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獨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
“땅 위에 척도가 있느냐? ”
“땅 위에 척도가 있느냐?
그런 것은 없다.
천둥 가는 길을 창조주의 세계는 막지 않지 않느냐
태양 아래 피어난 한 송이 꽃 또한 아름답다.
인간의 눈은 삶 속에서 때로 꽃보다 아름답다고 할 것들을 본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밤하늘 별을 보며 상념에 젖으려고 천문학과에 간 사람이나,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싶어 철학과에 간 사람이나, 정치적 카리스마를 얻으려고 정치학과에 간 사람들은 결국 당황할 것이다. 오늘날 그 분야 전문가들은 별과 인생과 정치의 신비를 음미하기보다는 자연과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주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천문학자 심채경이 말하지 않던가.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고. 컴퓨터 스크린을 들여다본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간은 현상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동물이 아니다. 지금 이 상태보다 더 바람직한 상태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답하려는 동물이다. 인생과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좌표를 묻는다. “도대체 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이 질문에 선뜻 정답을 내놓는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정직한 전문가는 망설이기 마련이다. “글쎄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따라야 할 객관적인 삶의 좌표가 존재한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에서 빛나는 별은 바로 그러한 삶의 좌표를 상징했다. 인간이 지금보다 나은 상태를 상상하는 동물인 한,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존재는 매력적이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고개 숙이고 땅을 바라보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만큼은 얼굴을 들고 별을 바라보라고 신께서 명하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답은 존재한다. 하늘의 별을 발견하고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비록 인생 행로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별이 존재하는 한 길을 잃을 위험은 없다. 인간이 할 일은 그 별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묵묵히 걸어가는 일일 뿐.
그러나 그러한 시대는 끝났다. 불모의 한국 근대문학사를 개척하고자 일본으로 간 국문학자 김윤식은 어느 날 도쿄대 정문 앞 작은 서점에서 문예 비평가 죄르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사서 읽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설의 이론>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 시절에 대한 서술이다. 창공의 별이 삶을 인도하는 시대는 끝났다. 세상에 불변하는 삶의 좌표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별이 사라졌다고 해서, 길 가기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어디론가 가야 한다. 기약 없이 헤매지 않고, 어디론가 걸어가야 한다. 누가 그 방향을 지시할 것인가. 가장 쉬운 방법은 그럴듯해 보이는 타자의 명령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 타자는 정치가일 수도, 부모일 수도, 성직자일 수도, 역술가일 수도, 선생일 수도, 아이돌일 수도 있다. 그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따르기로 할 때 그는 노예가 된다.
철학자 칸트에 따르면, 그러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타인에게 의존하기를 그만두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때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나 취향을 따른다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 공공연하게 내어 놓을 만한 가치를 스스로 선택하고, 따른다는 말이다.
칸트가 말하는 선택이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욕망이나 취향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통제는 괜찮다. 타인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므로.
그렇다면 가치는 저 너머 하늘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에 사는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가치다. 오늘날의 가치는 ‘지상의 척도’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선택하기에 가치는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 있다. 세속의 인간들이 내면의 이성을 사용해가며,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성적 인간이라면 미신이나 기분에 따르는 인생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정당화된 인생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여전히 물을 수 있다. 인간이 과연 그러한 지상의 척도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따를 수 있을까요? 칸트보다 반세기 정도 뒤에 태어난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노래한다. “땅 위에 척도가 있느냐?/ 그런 것은 없다./ 천둥 가는 길을 창조주의 세계는 막지 않지 않느냐/ 태양 아래 피어난 한 송이 꽃 또한 아름답다./ 인간의 눈은 삶 속에서 때로 꽃보다 아름답다고 할 것들을 본다.”
이 지상에 정답 같은 것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준칙에 의해서 세상을 교정해보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한다. 예컨대 낭만주의자들은 정답에 기초한 세계 변혁 같은 것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름답고 속박 없는 의지의 표현을 더 중시한다.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의 말에 따르면 “순교 그 자체의 가치를 믿을 뿐, 무엇을 위한 순교인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공보다는 차라리 실패를 고귀하게 여긴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어떻게 더 아름답게 실패하느냐에 관심이 있다. 제대로 된 실패가 그나마 이 세상에서 가능한 유일한 성공이니까.
창공의 별을 바라보는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긴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고 앞선 시대의 사고방식이 차곡차곡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누구는 창공의 별을 보고, 누구는 이성에 기초한 개혁을 믿고, 누구는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며, 또 누구는 인생의 조언을 얻으러 점집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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