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민중주의적 해석의 기원]
‘김수영 전문가’ 이영준 교수 논문서
시인 김현승의 1972년 저작인
‘한국현대시해설’을 기점으로 제시
‘주제: 약자의 강인한 생명력’ 요약
연구자들 다층적 해석 많아졌지만
“한국사회 필요 탓 단순 독해 유지”
“난 인간·세계 합일 상태로 ‘풀’ 이해
김수영은 예이츠 같은 긍정의 시인”
서울 도봉구 김수영문학관 들머리에 세워진 김수영 시 ‘풀’의 시비.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는 김수영(1921~1968)의 사후에 발표된 그의 마지막 시 ‘풀’에 대해서는 정형화된 해석이 존재한다. 풀은 억압받는 민중을 상징하고 바람은 그 민중을 억압하는 부당한 권력이라는 것이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가 권력에 탄압받는 민중의 시련과 슬픔을 나타냈다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한다는 식이다.
거의 모든 고교 문학 참고서에 약속이나 한 듯 이런 해석이 소개되고, 시험문제로도 자주 출제된다.지금 대부분의 연구자들과 평론가들은 이런 단선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풀’에 관한 다층적이며 참신한 해석을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학교 교육의 영향은 막강한 것이어서, 여느 독자들 사이에서 ‘풀’에 관한 민중주의적 해석은 일종의 ‘상식’으로 통한다.
물론 풀을 민중으로, 바람을 억압 세력으로 읽는 독법이 전혀 그릇됐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런 민중주의적 해석을 포함해 다채로운 해석이 충돌하고 교접하면서 ‘풀’을 둘러싼 풍요롭고 생산적인 의미망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김수영 시인. <한겨레> 자료사진
그럼에도 남는 의문은 있다. ‘풀’에 관한 이런 해석을 처음 내놓은 이는 누구일까? 1982년 황동규의 반론 이래 ‘풀’의 민중주의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연구자들은 적지 않지만, 풀을 민중으로, 바람은 억압 세력으로 단순화한 해석의 출발점에 관해서는 누구도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가령 김수영 연구자 강웅식은 2004년에 발표한 한 논문에서 “누가 언제 어떤 지면을 통해 그러한(=민중주의적) 의견을 개진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고 쓰기도 했다.<김수영 전집>의 엮은이인 이영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지난달 말 발행된 한국문학연구학회 온라인 학회지 <현대문학의 연구> 제75호에 실은 논문 ‘김수영 시의 시간―김수영 시에 대한 김현승 해설 비판’에서 김현승의 1972년 저작 <한국현대시해설>(관동출판사)을 그 기점으로 제시해 눈길을 끈다.
이 책은 시인이기도 한 김현승이 이상, 서정주, 유치환 등의 시 100여편을 골라 해설한 것으로, 김수영의 작품은 ‘현대식 교량’ ‘풀’ ‘눈’ 세편이 포함되었다. 이영준 교수는 “(이 책의) 해설에서 ‘풀’에 대한 민중주의적 해석이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 해설 내용은 그 책이 출판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각종 고등학교 국어 참고서가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김수영 전집> 엮은이인 이영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사진 오른쪽)가 지난 2009년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을 엮어 내며 마련한 기자간담회에서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민음사 제공
1970년대 본고사 세대 사이에 널리 읽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김현승의 책은 작품을 먼저 제시하고 ‘구성의 분석’ ‘감상’ ‘주제’로 나누어 작품을 해설하는 방식으로 짜였다. 작품당 해설은 대체로 두세페이지씩 할당되는데, 김수영의 ‘풀’은 그나마 한페이지 분량이어서 매우 짧은 편이다.
이 가운데 두 문단으로 된 ‘감상’ 편 일부를 인용하자면 이러하다.“크게는 민족의, 작게는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풀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상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의 바람은 불의와 부당한 탄압의 바람으로 볼 수 있고, 그 바람에 무력하게 쓰러지지만, 그 바람보다도 먼저―즉 그 바람의 세력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의로운 민족과 의로운 생명의 집단이다. (…) 이것은 역사의 법칙이요, 삶의 진리이다.”이런 ‘감상’에 이어 김현승은 이 작품의 주제를 간략하게 요약한다.
“주제: 약자의 강인한 생명력.”이영준 교수는 “1980년대 이후 거의 40년간 축적된 김수영 연구에서 ‘풀’에 대한 논의는 김현승의 저 단순한 독해를 이미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며 그럼에도 그런 독해가 꿋꿋하게 유지되어 온 까닭은 “한국 사회가 이런 독해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고 “이 해석은 냉전기의 이항대립적 사고를 무심코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
김수영 시인. <한겨레> 자료사진
이 교수는 이런 식의 ‘풀’ 해석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반박의 논거는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풀뿌리가 눕는다는 사실”이라며 “생명의 활동이 마지막에 이르러 풀뿌리가 눕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은 생명의 전체적인 모습에서는 자연스럽다”고 강조했다.
그는 “바람과 풀을 대립적으로 읽어낸 민중주의적 해석은 이제 완전히 포기되고 서로 친화적 관계로 읽히는 단계로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이영준 교수는 8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김현승의 이 해석에 앞서 김수영 시 ‘풀’을 민중주의적으로 읽은 사례가 나중에라도 확인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본다”며 “나 자신은 인간이 세계와 합일을 느끼는 지복(至福)의 상태를 표현한 작품으로 ‘풀’을 이해하며,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예이츠나 휘트먼에 비견되는 거대한 긍정의 시인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등록 :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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