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분열을 통합으로 만들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102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윤석열 제20대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해 3월 검찰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2주간의 칩거를 깨고 맨 처음 찾아간 인사였다. 당시 윤 전 총장은 김 교수에게 “제가 정치를 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국민을 위해 뭔가를 남기겠다는 사람은 누구나 정치를 해도 괜찮다”며 “적극적으로 정치하라고 권하지도 않겠지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고 조언과 덕담을 건넸다.
김 교수에게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대통령 당선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대선일인 지난 9일 김 교수를 서울 서대문구 원천교회에서 만났다. 다음날인 10일엔 이번 대선의 의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김 교수는 중앙SUNDAY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함께 새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당부를 전했다. 김 교수는 “문 대통령의 분열 정치를 바꾸려면, 정치의 방향부터 바꿔야 한다”며 “새 정부가 정치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5년 동안 나라는 더 힘들어진다”고 걱정했다.
오래전 부인과 사별한 그는 원천교회 인근에서 혼자 살며 집필·강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주요 문답.
윤 당선인, 분열 정치를 통합으로 바꿔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김형석 교수의 첫 만남을 보도한 중앙일보 2021년 3월 23일자 지면.
국민이 왜 윤 후보를 선택했다고 보십니까.
“첫째, 그는 검찰총장일 때 대한민국을 지켜줬습니다. 헌법을 지킨 거죠. 그 공로를 국민이 인정한 것이라고 봅니다. 둘째, 그는 그릇이 크고 사심이 없어요. 그 점 또한 국민이 인정했다고 생각해요.”
윤 당선인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정부는 국민과 더불어 계속됩니다. 대통령은 그 가운데 5년을 맡는 거예요. 대통령이 나에게 주어진 5년 동안 할 일이 뭔지, 그걸 고민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분열을 통합으로 만드는 거지요. 인간적으로는 문 대통령을 깨끗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취임사 때는 국민 통합을 얘기해 놓고 지금까지 분열만 만든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지난번 3·1절 기념사 때도 김대중 정부가 첫 번째 민주정부라고 하던데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나요.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체제부터 전두환 정권까지는 민주주의의 암흑기였고, 노태우 정부를 거쳐 김영삼 정부 때부터 법치국가가 됐지요. 법치국가가 곧 민주국가니까요. 마치 김대중 대통령이 다 한 것처럼 말하는 건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는 겁니다. 새 대통령은 분열을 통합으로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두 달 후면 새 정부가 출범합니다. 어떤 걸 바라시는지.
“일본·중국과 1년에 100명씩 교환대학생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한국에서 일본과 중국에 국비로 100명씩 보내 주고, 일본과 중국에서 100명씩을 받는 거죠. 그리고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에서는 우리가 100명씩 받아주는 겁니다. 그렇게 교환대학생 제도가 성공하면 대통령 10명이 하는 것보다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지요. 지금처럼 일본은 나쁜 나라라고 치부해 버리면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는 건데, 그건 잘못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일본의 움직임을 잘 보세요. 러시아·중국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낙후된 나라이고, 미국·유럽은 수준 있는 나라들이에요. 낙후된 나라들이 미국이나 유럽 수준으로 올라가려면 30~50년쯤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는 지금의 일본처럼 우리도 미국이나 유럽과 우호 관계를 잘 유지하라는 거지요. 나중에 러시아나 중국이 민주국가가 되면 그때는 자연스럽게 그들과의 우호 관계도 깊어질 거예요.”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사회 갈등이 심화됐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이기적인 경쟁만 하면 사회가 무너지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 사회는 올라갑니다. 국가도 민족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국가나 사회가 올라가는 단계에 필요한 게 갈등입니다. 갈등이 전혀 없는 민족은 살아남지 못해요. 아무 갈등 없이 열매나 따 먹고 살았던 하와이나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은 소멸했어요.”
어떤 분야의 갈등이 가장 심하다고 보시는지요.
“정치 이념의 갈등이죠. 미국·유럽·캐나다는 좌우 분열이 진보와 보수로 바뀌면서 공존하게 됐어요.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면서 ‘북한 같은 나라가 돼도 좋으니 통일만 하면 된다’는 식인데 그건 아니에요. 그것은 역사를 100년 끌어내리는 일로, 자유와 평화를 포기하겠다는 건데… 지금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보다 더 나쁜 겁니다. 문재인 정부는 갈등을 분열로 만들었고, 결국 갈등은 병이 됐어요.”
갈등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갈등이 분열이 되면 갈등은 그 생명력을 잃게 돼요. 해결책은 좌우로 분열하지 말고 진보·보수로 공존하는 겁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열린 사회로 가야 해요. 그리고 하나 더, 권력을 가지고 갈등을 해결하려 하면 승자와 패자나 생긴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대화로 해결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미안한 얘기지만 실패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요. 왜 그럴까요? 문 대통령의 정치적 이상이 좌파나 진보보다 앞서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다 보니 그 안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청와대가 운동권으로 구성됐던 거고. 새 정부가 문 대통령의 분열 정치를 바꾸려면 정치의 방향부터 바꿔야 해요. 정치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5년 동안 나라가 더 힘들어질 겁니다.”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시는데 건강 비결이 궁금합니다.
“아침 6시쯤 일어나서 몸을 풀어 줍니다. 식사는 늘 똑같아요. 우유 반 잔에 호박죽 반 잔, 계란 반숙에 샐러드, 그리고 토스트나 찐 감자를 먹어요. 점심이나 저녁은 생선이나 고기 위주로 먹고요. 차로 이동할 때는 무조건 잡니다. 어렸을 때 건강이 안 좋아서 어머니는 내가 스무 살까지 사는 것만 봐도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과로나 무리는 안 해요. 100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90에서 멈춥니다. 신체적으로 건강해서 오래 사는 게 아니라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 같아요.”
무리하지 않으면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요.
“항상 공부해야 합니다. 일과 공부를 안 하면 몸도 마음도 빨리 늙어요. 주변에 100세까지 산 사람 7명이 있는데 공통점이 있더군요. 첫째, 욕심이 없어요. 둘째, 남 욕을 하지 않아요. 사람은 정서적으로도 늙습니다. 내 친구인 안병욱(1920~2013) 교수는 ‘젊게 사는 방법은 공부·여행·연애’라고 하더라고요.”
내 즐거움·행복은 남이 만들어 주는 것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일까요.
“60~75세까지가 가장 좋았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75세까지는 모든 게 성숙해지고, 내가 나를 믿고 따를 수 있고, 또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을 만한 나이가 되니까요. 75세까지 성장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문제예요. 살아보니 90세까지는 늙는 게 아니에요. 90세까지는 누구나 일할 수 있어요.”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은 인간답게 사는 노력, 과정 그 성취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다 맡아서, 내 인격을 갖추게 되면 행복은 자연히 따라오니까 누구든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함께한다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 깨달았어요. 또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이 낳는 행복도 있지요.”
성공과 행복 중 한 가지를 선택하셔야 한다면.
“사회적으로 윗자리에 가느냐 못 가느냐를 성공의 기준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에요. 한 가지 더, 너무 빨리 성공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능력이 완성되지 못했는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결국 떨어지고 말거든요.”
인생에서 남는 건 무엇일까요.
“100년 이상 살아보니 내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남는 게 없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사람,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애쓴 사람,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에도 남는 게 있어요. 내 즐거움, 행복이라는 건 내가 만들어서 차지하는 게 아니라 남이 만들어서 주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나를 위해 있는 게 아니고 보답하기 위해서, 주기 위해서 있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살아 보려고 친구들과 노력했는데 여러분도 이웃들과 더불어 그런 뜻을 가지고 새 출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최경호 기자 squeeze@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2.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