관 일도 끝냈기 때문에 여유가 생겨 본격적으로 굴 파기 삽질을 시작했다. 구불구불, 여기저기 굴을 팠다. 네 개의 굴을 파는 데 만 3년이 흘러갔다. 굴이 깊어지자 파낸 흙 버리기가 중노동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눈만 뜨면 땅굴 파기 작업에 매진했다. 흙 파기 작업 자체를 구도의 방편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술가의 길이나 구도자의 길이나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환갑 나이에 새로운 땅을 선택했고, 토굴 파기에 7년을 보내고, 이제 7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렀다.
“반복되는 곡괭이질 덕분에 어깨 위에 춤사위가 얹어졌는지 앉아서 쉴 때도 어깨가 들썩인다. 신명 난 이가 흥에 겨워하듯 들썩인다. 땅을 파는 곡괭이질이 나를 찾아가는 여행길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지를 모른 채 살아온 세월, 이제야 곡괭이와 더불어 대자유인이었던 나를 찾아가네.” 작가는 혼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제일 먼저 만나는 공간은 ‘예수 재림’, 그러니까 미륵과 같은 모습이다. 벽면과 바닥의 관 속에 누운 성상은 제도권 속에 갇힌 현실 풍자이기도 하다. 첫 번째 굴은 오온(五蘊)을 염두에 두고 굵은 뿌리 형태 위에 뇌의 형상과 해골을 조각했다. 뿌리는 생명의 근원이다. ‘나’의 실체를 찾아가는 실마리로서의 모습이다.
두 번째 굴은 석가모니불상을 조성했고,
세 번째 굴은 오온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식의 실체를 표현했다.
네 번째 굴은 무상관(無常觀)으로 백골을 선택하여 생사일여의 자각을 담았다. 이어 불교의 유식론의 근원을 염두에 두고 아뢰야식을 표현하고자 했다. 무의식의 세계를 의미한다. 거대한 뿌리 형상 곁에 경계의 대상으로 파충류의 모습을 넣었다. 화를 잘 내고 다투기 좋아하는 동물은 의외로 악어나 도마뱀 같은 파충류라 한 동물학자의 연구를 반영했다.
여섯 번째 굴은 길이만 해도 20m에 이르렀다. 여기에 고행상을 조성했다. 나무 뿌리 다발은 뇌 신경망과 같고 연기(緣起)의 어떤 구조와도 같다.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삶. 일곱 번째 굴은 법륜을 비롯해 뿌리 형태와 뇌의 구조를 새겼다. 좌뇌와 우뇌 가운데에 태아를 새겨 넣었다. 한마디로 ‘강대철 토굴’은 한 작가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그것도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의 방편으로, 조성한 특이한 공간이다. 대중적 호기심의 측면으로만 봐도 놀라움, 바로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미술계를 떠난 지 20년 이후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애초 치밀한 계획 아래 작업을 시작했다면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노동량을 계산했다면 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 흙은 계속 삽질을 요구했고, 벽면은 갖가지의 조형물을 허용했다. 그래서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어두운 땅굴에서 외로운 작업을 수행해 낼 수 있었다.
위로가 되었다면 벽면 위의 감실에 켜놓은 촛불이리라. 깜깜한 땅굴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는 형상들. 거기에 한 은둔 생활자의 집념과 삶의 단면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반도 땅끝 자락에서 일군 경이로운 ‘지하 미술관’ 아니 ‘깨달음의 선방’이다.
강대철은 ‘장흥 토굴’을 마무리하고 근래 강화도 전등사를 위해 관음상을 제작했고, 곧 점안식을 거행한다. 1980년대 ‘날리던 조각가’의 화려한 변신이라 할까, 잠적한 작가의 조용한 개선이라 할까. 하지만 강대철의 ‘지하 미술관’을 공개하는 나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세속적 호기심만 자극하는 것 같아서 더욱 그렇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입력 2022-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