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019년 7월 대통령궁에서 권기창 당시 주우크라이나 대사에게 신임장을 전달받은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밀주와 불법도박으로 큰돈을 번 개츠비를 비난하나, 그에게는 젊은 시절 가난으로 붙잡을 수 없었던 여인을 되찾으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했던 사정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나약한 저개발국이고 러시아의 침공은 코미디언 출신의 무능한 대통령이 나토 가입을 성급히 추진하다 초래한 것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그런 시각은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다. 나토 가입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취임 전부터 추진해 오던 것이며 우크라이나는 나약한 국가가 아니다.
내가 만난 젤렌스키 대통령은 뛰어난 리더였다. 2019년 5월 대통령 취임 후 필자는 신임장을 전달한 첫 번째 외국대사였다. 신임장 전달식 후 면담할 때 놀랍게도 대통령 앞에는 필기도구만 있고 면담용 자료가 없었다. 대통령은 앉자마자 영어로 부임을 환영한 후, “대사님과 협의하고 싶은 네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영어나 우크라이나어로 그 네 가지 사안을 아무것도 보지 않고 또렷하게 설명했다.
30분이 걸린 그 면담은 이례적으로 길어 기다리던 독일, 남아공 등 4명의 대사들이 자신들의 시간이 줄었다고 불평했다. 그 후 식사나 면담 등에서 만난 젤렌스키 대통령은 명석한 두뇌에 성실하며, 뛰어난 친화력을 가진 매력적인 정치인이었다.
앞서 우크라이나 대통령선거 유세 시 기자가 한국에 대한 인식을 물었을 때 “민주국가인 한국은 이웃에 독재국가(북한)가 있음에도 어떤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보여줬습니다. 한국은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함께 성취한 나라로 우크라이나의 본보기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2019년 10월 대통령은 일본 공식 방문에 이어서 우리나라도 공식 방문하고 싶어 했으나 여의치 않아서, 전용기로 사적 방문을 하였다.
가족과 함께 오후 9시에 도착해 다음 날 오전 3시에 출발할 때까지 6시간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필자와 가까웠던 우크라이나 의원에 따르면 대통령은 인천공항에서 식사 장소인 롯데월드타워 한국식당으로 가면서 서울의 야경과 발전상을 처음으로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고, 한국음식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을 사랑하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내총생산(GDP)만을 보고 우크라이나가 가난한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예를 들어, 건물 임차료 등을 현금으로 주고받아 통계에 안 잡히는 비공식 지하경제활동이 많다. 2019년 1인당 명목 GDP는 3500달러 수준이나, 세계은행이 물가 수준, 환율 등을 고려하여 구매력평가(PPP)로 계산한 자료를 보면 9200달러로 훨씬 높아진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3대 농업대국이자 세계 2위의 곡물수출대국이다. 항공기, 우주발사체 설계·제작 기술력을 보유한 세계 7위 국가이고, 정보기술(IT) 산업이 발달해 키이우 삼성전자 개발연구센터에는 600여 명의 엔지니어가 갤럭시 휴대전화용 소프트웨어를 개발 중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서방의 자유민주주의는 꿈이다. 그 꿈을 위해 그들도 우리나라처럼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유로마이단 혁명을 담은 넷플릭스의 ‘Winter on Fire(불타는 겨울)’를 보면, 2013년 11월부터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시민들이 함께 의지하며 93일간 격렬하게 시위를 했고, 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그들이 지금 전쟁에서 보여주는 감동적인 용기와 불굴의 정신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고, 서구 민주주의를 꿈꾸며 투쟁해온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그 문구는 개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우크라이나에 비해 많은 분야에서 유리한 입장을 가진 우리가 힘든 전쟁을 치르는 우크라이나를 낮게 본다면 이는 자유세계의 성숙한 선진국 국민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산업화, 민주화를 먼저 이룬 국가로서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우크라이나 국민과 대통령을 더욱더 이해하고 지원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경제적 잠재력을 고려하여 앞으로 두 나라가 협력 파트너로 더 가까워지기를 고대한다.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 동아일보 입력 2022-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